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산 윤선도와 보길도

와야 정유순 2018. 10. 21. 22:57

고산 윤선도와 보길도

(20181018)

瓦也 정유순

  1636(인조14) 12월 병자호란 발발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던 중 이미 함락되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50일 분의 식량과 13천여 명의 군사로 버티다가 45일 만인 1637(인조15) 정초에 남한산성을 나와 곤룡포 대신 평복을 입고 세자와 대소신료들을 거느리고 삼전도 부근 청 태종(淸 太宗)의 수항단(受降壇) 아래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실시한다.

<삼전도비>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하였으나 청군에 항복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다. 그러나 고산은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피안의 삶을 살고자 1637년 제주도로 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기착한 곳이 보길도다. 고산은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是非)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16년이 넘는 유배를 당했다.

<땅끝마을>


   윤선도는 본관은 해남(海南)으로 서울의 동숭동에서 태어나 지금의 명동성당이 있는 명례방(明禮坊) 북달재의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으로 시조 작가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이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선상에서 본 해남 땅끝>


   보길도(甫吉島)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섬으로 완도 보다는 해남 땅끝마을이 더 가깝다. 보길(甫吉)이란 이름은 영암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묏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모시고 두루 살핀 뒤 십용십일구, 보길(十用十一口, 甫吉)’이라는 글을 남기고 갔는데 이는 이 섬에 명당자리 11곳이 있는데, 10곳은 사용되고 나머지 1곳도 이미 정해졌다는 뜻이고 이와 관련하여 보길도로 칭하였다고 전해온다.

<보길도 지도>


   보길도와 윤선도의 인연은 하늘이 나를 기다린 곳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윤위의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 고산은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하자 백이(伯夷)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기자(箕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관녕(管寧)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것이 오직 나의 뜻이라며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럽다고 하였다. 풍랑으로 보길도에 기착한 고산은 격자봉에 올라 참으로 물외가경(物外佳境)이라 감탄하고 이곳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윤위(17251756)는 고산의 5대손이다.

<보길도 윤선도원림 관리사무소>


   땅끝마을 부두에서 출발한 배는 노화도 삼양항에 도착하여 육로로 보길대교를 건너 보길도윤선도원림에 도착하여 입장절차를 밟고 세연정에 들어간다. 고산이 풍랑으로 우연히 기착을 하였지만 천문과 지리에 해박했던 윤선도가 시를 읊고 자연을 노래한 세연정(洗然亭)은 담양의 소쇄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정원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오우가(五友歌)’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탄생한 곳으로 유명하다. 1637년 세연지(洗然池)가에 단을 쌓고 지은 3칸짜리 정자이다.

<세연정>


   세연정의 세연(洗然)’이란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곳이란 뜻으로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 동쪽에는 빛을 부른다는 호광루(呼光樓), 서쪽에는 언제나 똑 같다는 뜻의 동하각(同何閣), 남쪽에는 난간에 기대면 굶주림도 즐겁다는 뜻의 낙기란(樂飢欄)이란 편액을 따로 걸었으며, 서쪽에는 일곱 개의 바위가 있다는 뜻의 칠암헌(七岩軒)이란 편액을 따로 걸었다.

<세연정의 노송>


   세연정을 가기 위해서는 세연정 옆의 노송을 바라보며 가오리바위를 지나 세연지를 반 바퀴쯤 돌아 판석보(板石洑)를 밟고 건너야 한다. 판석보는 우리나라 조원(造園) 중 유일하게 만든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른다. 세연지의 저수(貯水)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强灰)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세연정 가오리바위>

<세연정 판석보>


   세연정의 서쪽으로 겨우 한 칸쯤의 넓이에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의 바위가 있어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오른다는 비홍교(飛虹橋)는 흔적을 찾기 어렵고, ‘혹약암(惑躍岩)’이 뭍으로 뛰어 오를 자세를 취한다. 이 바위는 이곳 칠암(七岩) 중의 하나로 역경(易經)의 건()에 나오는 혹약재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 뛸 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황소를 닮은 바위이다.

<세연정 혹약암>


  세연정을 나와 보길도 중앙에 위치한 부용리(芙蓉里)로 이동한다. 부용리에 도착하여 주변의 산세를 둘러보니 격자봉(格紫峰, 433)을 중심으로 연꽃봉우리처럼 감싸고 있는 형세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한 눈에 이곳이 심상치 않은 길지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곳은 고산이 1637년에 들어와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낙서재(樂書齋)가 있는 곳이다.

<보길도 부용리 지도>


   <윤위(17251756)보길도지(甫吉島識)’>에 의하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여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이곳은 보길도 안의 최고의 양택지(陽宅地)로 강학(講學)하고 독서하면서 은둔하고자 하는 고산의 생활공간이었다. 처음에는 모옥(茅屋)으로 지었으나 후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으며, 와가(瓦家)는 후손들이 만들었다.

<낙서재>


   낙서재 마당 아래에는 귀암(龜岩)이라는 넓적한 바위가 하나있다. 귀암은 <고산유고(孤山遺稿)> 귀암 시편에 나오는 4(四靈) 중의 하나요, 고산이 달맞이 하던 장소로 기록된 바위다. 화강암을 쪼아 거북형상으로 만든 370×270규모의 바위로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중요한 지표였다고 한다. 2011년 이 바위의 발견으로 보길도지(甫吉島識)’에 기록된 소은병(小銀甁), 낙서재, 귀암의 축선을 확인하여 낙서재 원형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낙서재 귀암>


​   낙서재 건너편에는 고산의 아들 윤학관(尹學官)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곡수당(曲水堂)이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다가오나 멀리서 눈도장만 찍고 돌아선다. 또한 고산의 이상세계인 부용동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낙서재 앞산 중턱의 동천석실(洞天石室)은 보길도 최고의 경관을 보여주는 하늘정원이다. 윤선도 스스로가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칭하며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다는 그곳도 낙서재에서 먼발치로 바라만 본다.

<곡수당>

<동천석실이 있는 앞산>


  ‘보길도지에 의하면 보길도 산에는 황칠나무가 많이 자생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칠(黃漆)나무는 우리나라 독립 종으로 남해안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나무다. 백제 때부터 천연 도료로 사용되어온 황칠나무의 자생 군락지 가운데 국내 최대 수목 으뜸주가 완도 황칠목이다. 신라 때부터 중국에 보내는 조공품 중의 으뜸으로 분류되어, 황칠나무가 자라는 지역 백성들의 고통도 심했다고 하며조선시대에는 황칠나무를 자라면 베어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절에 있는 불상은 거의 황칠로 금빛을 낸다고 한다.

<어린묘목의 황칠나무>


   적갈색의 칠액(漆液)이 나오는 황칠나무는 황금색을 내는 우리의 전통 도료로서 다른 천연 도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품질이 우수하다. 목재나 금속, 유리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건조나 부착성이 아주 좋고, 진정·안정에 효과가 있어 칠을 하고 나서는 상쾌한 안식향이 발산되기도 한다. 황금빛 찬란한 천연 도료로 고품격의 화장도료로 적격이고, 물에는 희석되지 않아서 옛날 사람들은 물에 넣어 황칠을 보관했었다고 한다. 어린나무 잎은 삼지창처럼 생겼으나 완전히 자라면 잎은 타원형 잎으로 변한다고 한다.

<황칠나무>


  보길도에 있는 세연정을 비롯한 부용동까지의 숲과 건물들은 이를 통칭하여 보길도 윤선도원림이라 한다. 4백 년 전 고산과 보길도의 인연이 오늘에 이르러 나의 발걸음이 지금 이곳에 머문다.

<전복양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