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아홉 번째-1)
(2018년 10월 27일∼28일, 창녕유어면∼밀양초동면)
瓦也 정유순
가을비인지 겨울을 부르는 비인지 모르는 비가 추위를 몰고 온다는 소식에 조금 긴장이 된 채 어제저녁에 서울을 출발했으나, 지난 번 종점인 적포교하류의 낙동강 아침은 조금 쌀쌀한 날씨에 찬란하게만 보인다.
<낙동강(창녕)의 아침>
콩알만 한 달팽이들도 햇볕을 쬐러 나와 콘크리트바닥을 기어가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다. 인간이 편하자고 만든 길이지만 달팽이에게는 생사가 넘나드는 갈림길이다.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의 발걸음 또한 혹시 발에 밟힐까봐 여간 조심스럽다. 옛날 요령이 달린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고승의 마음으로 ‘길이 멀고 고달파도 가야할 곳이 있거든 걸음 멈추지 말고 끝까지 가길’ 달팽이에게 바랄 뿐이다.
<달팽이의 대장정>
억새와 갈대는 꽃을 피워 가을물 들이고, 춘삼월 보릿고개가 시작되면 돋아나던 삘기는 가을하늘에 하늘거린다. 삘기는 ‘띠 풀의 새순’으로 지역에 따라 ‘삐비’라고 부르기도 했던 추억의 식물이다. 삘기를 뽑아서 씹으면 껌처럼 질겅질겅하게 씹히며 달착지근한 물이 나온다. 그래서 옛날에 껌 대용으로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배가고프면 이를 씹어 허기를 달랬다.
<낙동강 변의 삘기>
지금 발을 디딘 곳은 유명한 우포늪이 있는 창녕군 유어면이다. 유어면(遊漁面)은 옛 가락국의 일부로써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유장면과 어촌면을 통합하여 유어면이 되었다. 그리고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어 상습 수몰지역 이었으나 1978년 전천후 종합개발로 이를 해결하고 지금은 옥토로 바뀌었다. 이처럼 옛날에 물에 잠기는 곳이었으나 유어면에는 여덟 가지 즐거움을 주는‘팔락정(八樂亭)’이라는 정자가 있으나 들 건너 팔락정까지 가지는 못했다.
<낙동강 하천부지>
팔락(八樂)은 첫째가 맹호도강(猛虎渡江, 정자 앞의 낙동강 건너 지형이 범이 건너오는 듯 한 형세를 보는 즐거움)이요, 둘째로 원포귀범(遠浦歸帆, 강 멀리서 범선이 포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며, 셋째로 평사낙안(平沙落雁, 넓은 강모래사장에 기러기가 앉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고, 넷째로 북지홍련(北池紅蓮, 정자 북쪽의 팔락 호수에 피어 있는 홍련을 보는 즐거움)이다.
<낙동강 백사장>
다섯째로 역수십리(逆水十里, 정자 앞개울의 물이 강의흐름과 반대로 십리를 흐르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며, 여섯째로 전정괴수(前庭槐樹 앞뜰의 회화나무를 보는 즐거움)이며, 일곱째로 후원오죽(後園烏竹, 정자의 후원에 있는 오죽을 보는 즐거움)이고, 여덟째로 서교황맥(西郊黃麥, 정자 앞 서쪽들에 보리가 누렇게 익은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다.
<낙동강 변의 들녘>
팔락(八樂)을 즐길까 하여 소소한 가을바람에 콧노래를 부르며 가던 길이 풀밭에 잠기었는지 보이지 않아 강가로 내려간다. 강 가장자리에는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아마 4대강 공사로 생긴 보(洑)의 수문을 열어 물이 빠진 자리에 침전물이 퇴적되었다가 나타난 것 같은데, 가뭄에 물 빠진 저수지 바닥의 거북등 같다. ‘물은 흘러야 되고, 정체되면 변하는 것’처럼 물을 가둬 놓아 생긴 흔적이다. 물의 흐름이 느려서인지 색깔도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낙동강 갯벌>
강물을 따라 걷다가 그마져 길이 막혀 풀 섶을 헤치고 나가면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수변식물로 바닥이 덮여 보이지 않는 불규칙한 길을 걷다가 덩굴식물이 올가미가 되어 발목을 휘감기도 하고, 제 멋대로 숨어있는 돌들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몇 번의 오르막 미끄럼에서 뒤로 밀리기도 하면서 겨우 길을 찾아 위로 올라온 곳은 유어면 진창리에 있는 광산양수장이다.
<광산양수장>
구멍 뚫린 철조망을 개구멍 통과하듯 빠져나와 언덕을 넘어 감이 익어가는 큰소재미마을을 지나 효암재 앞을 지난다. 효암재(孝巖齋)는 창녕성씨 시랑공파(侍郞公派) 파조(派祖)인 성준(成俊, 1436∼1504)의 제사건물이다. 성준은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내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사사(賜死)에 관여한 죄로 직산(稷山)에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잡혀와 교살 당했다. 그리고 중종(中宗) 때 복관(復官)되었다.
