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한 번째-3 完)
(2018년12월15일∼16일, 양산원동-부산다대포)
瓦也 정유순
괘법동 강 건너 김해국제공항으로는 겨울비 내리는 궂은 날에도 착륙하는 비행기가 꼬리를 잇는다. 괘법동(掛法洞)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괘내리(掛乃里)와 창법리(昌法里)를 합치면서 형성된 지명이다. 괘내리는 마을 앞 나루터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라 ‘냇물이 괴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괸내’라 부르던 것이 괘내(掛乃)가 되었다고 하며, 창법리는 조선 후기 고지도에 나타나는 나루터 지명인 창진리(倉津里)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괘법동 부산산업용품유통단지>
<김해국제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
감전동의 옛 명칭은 ‘감동(甘東)’이며, ‘감동촌(甘東村)’ 또는 ‘감동리(甘東里)’라고 불렸다. 감동의 어원은 검도·검터이며, ‘감(甘)’은 신(神)을 뜻한다. 이러한 감전동(甘田洞)에 일찍이 배가 드나들어 주막과 횟집이 많았으며, 한때는 부산의 윤락촌으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사상구청과 북부산세무서등 관공서가 자리 잡았으며, 중고차 매매시장, 청과물을 취급하는 새벽시장 등이 있어 도로주소명도 ‘새벽시장로’로 명명되었다.
<감전동 둑방의 동백>
엄궁(嚴弓)이라는 동명은 신성한 신(神)의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궁(弓)’은 이 지역이 고대부터 낙동강변의 요지로서 무(武)를 강조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옛날 엄궁동 지역은 산을 등지고 있어 해 뜨는 시간이 늦고 겨울에는 낙동강의 세찬 바람이 불어와 주거지역으로는 부적합하여 빈곤한 마을이었으나, 부산시에 편입되고 사상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강변에는 내수면어업을 하는 선착장이 있다.
<엄궁동 내수면어업선착장>
빗발이 더 강해질 때 엄궁동을 지나 사하구 하단동으로 진입한다. 멀리 낙동강하굿둑이 가물거리고, 오리와 가마우지 등 물새들도 빗방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자맥질을 한다. 하단동의 하단(下端)은 ‘낙동강의 끝’이라는 의미다. 원래 동래군 소속이었으나 1942년에 부산부로 편입되었으며, 1957년에 서구 소속으로 되었다가 1983년에 사하구 관할로 되었다. 관내에는 동아대학교 승학캠퍼스와 낙동강 하굿둑사무소, 낙동강 홍수통제소가 있다.
<하굿둑과 낙동강 수면>
바다 짠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건설된 낙동강 하굿둑은 하단동과 강서구 명지동 사이의 낙동강 하구를 막은 총 연장 2.4㎞의 둑으로 1983년 착공하여 1987년 준공되었다. 하굿둑의 건설로 부산시민의 식수원 확보에 도움이 되었고, 부산∼진해 간 거리를 10㎞ 단축하였으며, 김해평야의 해수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으나, 하굿둑이 들어서면서 물의 흐름이 막히고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어 을숙도의 세계적인 철새도래지 기능을 상실하었다.
<낙동강하굿둑>
물은 계곡을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흐르면서 다른 샛강들의 물을 받아들여 더 큰 몸짓으로 조용히 바다로 들어간다. 이렇게 흘러 들어가면서 강물은 하구(河口)에서 바닷물을 만나는데 이곳이 기수역(汽水域)이다. 이곳에서 바닷물은 먼 여행에서 돌아오는 민물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의 장이며, 서로 소통하는 공간이다.
<낙동강하굿둑 공도교>
아울러 민물과 바다를 오가며 살아가는 생물들의 상호 적응하는 교육의 장이며 쉼터이다. 먼 바다로 나가서 산란하는 뱀장어나 연안 바다에서 산란하는 참게 등은 바다로 나가기 전에 바다에 대한 적응을 하고, 숭어나 황어, 황복, 우어, 연어 등은 산란을 위해 민물로 들어오기 전에 민물에 대한 적응을 하면서 들어온다. 그래서 기수역은 해양생물과 민물생물의 교류의 장이며 생태계의 보고다.
<하굿둑준공기념탑>
하굿둑으로 이러한 기능을 하는 기수역이 사라지면서 육지의 생명들은 더 넓은 세상인 바다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세상만 좁다고 탓만 한다. 기수역은 경제적 생태적 가치로 볼 때 경작지 환경의 250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도 마음의 완충지대인 기수역을 만들어 점점 확대해 나간다면 바깥세상과 교류하는 폭과 이해하는 깊이도 더 나아지고, 차단된 세상보다 정서적이나 사회적·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상승효과가 있을 것 같다.
