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남해바래길과 금산(2)

와야 정유순 2018. 12. 6. 02:16

남해바래길과 금산(2)

(20181212)

瓦也 정유순

   곤한 잠을 자고 눈을 뜨니 아침은 남해 상주해변으로 살며시 찾아온다. 조반을 마치고 은모래 빛 백사장을 거닐며 송림(松林)사이로 솟아오른 금산을 올려다본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남해섬이 간직한 최고의 명품은 누가 뭐래도 금산이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금산입구로 이동한다. 해발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자만하거나 경솔하지 말라는 자연의 가르침을 다짐하며 산속으로 들어간다.

<상주해변-2015년11월 촬영>


   금산(錦山, 701m)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였다. 신라 때 원효대사가 이 산을 찾았을 당시 갑자기 서광(瑞光)이 비춰서 보광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후 고려 말엽에 조선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입산하여 백일기도로 영험을 얻어 조선왕조를 세우고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비단 금()자를 붙인 금산으로 이름을 내렸다. 제일 높은 곳은 망대(望臺, 705)이며, 500이상의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금산산행로>

<금산입구>


   복곡저수지 안쪽 주차장에서 보리암 올라가는 마을버스(셔틀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보리암 남쪽에 있는 금산입구를 통해 등산로를 따라 무지개다리로 계곡을 건너고, 갈증 나면 목을 적시라고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쌍거북이 음수대를 만들어 놓았는데 겨울가뭄으로 수분(水盆)에 낙엽만 쌓였다. 올라갈수록 경사는 가파르고 숨이 꽉 차오를 즈음 쌍홍문에 다다른다.

<무지개다리>

<음수대>


   쌍홍문(雙虹門)은 금산의 관문이다. 옛날에는 천양문(天兩門)이라 불러왔으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두 굴이 쌍무지개 같다고 하여 쌍홍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강산 석홍문은 굴이 하나지만 금산 쌍홍문은 굴이 두 개로 쌍안경 같다. 옛날 부처님이 돌배를 만들어 타고 쌍홍문의 오른쪽 굴로 나가면서 멀리 앞바다에 있는 세존도의 한복판을 뚫고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금산이 숨을 쉬는 거대한 콧구멍 같기도 하다.

<쌍홍문>


   쌍홍문에서 천구암 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으로 사선대가 보인다. 이곳 사선대(四仙臺)는 동서남북으로 흩어져있던 네 신선이 이 암봉에 모여 놀았다 하여 사선대라 부른다. 참고로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보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선(四仙)이라 하면 신라화랑(新羅花郞)을 지도하는 우두머리를 국선(國仙)이라 하고 그 중에 가장 훌륭한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詳남석행(南石行) 등을 사선(四仙)이라 일컫는다.

<사선대>


   첫 관문인 쌍홍문 안으로 들어가 뒤돌아보면 장군이 검을 짚고 산을 향하여 서있는 형상은 장군암(將軍岩)의 모습이 쌍홍문을 지키는 수문장(守門將)이로다. 보리암 가는 길이 아닌 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제석봉(帝釋峰)’이 보인다. 이 바위는 도리천의 왕으로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帝釋天)이 놀다 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장군암>

<제석봉>


   제석봉 아래로 길을 따라가면 민간이 운영하는 금산산장이 나오고, 이를 가로 질러 좌선대까지 이어진다. 좌선대(坐禪臺)는 신라의 원효(元曉의상(義湘)대사와 윤필거사(尹弼居士) 등 삼사가 수도좌선을 하였던 자리라고 전해지며, 바위 위에는 이 분들이 앉았던 자리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그 시기에 무슨 수로 올라갔을까? 아마 지금보다 더 좋은 운송 수단이 있었을까? 아니면 축지법으로

<금산산장>

<좌선대>


   아무리 용을 써도 축지법은 통하지 않지만 쉬지 않고 열심히 걷는 것이 바로 축지법(縮地法)’이로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상사암 위에 서있다. 상사암(相思岩)은 조선조 숙종(肅宗) 시절에 전남 돌산지역 사람이 남해에 이거하여 살았는데, 이웃에 사는 여인에게 반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되자 이 여인이 이 바위에서 남자의 상사를 풀어 줬다하여 상사암이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금산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바위로 절벽이 아찔하다.

