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한 번째-1)

와야 정유순 2018. 12. 21. 01:10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한 번째-1)

(2018121516, 양산원동-부산다대포)

瓦也 정유순

   이른 새벽에 양산으로 내려와 토막잠을 자고 토곡산(土谷山, 855)자락을 따라 양산시 원동(院洞)으로 이동한다. 토곡산은 능선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비탈의 경사가 심하여 부산 근교의 3대 악산(惡山)으로 꼽힌다. 산자락 중간 능선에 자리 잡은 전망대에서 강 건너로 바라보이는 금동산(琴洞山, 463m)의 근육질능선이 낙동강에 생명의 줄을 대어 물 밑으로 이어진 하중도(河中島)가 토곡산과의 정기(精氣)를 이어준다.

<낙동강의 아침(양산 원동)>


   원동삼거리에서 원동천 지하보도를 따라 강변으로 내려간다. 원동은 마을 자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산을 굽이굽이 돌아서 넘어와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낙동강의 봄기운이 굽이굽이 산으로 올라오면 겨울보다는 봄에 각광을 받는 지역이다. 매년 3월이면 매화꽃 향기가 영포마을에서 원동천(院洞川)을 타고 낙동강으로 내려와 만발하여 매화축제가 열리고, 화재들녘에서 생산되는 당도 높고 육질 좋은 딸기는 멋과 맛을 함께 즐긴다.

<낙동강으로 가는 철길지하통로>

<경부선으로 철마는 달리고>


   그 무덥던 여름 내내 잎이 무성했던 미루나무도 가을바람 불어오자 잎을 떨구어 맑은 겨울하늘로 키를 높이 세우고, 밤 새 쌓였던 추억들은 경부선 상행선을 타고 화재천을 건너 북으로 올라간다. 화재들녘을 적시는 화재천(花濟川)은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토곡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洛東江)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총 길이는 6.2km로 비교적 작은 하천이지만 낙동강상수원 수질개선을 위해 하천유역순찰과 오염물질단속이 강화된 지역이다.

<낙동강의 미루나무>


   이 화재천 옆에는 화제석교비(花濟石橋碑)가 있다. 이 비는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인 황산도(黃山道) 가운데 양산 화재천에 있던 다리로 원래 토교(土橋)였던 다리를 석교(石橋)로 고쳐 세우면서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비문(碑文)에는 화재천을 건너기 위한 토교가 잦은 수해로 유실되자 많은 사람들이 큰 돌을 모아 홍에석교(虹霓石橋)를 완성하였다.’라고 적혀 있고, 다리의 이름과 위치, 세우게 된 내력과 당시 감독한 관리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史料).

<화재석교비>

<화재석교 자리>


   이 홍예석교가 있었던 이 길은 원덕취수장에서 물금취수장까지 연결되는 옛 황산강베랑길이다. ‘황산강(黃山江)’은 삼국시대 낙동강이 지나는 양산구간의 옛 이름이며 베랑벼랑의 지역 사투리다. 이 구간은 조선시대 영남대로 중 황산잔도구간으로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1900년대 초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철길에 편입되어 완전히 닫혀버렸으나 최근에 4대강사업으로 자전거길이 데크로 만들어져 그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다.

<황산강베랑길 자리>


   또한 이 지역은 요산 김정한(樂山 金廷漢, 19081996)1969년에 발표한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배경으로 낙동강 하류 어느 시골양반 집안의 수난사를 그린 이야기로 한 집안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우리민족의 근대사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속의 공간과 실제공간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이 일대는 김정한의 작품 중에 가장 명확하게 현존하는 문학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재천>

 

   황산강베랑길을 지날 때 경파대를 지나친다. 경파대(鏡波坮)는 조선 고종 때 선비인 정임교(丁壬敎)가 향토의 사우(士友)들과 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수창(酬唱)하던 경승지(景勝地). 정임교는 이황(李滉)의 문인인 고암(顧庵정윤희(丁胤禧, 15311589)의 후손으로 호는 매촌(梅村)이며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정임교는 양산향교의 문묘 중흥에 일조하여 유학의 창성(昌盛)을 도모하였다. ‘경파대라는 명칭은 당시(唐詩) ‘채련곡(採蓮曲)’거울 같은 물은 바람이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鏡水無風也自波)”에서 따왔다.