<낙동강하굿둑 전망대>
하굿둑 하단동 입구에서 4차선 공도를 따라 1㎞쯤 걸어 들어가면 을숙도가 나온다. 을숙도는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1동과 하단2동에 걸쳐 있으며, 부산시청에서 서쪽으로 7㎞ 지점에 있다. 1978년 2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해군에서 부산시로 편입되었고, 1983년 12월 15일 강서구 대저2동에서 사하구 하단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낙동강 하구에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하중도(河中島)로 갈대와 수초가 무성하고 어패류가 풍부하여 한때는 동양 최대의 철새도래지였으며, 1966년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을숙도 지도>
<낙동강둔치의 갈대밭>
대부분이 저습지대로 홍수 때는 수몰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섬 크기에 비하여 주민이 적었다. 그러다가 윤중제(輪中堤)가 축조(築造)되고 경지정리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많은 주민이 이주함으로써 부산의 원예작물 공급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87년 4월 낙동강 하굿둑의 완공으로 섬 전역이 공원화되면서 대부분의 갈대밭이 훼손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자 철새가 줄어드는 등 생태계 파괴가 가속화되었다.
<낙동강문화관>
4대강 국토종주자전거길 종점인 을숙도에는 낙동강하굿둑기념탑이 하늘을 찌르고 낙동강문화관, 낙동강하굿둑전망대, 을숙도문화회관과 주차장 등 사람만을 위한 공간과 시설들이 다른 생명들의 서식지를 빼앗아 차지해 버렸다. 물론 사람들도 정서적 문화적으로 자연의 혜택을 누리면서 실아 갈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월적 지위가 아니라 다른 생명들과 공존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아울러 부산시도 더 이상 을숙도 개발계획을 백지화하고 복원사업을 추진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을숙도문화회관>
“낙동강 오리알”이란 속담이 있다. 이는 철새도래지였던 을숙도에 밀물이 들어왔다 썰물 때 물이 빠지면서 갈대밭 둥지에 있던 오리알들이 물에 둥둥 떠 내려와서 생긴 말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소외되어 처량하게 된 신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낙동강전투에서 북한군이 필사적으로 도하를 시도하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줄줄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당시 중대장이 “낙동강 오리알 떨어진다!”고 소리치면서 남을 조롱하는 비속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 물새들의 망중한>
을숙도문화관에서 지난 2월부터 걸어온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잠시 회상해 보고 다대포로 이동한다. 다대포는 하굿둑이 생기기 전에는 낙동강의 최남단 하구(河口)다. 다대포(多大浦) 지명의 유래는 큰 포구가 많은 바다라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주변 바다와 산의 경치가 아름다운데다가 곱고 부드러운 흰 모래사장이 전개되어 좋은 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일찍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으며, 따라서 국방상 중요한 요새지였다.
<다대포-굴뚝지점이 낙동강 하구>
<다대포해수욕장>
<다대포해수욕장 조형물>
그리고 1960년대 말까지 부산 근교의 한적한 어항이었으나, 목재 및 조선업이 유치되면서부터 어촌에서 공업지역으로 변모하였고 택지개발로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다대포해수욕장과 연계된 수변의 조망권을 확보하기위해 낙동강변 신평동 56호 광장∼다대포해수욕장간의 전체 4.1㎞의 군사용 철책이 철거되었다. 부산시는 강변대로 일부구간의 도로를 확장하고 도로와 하구사이 제방을 친수공간으로 조성하여 자전거도로·산책로·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다대포해수욕장과 아파트단지>
백사장 주변으로 조성된 솔밭어귀에는 한 때 매립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는 다대포를 주민들의 반대로 백지화 시킨 ‘다대포매립백지화기념비’가 개발의 손길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 흔적을 이야기 해준다. 일출의 장엄함과 낙조의 현란함이 바다와 강 그리고 철새와 어우러지는 다대포데크를 따라 몰운대 쪽으로 향하다가 등을 넘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선다.
<다대포매립백지화기념비>
다대포백사장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는 몰운대(沒雲臺)는 낙동정맥(洛東正脈) 산줄기의 맨 끝부분이다. 다대포 일대는 해류의 영향으로 짙은 안개가 끼어 시야가 자주 가려지기 때문에 몰운대라 하였다. 16세기 이전 몰운대는 섬이었다가 점차 낙동강에서 밀려온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측한다. 언덕 전체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지만 예전에는 동백나무가 울창했던 곳이다.<終>
<다대포와 몰운대 지도>
<몰운대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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