<효암재>
<큰소재미마을 감나무>
남창천이 흐르는 79호국도 광산교에서 고운봉(240.7m) 자락을 돌아 박진교 입구로 이동한다. 박진교는 의령군 부림면과 창녕군 남지읍을 연결하는 다리로 옛날에는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박진교에서 상류로 1㎞쯤 올라가면 고운봉 자락에 박진전쟁기념관이 있다. 박진전쟁기념관은 6·25전쟁을 주제로 2004년 6월 25일 개관한 전쟁기념전시관으로 고운봉 옆 산인 고랑산(209.9m)과 박진나루에서 발굴한 유물과 낙동강 최후 방어선 사수 등을 주제로 한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진전쟁기념관 표지>
점심식사 후 오전 걷기가 끝난 칠현리 칠곡천 합류지점에서 오후일정을 시작하여 개비리길로 들어선다. 개비리길은 용산마을에서 영아지마을 창아지나루터까지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낙동강변의 벼랑길로 자연이 만들어 준 길이었다. 그러고 지금은 잘 정비된 길이지만 낙동강의 눈부신 풍광을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영아지마을 앞 개비리길 입구>
개비리길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이곳 사투리)였다. 10개의 젖꼭지를 가진 어미젖을 차지하지 못한 조리쟁이는 다른 열 마리가 남지시장에 팔려 나갈 때 집에 남겨 놓았는데 등[山]넘어 시집 간 딸이 친정에 왔다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고 시집으로 데려갔다.
<낙동강과 마분산벼랑>
그러던 어느 날 며칠 후 딸은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후에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폭설이 내려도 조리쟁이에게 젖을 물리고 갔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이 누렁이가 다니는 길을 확인한 결과, 누렁이는 눈이 쌓이지 못하는 낙동강 절벽 길을 따라 다니는 것을 보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길로 부르게 되었고, 사람들도 이 길을 이용하여 산을 넘는 수고를 덜었다. 한편으로는 ‘개’는 강가를, ‘비리’는 벼랑이라는 말로 ‘강가 절벽을 따라 난 길’을 의미한다.
<개비리길>
영아지마을 입구를 지나 개비리 쉼터에서 숨을 고르고 벼랑을 따라 잘 정비된 길로 접어들어 약1㎞쯤 들어가면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온다. 이 대나무 숲은 여양진씨(驪陽陣氏) 묘사(墓祀)를 지내던 회락재(回洛齋)라는 재실이 있던 곳이다. 회락(回洛)은 ‘낙동강물이 모였다가 돌아서 흘러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원래 이곳에 재실과 관리인이 살림하는 집이 있었고, 위토답(位土畓)이 있던 자리였는데, 건물들이 빈집이 되어 허물어지고 대나무 밭이 되었다.
<대나무 숲>
<회락재 터>
건축연도를 정확하게 모르는 회락재는 목조 단층 와가(瓦家)였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新作路)가 생기면서 개비리길은 인적이 끊어지고 방치되어 오다가 2015년도 4대강사업으로 ‘낙동강남지개비리길’이 알려지면서 재실은 귀곡산장(鬼哭山莊)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바람 불고 흐린 날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는 대장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지개비리길 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 회락재 복구가 어려워지자 건물을 철거하고 대나무 숲을 자연친화적으로 정비하여 죽림쉼터로 새롭게 태어났다.
<죽림쉼터 편액>
<죽림쉼터>
대나무 밭 안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팽나무 두 그루가 부둥켜안은 연리목(連理木)은 ‘간절하게 기도하면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고, 자손을 기원하며 자손도 얻으며, 가난한 자가 재물을 기원하면 부자가 되고, 환중(患中)의 부모님 무병장수를 빌면 소원을 이루어 효자가 된다는 영험(靈驗) 있는 나무로 알려져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엣 전설을 안은 채 세월의 풍상과 함께 회락재 터 앞에 서있다.
<팽나무 연리목>
이 밖에도 대 밭에 들어와서는 ‘모든 사심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금천교(禁川橋)를 지나서 동천교(洞天橋)를 건너 회락동천(回洛洞天)으로 들어가라는 다리’가 있다. 동천(洞天)은 ‘신선과 선녀가 사는 신성한 곳’을 가리킨다. 또한 여양진씨 가문에서 시집보낸 감나무가 감을 주렁주렁 매단 채 서있고, 관직(官職)에 등관(登官)시킨다는 ‘층층나무’가 감나무 앞에 있으며, 옆에는 2018년에 남지읍 동포마을에서 수로공사 중 발견한 봉황(鳳凰)의 알처럼 크기가 오척(五尺)이 넘는 ‘옥관자(玉貫子)바위'가 자리한다.
<금천교>
<동천교>
<옥관자바위>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도를 찾아서-1(하추자도) (0) | 2018.11.16 |
---|---|
낙동강 천 삼백리길을 따라(아홉 번째-2) (0) | 2018.11.01 |
해남녹우당과 다산초당 그리고 영랑생가 (0) | 2018.10.23 |
고산 윤선도와 보길도 (0) | 2018.10.21 |
고흥 거금도와 미르마루길(2) (0) | 2018.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