나의 이야기

고양 서삼릉누리길을 따라

와야 정유순 2019. 1. 17. 02:47

고양 서삼릉누리길을 따라

(삼송역원당역, 2019115)

瓦也 정유순

   서삼릉(西三陵)은 한양도성의 서쪽에 세 개의 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능을 가기 위해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하차한다. 삼송역은 지축역과 원흥역 사이에 있으며 1996130일 개업했다. 삼송역의 삼송(三松)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봄·가을로 왕이 왕릉 제사를 위해 서오릉을 지나 서삼릉으로 행차할 때 소나무 세 그루가 유난히 아름답게 눈에 띄어 마을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지하철 삼송역 입구>

 

  삼송역에서 고양고등학교 뒷산의 숫돌고개를 넘는다. 이 고개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장군이 벽제관전투에서 승리하고 식사라도 할 요량으로 한양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창릉천에 매복하고 있던 왜군에게 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때 이여송은 훗날 복수를 다짐하며 이 고개에서 칼을 갈았다고 하여 숫돌고개인 여석령(礪石嶺)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여송은 권율장군이 행주대첩에서 승리하자 전투 없이 이 고개를 넘었다.

<숫돌고개>


   평지 같은 숫돌고개를 조금 지나면 거북바위가 자리를 지킨다. 이 바위는 북한산을 경유하여 뻗어 내린 한북정맥에 화강암으로 서쪽에 몸이 있고 머리는 동쪽으로 들어 오른쪽을 보고 있는 형상이다. 옛날에 북한산에서 살다가 창릉천을 따라 내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거북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땅속에 묻혀 진 다리가 땅위로 들어나면 창릉천 개울이 마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창릉천(昌陵川)은 북한산 문수봉에서 발원하여 서울 은평구와 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며 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 제1지류이다.

<거북바위>


   천일약수터에서 고개를 넘으면 농협대학교가 나온다. 농협대학은 1966년 농협중앙회가 1962년에 학교법인 건국학원에 의하여 설립된 농협초급대학을 인수하여 운영하는 전문대학으로 19669월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농협이 이 학교를 인수한 목적은 농촌에 정착하여 낙후된 농촌의 근대화를 위함은 물론 지도자와 농협의 간부요원을 양성하려는 것으로 졸업생은 전원 농협에 배치된다. 초기에는 전원 기숙사생활로 무상교육이었으나 1975년부터 입학금과 등록금을 징수한다.

<천일약수터>

<농협대학교 교문>


   농협대학교 정문을 지나 서삼릉 우측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너른마당이란 식당이 나온다. 건물도 와가(瓦家)로 고풍스런 맛도 있지만 마당에 광개토대왕비()를 원형 크기로 모작(模作)하여 새워 놓았다. 그리고 입석후기(立石後記)에는 우리는 위대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후예임을 잊은 채, 늘 약소민족 약소국가인 양 스스로를 비하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는 선조들의 불굴의 기개와 웅혼한 기상을 후손에게 길이 전해 주고자 5년여의 노력 끝에 광개토대왕비를 모셔오게 됐다우리 민족의 끓는 피는 반도에만 머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광개토대왕비 모작>


  맷돌을 깔아 놓은 길을 따라가면 후원의 보경지(寶慶池)라는 연못도, 주변에 배치되어 있는 석조물(石彫物)과 아직 배치되지 않은 석조물들도 예사스러움을 넘어 단지 식당이라기보다는 예술혼이 깃든 생각이 든다. 미리 정보라도 얻고 왔으면 이집 주인하고 많은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갑자기 불쑥 나서기도 염치가 없는 일인지라 꽃피고 새가 우는 좋은 날에 미리 연락하고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연못 보경지>

<거시기?>

<엄지>


   너른마당에서 600쯤 따라 가면 서삼릉이다. 서삼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중종의 아들 인종과 비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철종과 비 인철왕후의 예릉(睿陵이 있어 서삼릉이라 부른다. 그밖에 소경원·의령원·효창원 등 세자의 원() 3기와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를 비롯해 조선 말 고종의 2남 의친왕 묘에 이르기까지, 조선 역대의 후궁·대군·공주·옹주의 묘 45기와 태실(胎室)이 있는 광범위한 조선왕실 능원(陵園)이다. 이중 공개된 곳은 희릉과 예릉을 비롯하여 의령원과 효창원이다.

<서삼릉 지도>


   희릉(禧陵)은 조선 제11대 중종(14881544)의 계비로 들어온 장경왕후(14911515) 윤씨의 단릉이다. 장경왕후는 윤여필(尹汝弼)의 딸로 1506년 중종의 후궁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다음 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1(인종) 1(효혜공주)를 낳았으며,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25세에 세상을 떠났다. 희릉은 처음 태종의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되었다가 1537(중종3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중종도 처음에는 이곳으로 왔으나 문정왕후의 계략으로 서울 강남구 정릉(靖陵)으로 옮겨졌다.

<희릉 홍살문과 능역전경>

<희릉 참도>


  예릉(睿陵)은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쌍릉이다. 철종(哲宗, 18311863)은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헌종(憲宗)대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집안이 모두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왕후 김씨의 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국정을 바로 펴지 못하였다. 1863년 세상을 떠났다. 철인왕후김씨(哲仁王后金氏, 18371878)1851(철종2)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1858(철종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다. 예릉은 조선왕릉 형식으로 마지막 왕릉이다.

<예릉정자각>

<예릉 전경>

<예릉 배치도-네이버캡쳐>


   의령원(懿寧園)의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소생으로 1750(영조26)태어났다. 2년 뒤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75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처음에는 북아현동(애오개)에 조성하였으나 1949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창원(孝昌園)의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는 정조(正祖)와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2년 뒤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정조10) 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처음에는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1944년 이곳으로 옮겼다.

