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 번째-1)

와야 정유순 2018. 11. 30. 15:36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열 번째-1)

(2018112425, 밀양초동-양산물금)

瓦也 정유순

   밀양아리랑이 굽이쳐 흐르는 밀양(密陽)은 경상남도 낙동강 동쪽 내륙에 자리 잡은 오랜 도시로서 지세로 보아 동북쪽에 심산준령이 위치해 있고 서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며, 밀양의 옛 이름은 미리벌이다. 낙동강 본·지류의 유역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한 밀양에는 일찍부터 하천과 구릉지대를 따라 군데군데 취락집단이 형성되어 있다가 읍락국가(邑落國家)를 형성하였다.

<낙동강(밀양)의 아침>


   구름 낀 하늘 사이로 햇살이 삐져나오는 밀양시 초동면(初同面)의 낙동강은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가을걷이가 끝난 하안평야(河岸平野)에도 다음 농사를 기다리며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늦가을 물들어 있는 초동천을 건너 도착한 곳은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에 있는 곡강정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곡강정(曲江亭)’ 표지석을 볼 때에는 혹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 ‘곡강(曲江)’과 관련이 있나 싶었는데 아닌 것 같다. 두보는 사람의 심리를 자연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시를 많이 썼다.

<밀양시 초동면 들녘>

<곡강정 표지석>


   이곳 곡강정(曲江亭)은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인 성산군 이식(星山君 李軾)의 유업이 깃든 정자이다. 이식은 무과에 급제하여 만도첨사 등을 역임하였으나, 반정이후 권신(權臣)들이 중종의 비() 신씨(愼氏)를 폐출하자 정쟁(政爭)을 피해 사패지(賜牌地)인 이곳으로 내려와 주변의 절경과 풍치를 벗 삼으며 삶을 누렸다. 이식의 아들 이덕창(李德昌)이 선고(先考)의 뜻을 기리고자 1545년에 정자를 창건하여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의 곡수(曲水)와 주변의 풍광을 음미하는 심경을 담았다.

<곡강정>

<곡강정 앞 낙동강>


   곡강정 앞의 천 삼백리길 낙동강 물은 호수 같다. 흐린 날씨지만 하늘이 비쳐지는 것은 명경지수(明鏡止水)로다. 누기(漏氣) 있는 땅과 마른 땅의 경계에 주로 사는 팽나무는 벌거벗은 나목(裸木)으로 덩실 춤을 추며 강물을 굽어본다. 곡강정에서 숨을 돌리고 나오면 밀양시 하남읍이다. 197371일 읍으로 승격된 하남읍은 북서부에 덕대산(德大山)과 종남산(終南山) 등이 줄기를 뻗고 있으며, 동쪽에 밀양강(密陽江)이 흐르고 남쪽에 낙동강이 동류하여 하남평야를 형성한다.

<곡강정 앞 팽나무>

<하남읍 전경>


   하남읍은 경지가 광대하여 쌀·보리 등 주곡 외에도 감자·양배추··미나리 등의 채소류와 딸기··사과·복숭아 등의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단감 집산지로 한국단감연구소가 있다. 떫은맛이 있는 단감은 당도가 높아 맛이 탁월하며, 영양가 또한 비타민A. C와 미네랄이 다량함유 되어 과일계의 종합영양제라고 한다. 25번 국도가 읍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수산대교를 건너 창원시 의창구와 연결한다.

<한국단감연구소>

<수산대교>


   하남읍 명례리로 접어들자 밀양영화고등학교가 보인다. 201731일에 개교한 밀양영화고등학교는 학년 당 2개 학급이라고 한다. 낙동강이 굽어보이는 명례리마을 언덕에는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순교한 신석복 마르코(18281866)의 출생지 옆에 1928년 봉헌된 천주교 성당(지방문화재자료 제526)이 보인다. 성당 옆의 신석복의 생가 터가 축사로 변해버린 것을 2006년에 발견한 후 12년이 지난 20185월에 준공하여 천주교명례성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밀양영화학교>

<명례성지 표지판>


   약한 빗발이 떨어지는 강변을 따라 밀양시 상남면 외남리 들판을 바라보며 오전을 마감하고 오후에는 점필제 김종직생가인 추원재로 향한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159, 19868) 지정된 추원재(追遠齋)는 일선김씨 문충공파 대종회에서 소유하고 관리한다. 이곳은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 전수의 시조인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 13891456)1389년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성리학의 거두인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태어나 자라고 죽은 집터이다. 추원재는 밀양시 부북면 재대리에 있다.

