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제주도를 찾아서-1(하추자도)

와야 정유순 2018. 11. 16. 23:37

제주도를 찾아서-1(하추자도)

(2018118)

瓦也 정유순

   제주도에 갈 때면 아주 먼 외국에 나갈 때 보다 더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면 갈수록 더 신비롭고 새로워지는 제주도를 세차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아랑곳 하지 않고 새벽 비행기에 의탁한다. 평일 새벽이라 비행기 좌석이 여유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만석이다. 혹시 첫 날 가고자하는 추자도의 항해가 일기불순으로 이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며 제주항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승선절차를 밟고 파도에 출렁이는 배에 오른다.

<제주-추자도 쾌속정> 

 

   제주항에서 추자도항까지는 북으로 약45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약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배는 방파제 밖으로 벗어나자 파도와 숨바꼭질을 하기 시작한다. 강풍으로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맨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으나 너울너울 춤을 추는 파도만 보일 뿐이다. 배가 파도 위에 잠깐 머무르다 파도 밑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롤러코스트를 타는 기분이다.

<수평선>


   추자항과 가까운 민박집에서 행장(行裝)을 꾸리고 하추자도로 길을 나선다. 추자도(楸子島)는 한반도 남서부와 제주특별자치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상추자도·하추자도 나뉘어 있다. 전라남도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제주도로 편입되었다. 추자도 부근에는 횡간도(橫干島추포도(秋浦島) 4개의 유인도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38개의 무인도가 있다. 상추자도는 면적 1.5이며 하추자도는 3.5이다. 또한 추자도는 한반도 남쪽 말단부가 침수되어 형성된 섬이다.

<추자도 지도>

<비오는 날의 추자도항>


   그리고 추자도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1271년 삼별초의 난 때 여몽(麗蒙)연합군이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잠시 머물면서 처음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추자항에서 추자대교를 건너 입구에 있는 금빛 참굴비상이 있는 2까지는 민박집에서 주선한 트럭과 승합차 등을 이용하여 이동한다. 추자도에서는 참조기가 많이 잡혀 축제가 열린다고 하며, 이곳에서 잡힌 조기들이 전남 영광으로 가서 해풍에 말리면 영광굴비가 된다고 설명해준다.

 <침굴비 상>


   매섭게 휘몰아치는 비바람도 제주올레길 18-1코스를 따라 숲속으로 기어 올라가자 비바람의 힘이 좀 잦아든다. 길섶에는 가을의 꽃 구절초(九節草)가 빗물을 머금고 반짝인다. 묵리로 가는 산마루 정상의 상수도를 공급하는 수돗물정수장을 지나 묵리교차로에서 묵리마을로 내려온다. 추자면 묵리(默里)마을은 예로부터 주민들은 묵이 또는 무기라 불렀다 하며, 산으로 둘러싸여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묵이라 했다 하나 확실치는 않다. 마을형성은 약 100여 년 전 정씨와 조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올레길 18-1 올라가는길>

<구절초>

<추자도 상수도정수장>

<묵리마을>


   묵리에서 해안을 따라 등 넘어오면 신양2리가 나오고 오솔길을 지나면 추자중학교와 신양항이 있는 신양리이다. 신양리(新陽里)는 하추자도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 자연마을로 신양, 동동네, 석두마을 등이 있다. 신양마을은 양달쪽에 위치한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동동네마을은 신양 동쪽에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지게 되었다. 석두마을은 석두머리와 대왕산 사이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묵리에서 신양리로 가는 오솔길>

<신양리경로당>


  모진이 몽돌해변을 지나 언덕을 기어오르면 김수환추기경도 어렵사리 찾아왔다는 황경한의 묘가 있는 예초리이다. 황경한(黃景漢)황사영백서로처형된 황사영(黃嗣永)의 아들이며, 어머니인 정난주가 관비(官婢)가 되어 제주에 가던 중 두 살짜리 황경한을 평생 죄인으로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자도 바위에 두고 떠난다. 어린 황경한은 어부 오씨에게 발견되어 추자도에서 평생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이런 연유로 황경한은 이곳 황씨의 입향조가 되었으며, 추자도에서는 황씨와 오씨가 혼인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겨났다.

<황경한의 묘>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는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다.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것이 안 되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강제하거나, 서양의 배를 수백 척과 군대 5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이다. 비단에 13311자를 적은 이 백서는 현재 로마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눈물의 십자가 가는길 >


   황경한의 묘에서 활처럼 휘어진 해안 길을 따라 올라가 당도한 신대산전망대에서 그 앞의 해안 절벽까지는 눈물의 십자가 가는 길이다. 이 길은 황사영이 순교하고, 그의 아내 정난주(정약현의 딸)가 관비로 제주도에 가다가 두 살배기 갓난아이를 바위에 남겨두고 떠나며 흘린 피눈물의 길이다. 눈물의 십자가는 정난주의 눈물이 십자가에 맺혀 하늘로 오르는 모습과 두 살 난 아기 황경한을 형상한 것으로 묵주를 손에 쥐고 누워서 두 팔을 하늘로 치켜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데 지난 번 태풍으로 손실되었다고 한다.

<예초리 해안>


  신대산전망대에서 비바람과 잠시 맞서다가 예로부터 예의범절을 잘 지키는 마을이라 하여 예초(禮草)’라는 명칭이 유래된 예초리 포구를 지나면 엄바위장승이 나온다. 옛날에 엄바위의 억발장사가 바닷가의 장사공돌이라는 다섯 개의 바위로 공기놀이를 즐겼는데, 그러던 어느 날 횡간도로 건너뛰다가 미끄러져 죽었다. 그래서 예초리와 횡간도 사람들은 서로 혼인을 하면 청춘과부가 되어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억발장사를 상징하는 목장승을 깎아 세웠으며, 해마다 걸궁(乞窮)을 하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엄바위>


   엄바위 옆으로 다시 계단을 밟고 돈대산으로 향한다. 목재데크로 단장하기도 했으며, 야자메트를 깔아 걷기에 편하게도 했고, 폐타이어를 잘게 쪼개 엮어 길에 깔아 궂은 날 미끄럼을 막아준다. 예초리에서 신양리로 넘어가는 도로를 건너 돈대산(燉臺山, 164)에 오른다. 돈대산은 추자군도에 있는 산 중 가장 높은 산으로 상추자도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비바람이 없는 맑은 날이면 저 멀리 북으로는 남해안의 여러 섬들이 보였을 것이고, 남으로는 한라산이 손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이 온다.

<돈대산 전경>

<돈대산팔각정>

<돈대산 정상>


   아담하게 자리 잡은 돈대산 팔각정에서 거센 비바람에 긴 숨 한번 내쉬고 묵리교차로에서 우측으로 내려와 출발지였던 추자대교 남단에 도착한다. 궂은 날 우장(雨裝)을 하고 산행을 하면 옷이 비에 젖는 것은 막을 수 있지만 몸에서 솟아나는 땀으로 젖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초입부터 만발한 구절초 쑥부쟁이 감국 털머위 등 가을꽃들이 바람난 계집 고쟁이 벌리듯 만개하여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감국>

<털머위>

<청미래덩쿨(망게)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