<경파대-네이버캡쳐>


   경파대자리를 한참 지나면 행동래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行東萊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 안내판이 나온다. 이 비석은 1871(고종8)에 조성한 비석으로 정현덕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웠다. 정현덕(鄭顯德, 18101883)은 조선말기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심복이다. 동래부사와 형조참의를 지냈으며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호는 우전(雨田)이다. 대원군이 실각된 후에는 파면되어 원악도(遠惡島)로 유배된 뒤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행동래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


   낙동강 변의 오봉산(五峰山, 533) 7부 능선에 있는 암봉인 임경대(臨鏡臺)는 신라 시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 이 일대의 수려한 경관에 반해 시를 지어 새겼으나 오래되어 조감하기 어렵다고 하며, 시만 전할 뿐이다. 최치원은 신라 때 최고의 문장가이며, 경주최씨 시조다. 또한 고종 때 정임교는 만년에 양산에 와서 임경대에 올랐다가 강변 아래쪽에 위치한 한 암벽의 누대를 차지하고 벗들과 함께 시를 읊었던 곳이 경파대다.

<임경대안내판>

<임경대가 있는 오봉산>


   낙동강물문화전시관을 지나 경부선 철도 아래로 난 개구멍 같은 통로를 통과하면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통도사의 말사인 용화사는 1471(성종2) 통도사의 승려 성옥(性玉)이 창건하였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1990년대에 산신각을 새로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오봉산을 배산(背山)으로 낙동강을 임수(臨水)로 작고 아담한 경관이 좋았으나 철길이 바로 코앞이라 기차의 소음은 무시 못 할 것 같다. 유물로는 보물 제491호로 지정된 용화사석조여래좌상이 유명하다  

<용화사대웅전>


   이 석불은 높이 125cm로 신라후기의 불상 양식을 따른 유물이다. 14세기 무렵 김해의 고암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강에서 건진 뒤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의 옛 절터에 모셔 둔 것을 이 절을 창건한 성옥이 옮겨왔다고 한다. 본래 노천에 있었으나 1947년 법당을 중수하며 법당 안에 모셨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불상은 듬직한 인상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신체 각 부분이 두툼하고 얼굴이 네모진 덕에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고개를 약간 숙인 듯 치켜 뜬 눈매는 중생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오봉산 아래로 펼쳐진 시가가 양산시 물금읍(勿禁邑)이다. ‘물금의 유래에 대해서는 신라와 가락국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때 이곳은 서로 금하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합의한 것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곳이 낙동강 하류지역으로 홍수 피해가 많아 수해가 없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물을 금한다.’는 뜻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오봉산과 물금읍>


   옛 지명이 황산진(黃山津)이었던 물금읍은 땅이 비옥하여 쌀과 보리 등 각종 농사가 잘되는데, 최근 농경지들이 주택이나 상업용지로 바뀐다. 부산과 가까워 원예농업이 발달하였고, 부산에 식수를 공급하는 물금취수장이 있다. 신도시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급격히 인구 증가추세로 외지인이 주민의 80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부산대양산캠퍼스와 대학병원이 들어섰다. 경부선 철도와 국도·지방도 등이 읍내를 경유하여 교통도 편리하다.

