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기도 양평 부용산에 가다

와야 정유순 2019. 1. 8. 22:43

경기도 양평 부용산에 가다

(201917)

瓦也 정유순

   오늘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있는 부용산을 가기 위해 경의중앙선 양수리 행 전철을 탄다. 경의중앙선 양수역은 200512월 수도권 광역전철이 개통된 이후 현재는 수도권광역전철만 정차하고 있으며, 일부 급행열차가 출근시간대에 운행되고 있다. 양서면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편리하다. 그러나 양수역이 위치한 지역은 양수리가 아니고 양서면 용담리이다.

<양수역-2017년 7월>


   양수역에서 데크를 타고 내려오면 여름철에 애기부들 등 수초가 우거지고 연()이 꽉 찬 용담(龍潭)이 나온다. 용담은 가정천(柯亭川)이 흘러 내려오다 남한강 큰물에 합류하기 전에 만들어진 큰 늪에 용이 있다고 하여 용담이라고 한다. 이곳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정리, 양수두리, 석장리, 벌리의 각 일부와 서시면의 월계리 일부를 합쳐 용담리가 되었다. 참고로 양수역은 양평물소리길두물머리물래길의 시작점이다.

<용담의 애기부들-2017년 7월>


   양수역에서 철길 밑으로 굴다리를 지나 쭉 올라가면 이준경 이덕형 김사형 신효창 등 이른바 아홉 명이 정승이 묻혔다구정승(九政丞)로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그러나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가정천 다리를 건너 이정표를 따라 부용산 쪽으로 방향을 잡아 약수터를 지나 오두개고개를 넘는다. 어느 산이던 마찬가지지만 가끔은 급한 경사가 숨을 가쁘게 하고, 곳곳에 이정표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지만 하계산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양서면 용담리 마을>

<부용산 입구>


   9부 능선 쯤 올라갔을까? 부용산은 우측으로 화살표가 되어있고 거리도 약 2쯤 남았는데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오른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즈음 정상에 오르니 그곳이 하계산(326)이다. 그런데 이 산에 대한 아무 설명이 없는 대신 정상 마루에는 사방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으나 미세먼지가 시야를 흐리게 한다.

<하계산 가는 길>

<하계산 정상>


  북한강 너머 운길산 예봉산 예빈산이 북한강을 호위하듯 서있고 팔당호 건너 하남시 진산인 검단산이 용마산과 나란히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양수리가 있다. 두물머리가 있는 양수리는 양평군 양서면에 있는 섬이었다. 물론 서종면 문호리와 접하는 양수리 지역은 섬이 아니지만, 북한강이 흘러 내려오다가 용늪으로 갈라지면서 섬이 되었으나 지금은 연육교를 놓아 섬 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다. 양수리는 금강산 단발령에서 힘차게 남으로 쏟아내는 북한강과 금대봉 검룡소에서 솟아 나와 느리면서도 장엄하게 뻗어 내린 남한강의 물이 만나는 곳이다.

<하계산에서 본 주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팔당호 언저리에서/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자갈밭을/맨발로 걷는다//길섶에 박혀있는 작은 돌맹이와/눈인사 나누며 내 발소리에/옛 벗들의 음성을 더듬는다//잔설 베고 겨울잠에 묻힌 산들이/촉촉이 젖어 곧 깨어날 것만 같은 건//하늘에서 떨어진/눈이 녹아 흐르는/초목에서 뱉어 낸/땅에서 불끈 솟은 물/그 물들의 외침 때문이리라//물보라보다 작은 하나의 점에서부터/커지는 역사/커지다 사라지는 그들은/어디로 간 것일까//무색 무취 무형한/그 속에 묻혀 잠시 쉬어 본/이 길은 어디쯤 일까”<정유순의 시 사색중에서>

<하계산에서 본 팔당호>

<두물머리나루터-2017년 7월>


   하계산 정상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부용산으로 향한다.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는 겨울 가뭄이 계속되어 흙먼지가 풀풀 인다. 한 여름에 무성했던 잎들은 다 떨어져 땅 위에 수북이 쌓여있다. 한 해에 잎이 돋아났다 떨어지는 잎들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만약에 분해되지 않고 자연으로 되돌려지지 않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우주의 질량불변의 법칙인 자연의 순환(循環)이 참으로 묘하게 느껴진다.

