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녹우당과 다산초당 그리고 영랑생가
(2018년10월19일)
瓦也 정유순
노화도 동천항에서 완도 화흥포항으로 이동하여 다시 육로로 신지도 숙소에 도착하여 등이 바닥에 닿자마자 꿈속으로 빠져든다. 아침에는 신지도 명사십리에서 가볍게 산책하며 기운을 만끽한 다음 해남으로 나와 조반을 한다. 해남에 있는 ‘해남윤씨(海南尹氏)’ 종택인 녹우당(綠雨堂)에 가기 위해서다. 녹우당의 녹우(綠雨)는 녹음이 짙어가는 ‘신록(新綠)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신지도 명사십리의 아침>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녹우당은 해남윤씨의 고택이다. 고산 윤선도의 4대조부인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 1476∼1543)이 연동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추원당 등을 품은 해남윤씨 종택 전체를 아우른다. 특히 사랑채는 효종(孝宗)이 스승인 고산에게 하사했던 수원 집을 1668년(현종9)에 해상을 통하여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전한다.
<연동마을 땅끝순례문학관>
<연동마을 앞 소나무>
녹우당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덕음산(德陰山, 381m)을 진산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口’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택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녹우당 입구에는 터를 지켜온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여름 내내 씨앗을 키우며 휘 몰아치던 비바람에 모질게 맞서왔던 흔적을 다 털어내고 고고히 서있다.
<덕음산과 연동마을>
<녹우당 앞 은행나무>
해남윤씨 14대 종손부부가 현재 생활하고 있는 녹우당은 개인이 거소하는 공간으로 원래 출입이 제한되어 있어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벼락 안으로 살짝 들어간 솟을대문은 집 주인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은둔의 뜻’이 숨어 있지 않나 싶다. 마을 위로는 고산사당과 입향조(入鄕祖) 어초은 윤호정사당을 지나면 어초은 부부의 큰 묘소가 후손을 지킨다.
<녹우당 대문>
우측으로 덕음산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천연기념물(제241호)로 지정된 비자림(榧子林) 숲이 나온다. 이 숲은 윤호정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그의 뜻에 따라 바위를 가리기 위해 후손들이 비자나무를 심어서 이루어진 숲이다. 주목과의 비자나무는 암·수가 다르며 목재는 최고의 바둑판으로, 열매는 구충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비자림>
<비자나무 잎과 열매-네이버캡쳐>
녹우당 입구에 있는 고산유물전시관(2010년 개관)은 고산과 해남윤씨 종손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당대 명문 사대부였던 해남윤씨 고산의 육필은 물론 그의 증손 윤두서(尹斗緖)의 공재(恭齋)자화상(국보 제240호) 등 대대로 전해오는 가보들이 눈길을 끈다. 한 집안에 수천 점의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선조들을 섬기는 후손들의 정성이 엿보인다. 공재자화상의 판화를 스탬프하며 강진의 다산초당으로 이동한다.
<고산유물전시관(지하)>
<전시된 유물들>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가는 길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마을 뒷길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나오는데, 사람의 발길에 패이고 빗물에 씻겨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뿌리가 하늘을 향해 누운 길이 나온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지상에서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지하에 있는 뿌리가/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이하생략)”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노래한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와서 사의재(四宜齋) 등을 전전하다가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 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1808년부터 1818년까지 제자를 가르치고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고 한다. 사의(四宜)는 곧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그리고 신중한 행동’을 하라는 뜻이란다.
<다산초당>
<초당 안의 다산초상>
그리고 초당을 비롯한 동암과 서암 그리고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강진 앞 바다를 바라보던 천일각이 있고, 초당 뒤의 바위에는 손수 쓰고 새긴 ‘丁石(정석)’ 글씨가 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 ‘약천’, 앞마당 바위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는 ‘다조’, 소박한 연못에 잉어를 길렀다는 ‘연지석가산’ 등 초당4경이 자리하고 있는데,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폐가를 복원하면서 초가집(초당)이 기와집(와당)으로 되었다.
<정석바위>
<다조>
<천일각>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그리고 ‘丁石(정석)’은 다산의 글에서 “죽각 서쪽 바위는 병풍이 되고/부용성 만물은 정씨와 함께 있네/조용한 숲속에 학 그림자요/기러기 앉은 곳 먼지만 자욱한데/미불은 바위에 절하고/도연명은 술 취해 귀거래사를 지었다(이하생략)”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자기의 성(姓)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다산초당 현판>
혜장스님과 학문과 다도를 교류하며 오가던 백련사 오솔길은 한낮에도 햇빛이 들어오기 힘든 길 같다. 신우대가 숲을 이루고 길옆에는 녹차나무가 자생하며 노란 꽃술에 하얀 꽃잎을 활짝 피웠고, 하늘을 가리는 높이의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풍경은 숨 막힐 듯 아름답다.
<다산초당-백련사 길 >
<녹차나무 꽃>
또한 이 길은 다산과 혜장(惠藏) 그리고 초의(草衣)선사가 시와 다도(茶道)로 교류하며 사색하던 숲이며, 철학의 길이고 구도의 길이다. 초의선사는 혜장의 제자로 24살의 나이에 24살이나 연상인 다산을 이곳에서 만나 학문을 배우는 제자가 되었고 다도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길 옆에는 다산과 혜장이 생전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연리목이 되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다산초당-백련사 길의 연리목>
그리고 다산은 백련사에서 혜장과 하룻밤을 보내며 유교대가와 불교대가가 만나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백련사(白蓮寺)는 신라말기인 839년에 무염스님이 만덕산 아래에 창건하였다. 그리고 조선 때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8년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자생 차(茶)나무가 많은 만덕산의 별명이 다산(茶山)인데 정약용의 호가 되었다.
<만덕산백련사 일주문>
<백련사 대웅보전>
강진읍에 있는 영랑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의 생가는 영랑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서정시로 조국의 독립을 걱정했던 지사이자 시인으로, 이곳에서 1948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45년 간 살았다. 소유권이 다른 사람으로 이전 되었던 것을 강진군청에서는 재매입하여 1985년에 복원해 놓았으며, 이 생가를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하여 관리한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모란으로 꾸며 놓은 화원이 있고, 5칸 겹집의 안채와 좌측의 사랑채가 있다. 장독대 옆에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비가 정겹게 서있다.
<영랑생가 행랑채>
<영랑생가 안채>
<영랑생가 사랑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은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4살의 나이로 혼인하였으나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한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현 휘문고)에 입학하여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를 만나 문학적 안목을 키운다.
<영랑 김윤식 상>
<영랑시비-모란이 피기까지는>
1919년 3·1운동 때는 고향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0년에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시인 박용철(朴龍喆)을 만난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하였다.
<영랑시비-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 잎에 빛나는 마음’ 등 6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해방 후에는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여 현실에 참여 한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스포츠를 즐기며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정부는 2008년 영랑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
<시문학파 3인상-영랑 김윤식(좌) 정지용(중앙) 박용철(우)>
후원으로 올라가면 ‘사계절 모란향기 머금은 세계모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공원에는 키가 2m가 넘고 수령이 350년쯤 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란이 공원의 중앙에 자리한다. 이 모란은 대구광역시의 경주김씨 고택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또한 한국의 모든 모란을 대표하는 의미로 ‘모란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모란은 미나리아제비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목단(牧丹)이라고도 하며, 설총의 화왕계(花王戒)에서는 ‘모든 꽃들을 대표하는 왕[화왕(花王)]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모란왕 조형물>
<수령 350년의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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