<물금의 낙동강>


   부산시 전체 수돗물 생산 중 23%가량을 담당하고 있는 물금취수장은 부산광역시와 낙동강 주변 지자체와 물 분쟁이 시작되는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취수장 건너 김해시 상동면 매리에 있는 매리공단이다. 20064월 김해시는 매리공단에 새로이 28개 공장의 설립을 인가하였고 이에 일부 부산시민과 양산시민이 공장 승인 취소 소송을 제기하면서 부산시와 김해시 사이에 물 분쟁이 시작되었다. 결국 김해시가 2010년에 승소하였으며, 상류에 위치한 대구시와 경남·북과도 가끔 첨예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물금취수장>

<김해시 상동면 매리>


   이미 20여 년 전에 사라진 물금나루는 유서가 아주 깊은 나루다. 신라초기 탈해왕 21(77)에 아찬(阿湌) 길문(吉門)이 가야국과 싸워 군사 1,000여 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운 황산진구(黃山津口)가 바로 물금나루로 비정되고 있다. 낙동강의 월당나루를 포함하여 수많은 나루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편으로 낙동강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루 가운데 으뜸으로 나루의 뿌리라고도 한다. 이 나루가 번성했을 때에는 노선이 세 개나 되었다. 물금나루터에 지금은 낙동강생태탐방선 물금선착장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생태탐방선 물금선착장>


   또한 낙동강 변 물금 쪽으로 황산언(黃山堰)’이란 둑이 발굴된 곳이 있다. 이 유적은 낙동강 살리기 하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양산 중산리 유물산포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최 하단에 점질토를 깔아 다진 위에 너비290, 높이180로 돌을 쌓아 골격을 만든 후 내·외부에 모래와 점토가 혼합된 흙은 겹겹이 다져 쌓은 석심토축(石芯土築) 형태의 토석혼축제언(土石混築堤堰)으로 밝혀졌다. 발굴조사결과 12세기 이전의 청자유물과 북송(北宋)시대 동전인 상부원보(祥符元寶)와 치평원보(治平元寶) 등이 발견되었다.

<유적공원 지구안내판>


   유적공원은 강변의 황산공원에 포함되며 이 공원 안에는 모래등마루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당산나무가 외롭게 지키고 있는 남평마을의 옛터다. ‘모래등은 현 남평마을의 옛 지명으로 1938년경에 대홍수로 인하여 철길 너머로 이주하여 지금은 당산나무만 옛터를 지킨다. 원 당산나무는 고목이 되어 죽고 새나무가 나와 명맥을 유지한다. 원래 이 지점은 낙동강과 양산천이 만나 형성되는 삼각주(三角洲)형태의 비옥한 땅으로 하우스 등 시설농업이 주를 이루었으나, 금은 4대강사업으로 황산문화체육공원이 되었다.

<옛 남평마을 당산나무>


   양산시 영축산(靈鷲山, 1059)과 천성산(千聖山, 922) 등에서 각각 발원하여 물금읍을 지나 호포 부근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드는 양산천(梁山川)은 호포교 공사가 한창으로 임시 설치된 부교(浮橋)를 건너 호포마을 앞으로 간다. 이 부교를 건너면서 조선조 정조대왕(正祖大王)이 화성으로 능행을 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이용했다는 사실(史實)이 퍼뜩 떠오르며, 혹시 이곳에도 배다리를 놓으면 어떨 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양산천 호포교 임시다리>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 속하는 자연마을인 호포마을은 금정산(金井山, 801)에서 낙동강(落東江) 쪽으로 여러 등성을 이루며 밀려나와 있는 형세로 볼 때 요수다의복호망월(妖獸多疑伏狐望月)이라 한다. 요사하게 의심을 품은 여우가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여우 ()’자와 낙동강 변의 포구라는 ()’자를 붙여 호포(狐浦)가 되었는데, 1925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한자를 바꾸어 호포(湖浦)가 되었다.

<양산 호포마을>


   양산시내로 이동하여 오전을 마무리하며 중식을 하고 나오는데 멀리 양산북정리고분군(梁山北亭里古墳群)’이 보여 당장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사적제193호로 지정(1963121)된 이 고분군은 양산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면적은 25,994로 천성산 줄기 끝 부분의 서쪽 경사면에 있으며 대형분은 능선의 정상 부분에, 소형분은 주로 산기슭 쪽에 모여 분포해 있다. 이 가운데는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발굴된 부부총(夫婦塚)과 금제조족(金製鳥足)의 출토로 알려진 금조총(金鳥塚)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양산북정리 고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