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 번째-2)

와야 정유순 2018. 11. 30. 20:56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 번째-2)

(2018112425, 밀양초동-양산물금)

瓦也 정유순

   영남루에서 우측으로 빠져나와 영남루1길을 막 건너면 언덕에는 밀양출신 대중가요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19141996, 본명 朴順東)의 옛집이 복원되어 있다. 박시춘은 기타연주자로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다가 어둠에 피는 꽃으로 작곡가로 데뷔하였으며, 그 후 신라의 달밤·애수의 소야곡·이별의 부산정거장·전선야곡등 총 3,000여곡을 작곡하여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 작곡한 아들의 혈서·목단강편지·혈서지원등이 친일파 인사로 거명되었다.

<박시춘 옛집>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으로 유명한 무봉사(舞鳳寺)를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강변으로 내려오면 밀양아리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있다. 밀양아리랑은 밀양지방의 명소인 영남루와 아랑의 설화를 주제로 한 통속 민요다. 이 노래의 발생설화는 조선 명종(明宗) 때 밀양 부사에게 아랑(阿娘)이라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젊은 통인(通人) 주기(朱旗)가 아랑의 유모를 매수한 뒤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하여 정조를 강요하자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 아랑은 밀양부사의 딸 윤동옥(尹東玉)을 가리키며 재색이 뛰어난 규수로 전해진다.

<아랑각>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남루 아래 시신이 떨어졌던 대밭에 열녀사(烈女祠)라는 사당을 짓고 해마다 음력 416일에 제사를 지내왔다. 밀양아리랑은 세마치장단에 맞춰 부르는 흥겨운 노래로 경상도 민요의 특징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경기민요에 가깝다고 한다.

(1)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2)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있네.

밀양의 아랑각은 아랑넋을 위로코 진주의 의암은 논개충절 빛내네.

(3)저 건너 대 숲은 의의한데 아랑의 설운 넋이 애달프다.

아랑의 굳은 절개 죽음으로 씻었고 고결한 높은 지조 천추에 빛난다.

(후렴)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밀양아리랑 노래비>


   영남루 주변에는 돌에 자연으로 새겨지는 꽃무늬가 무리를 이루어 산재해 있다. 이를 석화(石花)라고도 하며, 특히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비온 뒤에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국화꽃 모양의 아름다운 자태가 이채로운 현상이다. 석재의 재질이 연한 납석으로 자연적인 영향에 의해 쉽게 부식되고 마모되기 때문에 당국에서는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 같다.

<석화>


   짧은 시간에 영남루 주변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돌아보았지만 이곳은 밀양의 대표적인 요소들이 묻어 있는 느낌이다. 물론 변계량(卞季良)의 전설, 사명대사(四溟大師)로 더 알려진 임유정(任惟政)과 표충사, 박곤(朴坤)의 용에 관한 전설 등 많은 설화가 있으며, 얼음골 등 자연유산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들의 중심이 영남루인 것 같다.

<밀양강에서 본 영남루>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발길을 삼랑진 쪽으로 바삐 움직인다. 비옥한 밀양강변에는 비닐하우스가 풍요를 약속하는 것 같다.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는 낙동강 딴섬이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을 중심으로 낙동강 3경인 낙동강 딴섬 생태누리가 조성되어 있다. 3경은 삼랑진읍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세 갈래 물줄기가 굽이치는 삼랑진억새군락의 은빛 물결의 일렁임을 이야기한다. 삼랑(三浪)은 세 개의 물결인데 낙동강에 밀양강이 합치고, 낙동강의 밀물과 썰물을 두 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밀양강변 시설농업>

<낙동강과 밀양강이 합류하는 지점>


   합류하는 지점 위로는 경전선 낙동강철교가 강을 가로지른다. 경전선(慶全線)은 삼량진역과 광주송정역을 연결하는 총길이 277.7이다. 원래 단일 노선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라 마산선·진주선·광주선 등이 합해져서 지금의 경전선이 되었으며, 경상도와 전라도 두 도의 첫 글자를 따 이름 지었다. 1905년 삼량진마산 구간 개통을 시작으로 1968년 삼량진광주송정 구간이 완전히 개통되었다. 이후 복선화 사업이 추진되어 2010년 삼량진마산, 2012년 마산진주, 2016년 진주광양의 복선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전선 삼량진철교>