<의령원(뒤)과 효창원(앞)>

<서삼릉 재실>


   공개가 제한되어 갈 수 없는 효릉(孝陵)은 조선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쌍릉이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仁宗, 15151545)은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9개월) 왕이다. 1544년 왕위에 오른 후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賢良科)를 복구하였으나 몸이 쇠약하여 이듬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1524(중종19)에 세자빈이 되었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소생 없이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효릉은 왕의 능침에만 병풍석을 둘렀다고 한다.

<효릉-네이버캡쳐>


   또 하나 비공개로 들어갈 수 없는 소경원(昭慶園)은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원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는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소생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1625(인조3)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부인과 동생인 봉림대군(효종) 및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불모로 끌려갔다. 심양에 머무는 동안 조선을 대표하여 외교적 제량권을 행사하였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9년 후 조선에 돌아와 갑자기 돌연사 한다.

<소경원 전경-네이버캡쳐>


   서삼릉에서 갈 수 없는 곳이 태실이다. 태실(胎室)은 조선 왕실에서 출산한 아이의 태를 봉안하고 표석을 세운 곳으로사적 제200호로 지정된 서삼릉(西三陵) 경내의 효릉(孝陵) 서쪽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왕의 태 22위와 세자, 대군, 공주의 태 32위 등 총 54위의 태를 지금의 장소로 이전하여 모아놓았는데, 이는 일제가 뛰어난 솜씨로 제작된 백자 태항아리 등 태실 관련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함이었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이들 태실 군()을 재정비하였다.

<서삼릉 태실 군-네이버캡쳐>


   그런데 문제는 미려(美麗)했던 석조물(石彫物)은 모두 사라지고 공동묘지 같은 비석들만 무리지어 도열해 있으며, 비석의 앞면에는 태실의 명칭이, 뒷면에는 옮겨 오기 전의 원래 지명과 옮긴 날자가 일본 연호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연호부분만 삭제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기를 꺾으려고 명산의 맥을 끊고 전국 곳곳의 길지에 있던 태실마저 한 곳으로 모아놓아 왜식(倭式)으로 손을 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 비공개하고 있는 이곳도 하루 빨리 공개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일제가 창경궁으로 옮긴 성종태실-네이버캡쳐>

<태실비의 앞면(좌)과 뒷면(우)>


   서삼릉에는 당대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나 냉혹한 정치권력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이 한군데로 다 모여 더욱 눈길을 끈다. 인종은 장경왕후가 일찍 승하한 후 왕위에 올랐지만 계모인 문정왕후(15011565)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고, ‘강화도령철종은 권력자들에 의해 왕위에 올라 무엇 결정하든 제약이 따랐을 것이며, 소현세자 또한 불모로 끌려간 청나라에서 신문명과 새로운 국가를 만들 역량을 키워 왔으나 의심 많은 아버지 인조의 외면으로 세자빈 강씨와 아들들까지 의문사 당한다.

<서삼릉 위치도-네이버캡쳐>


   서삼릉을 들어갔다 나오면서 느끼는 점은 생전 권력에 시달려야 했던 분들이 죽어서 지금까지 시달림을 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능 입구에는 버스 한 대 들어서기 힘든 좁은 공간인데, 출입구 좌우로는 농협경제지주 젖소개량사업소가 초원을 조성하여 능을 옥죄는 것 같고, ‘한국마사회 종마목장도 종마장과 초원이 능역에 바짝 붙어 있어 능을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는 것 같이 능역이 어수선해졌으며 보기에도 민망하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데 이를 허가해준 행정당국의 역사의식이 의심스럽다.

<서삼릉입구와 종마장 입구>

<농협젖소개량사업소 초지>


   너른마당까지 되돌아 나와 원당역 쪽으로 방향을 틀어 철조망만 두텁게 쳐진 서삼릉 비공개지역을 옆으로 하여 씁쓸하게 지나친다. 일찍이 서울 능동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서 골프장을 하다가 이곳 고양시 원당으로 이전한 골프장에서는 백구(白球)가 굿샷을 날리며 흐린 하늘을 가르고, 오후로 접어든 햇살은 짙은 미세먼지 때문에 눈에 보이는 나무들이 실루엣을 이룬다.

<서삼릉 비공개지역>

<골프장의 실루엣>


   골프장을 지나면 물이 많은 지역이라는 수역(水域)이 마을이다. 수역이 마을은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속한 자연마을로 서삼릉과 원당역 사이에 위치하며 쇄기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 앞에 넓은 들판이 있는 평범한 농촌마을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식당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지금은 유명한 먹거리 촌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공사인지 사방이 파헤쳐져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수역이 마을 안내도>


   원당역에 거의 도달하기 직전에는 행주기씨대종중(幸州奇氏大宗中)묘역이 있는데 들르지는 못했다. 행주기씨는 기자조선을 개국한 문성대왕 기자(文聖大王 箕子)의 후손으로 행주산성 내성리에서 태어난 원순제(元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와 조선 때 퇴계와 성리학의 쌍벽을 이뤘던 기대승(奇大升)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3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다. 또한 이곳의 행주기씨도선산(幸州奇氏都先山)은 백제 초기부터 2000년 이상을 지켜온 선산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행주기씨 대종중 입구>


   지하철 3호선 원당역(元堂驛)은 원흥역과 화정역 사이에 있으며, 1996130일 개업했다. 현재는 성사동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당역은 과거 원당면 이었을 때 붙여졌다. ‘원당이라는 이름은 서삼릉의 정자각이 우람하고 커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역 주변에 고양시청, 덕양노인종합복지관, 덕양보건소, 고양시의회, 고양교육지원청 등이 있다.

<원당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