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찾아서-2(상추자도)
(2018년 11월 9일)
瓦也 정유순
어제 하추자도에서 몰아치던 비바람은 정난주가 두 살배기 황경한을 떼어 놓고 떠나는 엄마의 피눈물이었을까? 늦은 저녁부터 비바람이 잦아들더니 아침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청명하다. 조반을 마치고 추자항 동편 부두 뒷산 등대산공원에 오른다. 공원에서는 염섬, 추포도, 횡간도가 바다 위에 떠돌다가 차례로 머문 것처럼 도열한다. 그 뒤 동북방향으로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보길도가 보인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지만 미세먼지가 먼 시야를 가려 보이지 않는다.
<등대산공원에서 본 섬들>
등대산공원 주변에는 돈나무가 숲을 이룬다. 돈나무는 돈(Money)과는 상관이 없고, 염분 저항성이 강해 해안지방의 방풍림으로 좋으며 목재는 어구 재료로 사용하고 잎은 가축의 먹이로 이용가능하다. 지엽(枝葉) 및 피(皮)를 칠리향(七里香)이라 하여 혈압을 낮추며 습진과 혈액순환의 약제로 쓰이기도 한다. 높이가 최대 2∼3m로 잎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없고 뒤로 말려 있으며,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데 둥글거나 넓은 타원형으로 익으면 두 갈래로 붉은 씨가 나타난다.
<돈나무 숲>
공원에서 내려와 추자도우체국 앞으로 하여 추자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최영장군사당으로 올라간다.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행전지원기관들이 상추자도 대서리에 집중되어 있는데, 유독 추자중학교만 하추자도 신양리에 떨어져 있는 게 이상했었다. 이는 상·하추자도 간의 갈등의 소산으로 육지와 너무 멀어 자연의 일부처럼 살아온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상추자도 대서리로 거주해 옴으로서 갈등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상추자도 지도>
<추자면사무소>
천혜의 항구조건을 갖춘 대서리에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함으로서 주민들도 어업과 동시에 상업에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배경 아래 상추자도의 대서리는 바로 옆 마을인 영흥리와 함께 추자항을 중심으로 어업과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반면에 하추자도의 묵리, 신양리, 예초리는 작은 밭에서 보리농사를 짓고, 미역 등 해초류와 전복 채취가 주요 수입원 이었다. 그리고 일제 관리들의 하추자도에 대한 수탈이 시작되고 주민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 하추자도 유지(有志)들은 잡혀가 옥고를 치른다.
<하추자도 지도>
그러다가 1925년 추자보통공립학교가 설립되면서 대립이 본격화 된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대서리에 학교가 들어서자 인구가 많은 하추자도의 반발이 거세지자 분교를 설치하고 본교에는 학년 당 1학급을, 분교에는 2학급으로 운영했으나 해마다 입학난이 가중되자 1941년에 신양공립학교가 설립된다. 그 후 두 섬의 갈등은 1955년 중학교 설립 지역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상추자도는 어항 개발을 목적으로 외항 방파제를 축조하는 사업을, 하추자도는 신양리에 중학교를 건립하기로 합의 하였다.
<추자초등학교>
제주도기념물 제11호(1981년8월)로 지정된 최영(崔瑩)장군사당은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영장군이 1374년(공민왕 23년) 제주도에서 원의 목호(牧胡), 석질리(石迭里) 등의 난을 평정하러 가다가 잠시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그물을 이용한 어로법을 가르쳐 주어 주민들이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워 매년 봄과 가을에 봉향하고 있다. 그 후 낡은 사당을 주민들이 1935년에 새로 지었으며, 1970년에 국고보조로 다시 복원한 후, 1974년 단청과 담장을 하였고 1998년에 외문을 달아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최영장군사당>
<최영대장신사>
사당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제 막 불사가 시작된 ‘봉두산쌍룡사’ 공사가 한창이고, 숲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바다가 툭 트인 언덕위에는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고 주민들의 무사안녕과 풍어와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제사를 지내는 제단과 상석이 준비되어 있다. 매년 음력 12월 하순부터 1월 초 사이에 마을에 따라 ‘해신제’, ‘당제’, ‘동제’ 등의 마을제를 공동의례로 지낸다고 한다.