<상사암>


   상사암에서 뒤돌아 나와 흔들바위를 먼발치로 바라보며 단군성전(檀君聖殿)으로 향한다. 단군성전 입구에는 弘益人間 理化世界(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단군국조의 개천이념(開天理念)이 세상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리라라고 일깨워 준다. 성전 옆에 조성된 단군상(檀君像) 아래에는 中心言成(중심언성)이란 글씨가 보이는데, 이를 두 자씩 합치면 忠誠(충성)이 된다.

<단군좌상-中心言成>


   남해금산 단군성전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겨레의 시조인 단군(檀君)을 모시는 성역(聖域)으로서 한배검님의 가르침으로 김연성이라는 분이 많은 공력을 기울여 1995년에 건립 하였다고 한다. 성전에는 환인(桓因)하느님, 환웅천왕(桓雄天王), 국조단군왕검(國祖檀君王儉)의 천상(天像)과 천진(天眞), 삼신미륵(三神彌勒)을 봉안(奉安)하여 우리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다.

<단군성전>

<단군성전 내부>


   단군성전에서 다시 올라와 정상으로 향한다. 기묘한 바위들에는 누구의 이름인지 모르게 음각(陰刻)되어 있다. 아마 옛날에는 명승지에 왔다간 표시로 바위에 이름을 새겼던 것 같다. 높이 약34쯤 되는 그 바위에는 철쭉인지 진달래인지 헷갈리는 나무가 바위의 중앙에 바짝 붙어 기어 올라가 바위 정상에 잎을 활짝 피운다. 생명의 숭고함과 경외(敬畏)로움을 보여준다.

<생명(?)바위>

<생명(?)바위 측면>


   정상에는 금산 제1인 망대가 있다. 망대(望臺)는 금산에 있는 봉수대(烽燧臺)이다.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남단 봉수대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의 조망이 넓고, 아름다운 남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망대 아래 옆의 바위에는 유난히 큰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 가운데에 由虹門 上錦山’(홍문이 있으므로 금산에 오르다)이라는 글씨가 힘차게 각인돼 있다.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주세붕이 쓴 것이라 하며, 이 때문에 이 바위를 문장암이라 부른다.

<남해금산 정상>

<망대>

<망대정상>

<문장암>


   보리암(菩提庵)은 남해군 상주면 금산에 있는 사찰로 683(신문왕 3)에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창업한 것에 감사하여 1660(현종 1)에 왕실의 원당으로 삼았다. 전국의 3대 기도처의 하나이며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꼽힌다.

<보리암 보광전>


   오래된 역사와 절경을 품고 있는 보리암이지만 경내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별로 없다. 다만 절 아래쪽 탑대에는 1970년에 세운 해수관음보살상과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고 경남유형문화재(74)로 지정된 보리암전삼층석탑(菩提庵前三層石塔)이 있다. 삼층석탑은 허 황후(김수로왕의 비)가 인도에서 가져온 사리를 원효대사가 이곳에 모셔 두었다 하나, 두꺼운 지붕돌 과 3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보리암과 해수관음보살>

<보리암전 삼층석탑>


   보리암 제2주차장에서 마을버스(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복곡저수지로 나와 식당으로 이동하여 오전을 마무리하고, 앵강다숲길인 남해바래길 2코스의 끝부분인 홍현마을 입구에서 가천다랭이마을까지 약4를 해안길로 걸어간다. 앵강다숲길은 조용한 호수 같은 앵강만을 중심으로 어촌마을의 애환과 삶을 간직하고 있는 길이다. 그리고 각 마을마다 방풍림을 조성하여 농토보호와 쉼터로 활용하는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고향 같은 길이다.

