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 번째-3)
(2018년11월24일∼25일, 밀양초동-양산물금)
瓦也 정유순
작원관지 가장 높은 곳에는 1995년에 세워진 ‘작원관위령탑’이 서있다. 임진왜란 때 낙동강변으로 침입한 2만여 명의 왜군을 작원잔도(鵲院棧道)에서 3백여 명의 군관민이 결사 항전한 장소로 길이 막히자, 왜군들은 양산으로 우회하여 산을 타고 내려와 후방기습공격을 해와 3백여 명이 계속 항전하거나 퇴각하면서 낙동강에 떨어져 순절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자 세운 탑이다.
<작원관위령탑>
원래 작원관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지금보다 물금방면으로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간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1995년에 복원된 작원관 성문은 2층 누각으로 되어있다. 2층 누의 현판에는 공운루(拱雲樓)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모든 구름을 안을 수 있다는 누각’이란 뜻 같고, 아래 성문에는 한남문(捍南門)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남쪽으로 들어오는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다는 문’으로 해석이 된다.
<작원관 성문>
아직도 안개는 그윽하고 강변 따라 늘어선 경부선 철도도 낙동강 길을 함께 동행 한다. 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벗어나면 혼자 서있기도 힘든 작원잔도(鵲院棧道)가 나온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에 암반을 굴착하거나 석축을 쌓아 낸 길인데, 이러한 길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잔도(棧道)라 하였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작천(鵲迁)이라 불렀다. 작원잔도(鵲院棧道)는 양산 원동의 하주막에서 삼랑진에 이르는 벼랑길을 지칭하며,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낙동강 대밭길>
<작원관잔도>
작원잔도를 벗어나자 밀양시 구간이 끝나고 양산시(원동면 용당리)로 들어선다. 안개 속에서 빨간 남천열매는 이슬 머금은 눈물이 구슬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남천(南天)은 알칼로이드 성분이 있어 천식(喘息)이나 백일해(百日咳) 등에 진해제(鎭咳劑)로 사용한다. 원산지는 중국이며, 잎이 미려하고 꽃과 단풍과 열매도 일품이므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에서는 정원에 심고, 북부에서는 온실에서 많이 기른다.
<밀양시-양산시 경계>
<남천나무 열매>
원동면 용당리에는 가야진사(伽倻津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 지역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때 가야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왕래하던 나루터 가야진이 있던 곳이다. 가야진사는 낙동강 삼용신을 모시고 있는 제당으로 앞면 1칸, 옆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맞배지붕이다. 지금의 사당은 조선 태종6년에 세워져 내려오다가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탄압으로 헐리었다. 그 후 해방이 되어 현 위치로 다시 옮겨지었으며, 1983년에 경남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1990년대 초에 대대적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가야진사>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는 신라초기부터 국가의식으로 전해져 오던 제의(祭儀)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오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가야진사가 헐리고 용신제가 금지되는 수난을 겪었다. 마을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산속에 사당을 모시고 밤중에 몰래 제사를 지내며 명맥을 이어왔다. 가야용신제는 우순풍조와 국태민안을 비는 국가제례와 풍물놀이가 결합된 민속놀이로 경남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가야진용신제를 겸한 무형문화재 공연을 하고 있어 1,50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용신제전수회관>
아직 걷히지 않은 안개 속을 더듬으며 원동천이 낙동강과 만나는 원리마을에서 경부선 철길 밑 지하통로를 지나 원동초등학교 앞에 도착하니 오전이 거의 지나간다. 원동면은 남부의 낙동강 북안에 소규모의 화재들(평야)이 형성되어 있다. 경지율은 아주 낮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여 쌀·보리 등을 생산한다. 산지가 많기 때문에 축산업도 발달하였다.
<양산시 원동초등학교>
오후에는 경남 의령군 정곡면에 있는 호암 이병철(湖巖 李秉喆)생가로 향한다. 이 생가는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적 기업가인 호암 이병철이 태어난 집이다. 1851년 당시 천석꾼이던 호암의 조부께서 대지 면적 1,907㎡(약600평)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손수 지었고, 호암은 유년시절에 결혼하여 분가할 때까지 이 집에서 보냈으며, 잘 보존된 이 한옥은 호암재단에서 관리한다. 그 동안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쳤지만 처음 그대로 안채, 사랑채, 대문채, 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
<사랑채>
이 집은 풍수(風水)에 문외한이 봐도 예사롭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집과 연결된 마두산자락이 이 집 주변에선 노적가리가 쌓여 있는 노적봉(露積峰) 형상이다. 현장의 문화해설가에 따르면 “원래 집과 이어진 산의 이름이 말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마두산(馬頭山)이었는데 호암(湖巖ㆍ이병철의 호)이 유명해지면서 호암산으로 바뀌었고, 이 산의 기운이 흐르다 혈(穴)이 맺힌 곳이 이 집이라고 한다.” 즉 ‘말의 주둥이가 먹이를 먹는 형상’이란다.