<부용산 이정표>


   하계산에서 깊은 골을 지나 가파르게 올라가면 부용산이다. 부용산(芙蓉山, 366m)산이 푸르고 강물이 맑아 마치 연당(蓮堂)에서 얼굴을 마주 쳐다보는 것 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끔 중요한 행사도 열리는 모양이다. 나목(裸木) 사이로 유장(悠長)한 남한강은 살짝 살짝 모습만 스친다. 그리고 정상에 있다는 삼국시대 성()터는 문외한들이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나목과 낙엽>


   이 산에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고려시대에 어떤 왕비가 시집간 첫날밤에 왕 앞에서 방귀를 뀌자 왕이 크게 노하여 이곳으로 귀양을 보냈다. 쫓겨난 왕비는 이미 아들을 잉태한 몸이었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 왕자를 낳았으며, 총명한 왕자는 어른이 된 후 어미의 사정을 알고 도성으로 올라가서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는 오이씨를 사라면서 외치고 다녔다

<부용산 헬기장>


   소문을 들은 왕이 소년을 불렀고 이 오이씨는 밤사이에 아무도 방귀를 뀌지 않아야 저녁에 심었다가 아침에 따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소년의 말을 듣고서 잘못을 깨닫고 왕비를 불렀다. 하지만 왕비는 궁궐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마을사람들 사이에서는 산에 오르는 것이 금기시되어 왔으며 산에서 땔감을 구하면 곧 죽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부용산 정상>


   부용산에서 올라온 반대편인 양서면 신원리 쪽으로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다. 흙과 낙엽의 마찰로 가끔은 미끄럽기도 하다. 해발 표고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자연 앞에서는 대소 불문하고 자만해서는 아니 된다. 산을 올라갈 때는 힘과 용기가 더 필요하지만 내려올 때는 지혜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더 겸손하라고 조용히 타이른다.

<부용산과 신원리>


   신원리(新院里)는 남한강이 마을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흐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야곡리, 분점리를 합쳐 신원리가 되어 양서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동이점골, 묘골, 풀무골 등이 있다. 동이점골(분점)은 묘골 동쪽의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묘골(묘곡)은 월계 동쪽의 마을로 함양 여씨의 선대 묘소가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풀무골은 묘골 북쪽의 마을로, 야곡이라고도 불리며 대장간이 있었다 한다.

<양서면 신원리 지도>


  묘골(묘곡)마을에는 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51947.7)의 생가와 몽양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몽양은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안재홍(安在鴻), 정백(鄭栢등과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주도하였으나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韓智根)에 의하여 1947719일 암살되었다.

<몽양 생가>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관일이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몽양기념관 바로 앞에는 묘골애오와공원(妙谷愛吾窩公園)’이 있다. 묘골은 동네 이름이며, ‘애오와(愛吾窩)’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 몽양의 친필로 쓴 이 글귀를 돌에 새겨뒀다고 한다. 몽양은 그 의지가 왜곡되고 사상이 의심되어 한 때는 금기시 하는 인물이었으나,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이어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골애오와공원>


  몽양길 길섶 돌 위에 새겨진 몽양의 여러 말씀(어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 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1945년 해방 후 휘문학교 운동장에서 행한 첫 연설 중에서> 여러 어록 중에 눈에 띤다.

<몽양기념관>


   <조선중앙일보>사장으로 재직할 때인 1936년에는 베를린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을 제패하여 월계관을 머리에 쓴 손기정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제에 항거(신문사는 일제에 의거 강제 폐간)하고, ‘적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던 몽양의 기개(氣槪)를 회상하며 아직까지 미완의 장으로 남은 몽양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며 신원역으로 나온다.

<몽양선생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