<추원재 전경>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 추원재에서 부친 김숙자의 막내로 태어났다. 1453(단종1) 23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9(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교리(校理감찰(監察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며 문신이다. 또한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意帝文)이 그가 죽은 후인 1498(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점필재 김종직 흉상>


   밀양에는 김종직의 일화가 있다. 김종직이 태어나자 마을 앞 시냇물의 맛이 사흘 동안 매우 달아 내 이름을 감천(甘川)이라 불렀으며, 어릴 때 짐승의 말소리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을 때 유언으로 자기 관의 길이를 보통 관보다 한 자 길게 만들라고 당부하여, 유언대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 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할 때 관만 끊기고 시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장을 할 때 보니 비록 시체지만 머리카락·손톱·발톱 등이 자라서 자신의 무죄를 무언으로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추원재 담벼락의 향나무>


   서둘러 밀양시 중앙로 밀양강변에 있는 영남루로 간다. 영남루(嶺南樓)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 세워졌다가 폐사된 영남사(嶺南寺) 자리에 1365(고려 공민왕 14)에 당시 밀양군수 김주(金湊)가 신축하고,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하였다. 1459(조선 세조5)에는 밀양부사 강숙경(姜淑卿)이 중창하였고, 1542(중종37) 밀양부사 박세후(朴世煦)가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영남루 올라가는 계단>


   그 뒤 1637(인조15)에 밀양부사 심흥(沈興)이 다시 중건하였고, 1834(순조34)에 불에 탄 것을 1844(헌종10)에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개창한 것이 지금의 건물이며, 현재 보물 제147호로 지정돼 있다. 밀양강을 발아래 둔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강변 남쪽에서 바라보는 영남루의 모습이나 영남루에서 강을 끼고 내려다보는 도심 경치가 매우 시원하다. 영남루에 올라 강을 내다보고 섰을 때 왼쪽에 있는 건물이 능파당(陵波堂)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침류각(枕流閣)이다.

<영남루>


   영남루를 관람하려면 신발을 벗고 능파당으로 올라가서 본루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제한인원도 한 번에 60명 이상 올라서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며, 침류각 쪽으로의 출입은 본루와 연결된 월랑(月廊)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계단의 파손이 심해서 통제되고 있다.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당국의 배려 같다. 본루에 올라 밀양강을 내려 보이는 밀양시내는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아주 시원하게 보인다. 그러나 넓은 마루를 서성이며 내부 구조를 요모조모 살피는 재미도 또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영남루에서 본 밀양시내>

<영남루배치평면도-네이버캡쳐>


   본루 정면에는 구한말의 명필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洲)가 쓴 嶺南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내부에도 여러 명필가들이 남긴 편액이 많은데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7세의 이현석(李玄石)’이 썼다는 嶺南樓‘10세의 이증석(李憎石)’이 썼다는 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가 눈에 띈다. 이밖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유명 문인들이 남긴 기문(記文)과 시 등이 많이 걸려있다. 영남루는 예로부터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꼽힌다. 

<영남제일루 편액>

<밀양강에서 본 영남루 원경>


   영남루 마당 건너편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천진궁이 있다. 경남유형문화재(117)이며 단군과 역대 8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天眞宮)은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의 영정, 동쪽 벽에는 부여·고구려·가야·고려의 시조, 서쪽 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 시조들의 위패가 있다. 이곳에서는 봄·가을로 어천대제(御天大祭, 315)와 개천대제(開天大祭, 103)를 지내며, 민족정기를 선양한다.

<천진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