<호암생가 뒤산인 호암산(마두산)>
사랑채를 돌아 안채로 가는 길목 절벽 바위에는 문화해설가가 “저쪽은 자라 모양, 이쪽은 두꺼비 모양”이라고 가르쳐준다. 과연 그렇게 보인다. 재미있어하니 “저기는 떡을 쌓아놓은 모습, 혹은 쌀가마니를 쌓은 모습”이라고 하고, 더 나아가 밭 전(田)자 모양의 바위도 있으니 하나같이 돈과 연결되거나 상서로운 동물 모양이라고 설명한다. 거기다 8㎞ 남짓의 남강이 역수(逆水), 즉 이 집을 향해 거꾸로 흐르는 모양으로 풍수에서 ‘역수는 재물(財物)이 모인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울 안의 복바위>
<자라바위>
호암은 여기서 부친 이찬우, 모친 권재림 사이에서 2남1녀의 막내로 태어나 성장했으며, 진주의 지수초등학교를 LG창업주 구인회와 함께 다녔고, 서울 중동학교를 다닌 후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돼 1년 만에 중퇴하여 정식 졸업장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병으로 집에 돌아온 그의 병을 고친 것은 고향집 우물이라고 한다. 울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6m깊이로 맑지만 사고를 우려해 닫아놓았다.
<안채>
이병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여러 장사를 하다 망해봤으며 노름에 빠져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 날이 많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 이 회장은 이미 결혼을 했는데 부인인 박두을 여사는 대구 달성출신으로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명인 박팽년의 후손이며, 그 마을 또한 회룡고미(回龍顧尾) 형으로 길지로 꼽힌다. 그들이 분가해 살던 집이 생가 맞은편인데 앞에는 아무 표시도 없으며 일반인의 출입도 금하고 있다.
<호암이 분가한 집>
이병철의 부친은 막내아들의 일탈(逸脫)을 왜 방관했을까? 호암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호암의 부친과 친한 도인(道人)이 집을 찾아와 갓 난 호암을 덥석 안아보더니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절대 하지 마시오. 때가 되면 자기가 알아서 다 할 겁니다.” 그 말을 믿고 부친은 아들이 제정신 차리길 기다렸으며, 예언대로 호암은 대구에 삼성상회를 차린 뒤 승승장구한다.
<생가 광 내부>
이 근방에서 큰 부자가 나오게 한다는 ‘솥바위’를 찾아 길을 나선다. 남강 입구에 다다르자 언덕에 정암루(鼎岩樓)가 먼저 반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낸 용재 이행(容齋 李荇)이 귀양살이를 하며 지은 취원루(聚遠樓)가 있던 자리였는데, 1935년 지역주민들의 뜻을 모아 임진왜란 승첩지인 이곳에 정암루를 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3년 군민의 성금으로 복구하여 지금에 이른다.
<정암루>
남강(南江)은 방어산(532m)을 중심으로 진주와 함안, 의령의 경계를 넘나들다 의령읍 앞을 지날 때는 ‘발이 셋 달린 솥을 닮은 바위’라 하여 ‘솥바위[정암(鼎岩)]를 만들어 놓는다. 이 정암을 중심으로 반경 8km 이내에서 큰 부자가 난다는 전설이 예부터 전해져 왔는데, 실제로 삼성(이병철), LG(구인회), 효성(조홍제) 등 세 그룹의 창업주의 생가가 위치하고 있다.
<솥바위(정암)>
그리고 옛 교통요지였던 이곳 정암진(鼎岩津)은 임진왜란 당시 망우당 곽재우장군과 의병들이 전라도 진출을 노리던 왜병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다. 그 나루터에는 의령군과 함안군 사이 남강을 가로질러 설치한 정암철교가 놓여있다. 1935년 일제강점기 때 준공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교각 일부가 파괴된 것을 1958년 남아 있던 두 개의 경간을 살려 상부는 기존의 철골트러스트 구조로 복원하였으며, 완전히 파괴된 부분은 새로운 교각을 세워 철근콘크리트 T형 보로 재건하였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 259,6m, 폭 6m이다.
<정암철교>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1552∼1617)는 의령에서 태어나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웠던 의병장이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에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의장군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서는 우리를 향해 금력(金力)이나 권력(權力)으로 자만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며 힘껏 손을 흔든다.
<홍의장군 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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