   조선시대 삼랑진의 행정지명은 하동면이었다. 단순 방위 표시에 불과한 하동(下東) 지명이 지리 특성이 잘 드러나는 삼랑진(三浪津)이라는 독립적인 명칭으로 고쳐진 때는 1905년 삼랑진역이 들어서고 삼랑진이 유명해지면서 1928년에야 공식 행정지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자연지명으로 삼랑(三浪), 인문지명으로 삼랑진(三浪津)이 존재하였으나 행정지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개칭된 것이다. 그리고 일제 때 수탈기지여서 그런지 왜식 적산가옥들이 지금도 눈에 띤다.

<삼랑진의 왜식 적산가옥>


   삼랑진 낙동강 변에는 민구령(閔九齡),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 등 우애가 남달랐던 민씨(閔氏) 오형제를 배향(配享)삼강서원(三江書院)이 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인 민구령(閔九齡)1510(중종5)경에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오우정(五友亭)이란 정자를 짓고, 4명의 아우들과 더불어 5형제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던 곳에 서원이 들어섰다. 1868(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9년에 14세손 민병태(閔丙兌)의 주선으로 사당을 다시 지어 삼강서원의 현판을 걸었다.

<삼강서원>


   한 때 인파로 북적거렸을 경전선 낙동강역(洛東江驛)은 폐역이 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문희숙시인의 시 <낙동강역에서>휘슬소리 끊으며/전라행 막차는 가고/긴 내 그리움도 그때/창백한 진주로 간다/(중략)/허물어진 먼 거리의/아름다운 사람들아/나는 또 눈뜨고 사공이 되어/도요새 발자국 찾아 모래강을 저어간다던 낙동강역이 190512월에 개업해서 201011월 폐역이 되어 잡초만 무성한 채 도요새 발자국도 없는 낙동강을 외면한다.

<낙동강역 시>

<낙동강역 옛터>

<낙동강(삼랑진)의 석양>


   아침에 눈을 뜨자 사방이 안개가 자욱하다. 버스로 삼랑진역까지 이동하여 다시 낙동강을 따라간다. 삼랑진읍에 위치한 삼랑진역은 경부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밀양역과 원동역 사이에 있다. 경전선의 시발역이며 19051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고 199912월 역사를 신축하였다. 무궁화호가 운행되고 여객, 화물,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코레일(Korail) 소속이며 역의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경부선에서 경전선으로 분기되며 경전선을 따라 한림정역으로 연결된다.

<삼랑진역>


   삼랑진역을 지나 낙동강변으로 들어가자 오토캠핑장이 안개 속에 자욱하다. 캠핑장에는 어젯밤에 캠프를 차린 자동차들도 아직 미명(未明)이다. 삼랑진 안태리에서 발원하여 안태호를 지나 검세리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안태천(安台川)도 운무(雲霧)에 싸여 고요하다. 안태천은 하천 중류의 안태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안태리는 옛날 밀양군내에서 풍수지리학상 가장 살기 좋은 마을로 안태로 꼽을 만큼 구천산과 천태산이 좌청룡 우백호로 감싸고 있어 안과태평(安過泰平)한 마을이라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오토캠핑장> 


   안태천이 유입되는 곳 부근에는 작원관 터가 나온다. 삼랑진읍 검세리에 있는 작원관지(鵲院關址)는 경남문화재자료(73, 19837)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영남(嶺南)지방의 동서와 남북을 잇는 요로(要路)의 역원(驛院)인 작원관의 옛터로 까치원터라고도 한다. 작원관은 고려시대부터 왜적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지로 고려 고종(高宗) 때 창건했다. 비각 안 중앙에는 작원관원문기지비가 있고 좌우로 작원진석교비작원대교비가 있다.

<작원관 비각>

<자원관 비석-네이버캡쳐>


   작원관은 공무출장 중인 관원들의 숙박기능을 하는 원()과 함께,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기능인 관(),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 구실 등 원((()의 역할을 겸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밀려드는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항전을 펼친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다른 곳에 이전·복원했으나 낙동강 대홍수로 유실되었고, 1939년에 밀양군에서 비()만 설치했으며, 1995년 이곳에 작원관지(鵲院關址)를 복원했다.

<안태천이 유입되는 작원관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