<앵강만>


   홍현해우라지마을은 옛날 이곳에 소라가 많이 나서 소라를 잡아 생활한다고 라라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말 행정구역 개편 시 무지개 고개의 재가 있다고 하여 홍현(虹峴)이라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특산물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99년 전국 최초로 전복축제를 개최하였다.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 100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홍현황토촌>


   그리고 이곳의 방풍림은 약 250년 전에 해마다 23번 찾아오는 태풍피해를 막기 위해 남녀노소 온 주민이 흙을 퍼날러 자갈밭을 메꾸고 조성한 인공 방풍림으로 길이 250, 24, 면적 6,000(1,815)에 해송, 상수리나무, 팽나무, 이팝나무 등을 심어 만들었다. 특히 마을 법[동법(洞法)]’을 만들어 동절기에 아무리 땔감이 없어도 일체 나무를 자르지 못하게 하여 방풍(防風)은 물론 염해(鹽害)방지와 여름철 쉼터로 이용한다.

<홍현마을 방풍림>


   또한 천 년 역사를 지닌 홍현마을에는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에 홍이라는 처녀와 현이라는 총각이 살았는데, 현이 총각이 홍이 처녀를 깊게 사모하던 중 해삼을 잡으러 바다에 나온 현이가 고둥을 잡으러 온 홍이와 눈이 마주쳐 사랑을 고백하고 폭포 앞에서 만나 사랑이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다. 그 후부터 앵강바다에 달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선남선녀들이 나와 서로 사랑을 고백하였다고 하여 사랑의 명당이라고 한다.

<앵강다숲길>


   나무 전체에서 누린내가 난다고 하여 누리장나무가 된 나무들이 마을 길옆에 즐비하다. 누리장나무는 개똥나무, 깨타리나무, 개나무, 노나무 등 지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89월에 연백색 꽃이 피는데 꽃받침은 붉은색이 돌며, 열매는 핵과로 다 익으면 다섯 개의 붉은 화관에 싸여 있는 모습이 마치 브로치에 박혀있는 흑진주모양이다. 어린잎은 식용으로, 나무와 잎 등은 한약재로, 열매는 천연염료로 사용한다.

<누리장나무 열매>


   숲속으로 벼룻길을 따라가면 바다 저 멀리 하늘 끝닿은 지점에는 햇빛이 선을 긋는다. 놀며 쉬며 고개도 넘고 내도 건너 가다보면 설흘산(482)자락이 뻗어내려 경사를 이루고 그 경사진 곳에 계단식으로 만들어 놓은 다랭이농지가 있는 가천마을이 보인다. 마을 아래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 정자가 바다를 향해 가슴을 벌린다.

<수평선>

<설흘산과 가천다랭이마을>


   다랭이마을 맨 아래에는 허브농장이 있다. 무성한 로즈마리는 스칠 때마다 진한 향으로 환영한다. 가천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 마을 양옆으로 2개의 냇물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가천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다랭이마을은 남해군 가천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마을은 경사진 언덕을 두 배의 기쁨으로 일궈내고 세 배의 아름다움으로 가꿔냈다.

<허브-로즈마리>


   이 마을에는 기도가 영험하다는 암수바위가 있다. 암수바위를 이곳 사람들은 미륵불이라 부른다. 조선 영조시대에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가천마을에 묻혀 있는데 무덤 위로 우마가 지나다녀 몸이 불편하니 꺼내달라고 한다. 이후 현령이 그곳을 파니 이 암수바위가 나왔고 이 바위를 미륵불로 봉안하였다. 생긴 모습이 남근과 임신한 여성의 누워 있는 형상인 이 바위는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선돌이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도처이기도 하다.

<암수바위>

<암바위>


   다랭이마을 맨 위 주차장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모든 것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계단식 다랭이로 이어지는 논과 논 사이,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집들의 층계 등 모든 것들이 층층계단으로 도열해 있다. 유채꽃 피는 봄이었다면, 벼가 푸르게 자라는 여름이었다면,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었다면계절 따라 변하는 다랭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논도 다랭이, 집도 다랭이, 길도 다랭이

<아름다운 다랭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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