<제단과 상석>
모세의 기적처럼 썰물 때 바다가 갈라지는 바위섬 ‘다무래미’를 뒤로하고 봉글레산(85.5m)을 오르면 발아래 추자항이 한눈에 펼쳐진다. 정상에는 정자와 정성들여 쌓아 올린 돌탑이 서있고 산불감시초소가 산의 안전을 감시한다. 정상에서 추자천주교회 쪽으로 내려와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섬 안으로 움푹 페인 만(灣)에는 고등어 가두리양식장이 설치되어 있다. 고등어(皐登魚)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습성이 있어서 가두리 자체가 원통형으로 만든다고 한다.
<상추자도 다무래미 지도>
<상추자도 다무래미-네이버캡쳐>
<봉글래산 정상>
<고등어가두리>
능소화 길을 만들어 꽃피는 오뉴월이면 터널을 이룰 것 같은 길을 따라 상추자도와 꼬리처럼 연결되어 있는 용둠벙으로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같은 바다라도 섬의 위치와 조류에 따라 섬 사이에 내를 이루는 모습이 이채롭다. 계단을 타고 정자에 올라서면 단애(斷崖)를 이룬 ‘나바론 하늘길’이 지척이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는 잠시도 바다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파도를 만들어 바다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들어갈 때 바닥이 나왔던 징검다리는 나올 때는 발목이 잠길 정도로 흘러가는 바닷물이 많아졌다.
<용둠벙>
용둠벙에서 나와 나바론 하늘길로 기어오른다. ‘나바론’이란 이름은 추자도에 낚시꾼들이 이곳의 절벽을 보고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 ‘나바론 요새’에 나오는 절벽처럼 험하다고 하여 나바론 절벽으로 부르다보니 지역주민들도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바론 하늘길은 용둠벙에서 독산과 큰산(142m)으로 기어올라 등대전망대까지 이어지는 바다 쪽 경사면 마루로 조성된 길이다. 이 길을 오르내리며 깎아내린 절벽을 내려 보노라면 오금이 절로 저려온다.
<나바론절벽 전경>
<나바론하늘길 계단>
<큰산>
자연이 만들고 바람이 주물럭거려 만든 조각품들은 힘들여 올라온 보람을 갖게 한다. 해군부대 철조망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등대전망대로 향한다. 아래에서 올려다 볼 때는 저 등대가 저기에 꼭 필요했나? 하고 의심도 했지만, 나바론 하늘길을 오르내리며 반대쪽 절벽을 바라볼 때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둠의 밤바다를 밝히며 배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등대의 역할이 중하게 다가온다. 과연 나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말머리바위>
<추자도등대>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온다. 좀 늦은 점심을 하고 추자도를 떠나 제주도로 나와야 하는데, 풍랑이 심해 배편이 결항이란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대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처럼 새로운 추억을 찾아 나선다. 추자항의 부두나 접안시설에서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낚시하시는 분에게 접근하여 몇 마디 말을 건네자 낚아 올린 고등어로 즉석 회를 떠준다. 육지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고등어회를 짜릿하게 맛본다.
<추자항 전경>
<고등어를 낚아서>
<고등어 포를 뜨고>
<초고추장으로 마무리>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섬을 일주하는 공영버스를 타고 버스투어에 나선다. 저녁에는 추자항의 어판장으로 나가보니 갓 잡아 올린 조기 분류에 아낙들의 손놀림이 무척 빠르다. 1972년에 추자대교가 준공되고 일주도로가 개설되면서 상·하추자도의 두 섬은 접근성이 좋아졌고 정보교환이 활발해져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서로 처한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오랜 시간 갈등했던 두 섬이 서로 왕래하며 소통하는 계기가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추자대교와 하추자도>
<추자도 참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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