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거금도와 미르마루길(1)
(2018년10월13일∼14일)
瓦也 정유순
1. 거금도와 소록도
옛날에 고흥에 가려면 자동차로 가든 기차로 가든 보성군 벌교라는 땅을 꼭 거쳐야 했다. 그리고 새벽 이른 시간에 서울을 출발하면 하루가 꼬박 걸려야 하는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4시간 남짓이면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나들목에 도착한다. 나들목을 빠져나와 ‘고흥만남의 광장’에서 잠시 숨을 돌리면 남서쪽으로 조금 비껴선 자리에서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한 첨산(尖山, 314m)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첨산>
백두대간 호남정맥이 벌교부근을 지나다가 한 지맥이 바다에 가라앉아 생긴 고흥반도는 동강면을 지나 남양면에 이르면 동서의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이 3km이내로 좁고 낮은 지협(地峽)에 의해 육지와 연결되어 가까스로 섬을 면한다. 군 전역이 거의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고, 영남면에 고흥반도 최고봉인 팔영산(八影山, 608m)이 위치한다. 고흥읍을 거쳐 반도의 남서쪽 맨 끝에 위치한 도양읍 봉암리 녹동(鹿洞)에 도착하여 오전을 마무리한다.
<고흥지도>
녹동에서 소록도대교와 거금대교를 거쳐 거금도둘레길을 걷기 위해 고흥군 금산면 신전리 우두마을에 도착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 건너 금당도가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병풍처럼 펼쳐져 바다를 호수처럼 잔잔하게 만든다. 우두마을은 마을의 지형이 소의 머리를 닮아 ‘쇠머리’로 불리다가 한자를 훈차(訓借)하여 우두(牛頭)라 불러 지금까지 이른다. 거금도에서는 김양식장이 주를 이루지만 우두마을에는 대단위 전복 양식장도 있다고 한다.
<금당도>
거금도(居金島)는 면적 62.08㎢에 해안선 길이 54㎞이다.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소록도 바로 아래 위치한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양목장에 속한 마목장의 하나로 절리도(節吏島)라 하였다. 그후 강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897년 돌산군(突山郡)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흥군 금산면이 되었다. 거금도의 최고봉은 적대봉(積台峰, 593m)이며 산지가 많지만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거금도지도>
우두마을회관 앞에서 해안을 따라 조금 가다가 ‘솔 갯내음 길’로 들어선다. 솔 갯내음 길은 우두마을에서 연소, 익금, 금장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다른 코스와 달리 오르막과 언덕, 낭떠러지와 모래해안길이 곳곳에 섞여 있어 색다른 코스라고 한다. 주변의 섬과 리아스식 해안으로 마치 호수와 같은 조용한 바다를 바라보며 산길로 이어져 소나무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갯내음이 찾아오는 이의 마음을 가뿐하게 한다.
<우두마을회관>
뒤로 멀리 보이는 장흥의 천관산을 뒤로하고 풀 섶 우거진 샛길로 들어서 숨이 가빠 올라올 즈음 솔밭 길옆 그 많은 소나무들 중 한 그루는 두 팔을 하늘 높이 휘저으며 속새의 근심을 털어버리는 양 너울너울 춤을 춘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우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생략)”조지훈(趙芝薰)의 시 ‘승무(僧舞)’가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솔 갯내음 길 초입>
<춤추는 소나무>
솔밭 아래 있는 연소(蓮沼)마을은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마을로 연꽃이 많이 피는 연못이 있어 연소(蓮沼) 또는 ‘연못금’이라 불러왔고, 옛날 어른들은 마을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일명 필봉을 옹위하고 있는 지형이 반달모양으로 생겨 반월(半月)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1939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연소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연소해수욕장도 반달모양으로 굽어져 바다를 포근히 감싼다.
<용소해수욕장>
고흥7전망대로 가는 길목에는 벽화마을인 옥룡마을이 있다. 옥룡(玉龍)마을은 병자호란 때 이곳에 관군(官軍)이 퇴군하다가 잠시 진(陳)을 치고 막(幕)을 쳤다하여 진막금(陣幕金)이라 불렀다하며, 또 마을 앞에 옥녀봉(玉女峰)이 있고, 옆에 용두봉(龍頭峰)이 있어 두 봉우리의 첫 자를 따서 옥룡(玉龍)이라 하였는데, 속칭 진막금이라고 불러 오다가 1939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옥룡마을로 정하여 지금에 이른다.
<옥룡마을>
옥룡마을 벽화에는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유독 눈길을 끄는 벽화가 있었다. 이곳 출신 박치기 왕 프로레슬링 김일(金一)선수의 앉아 있는 그림이다.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일(金一, 1929∼2006)선수는 180cm 장신으로 원래 씨름선수였다. 1956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역도산(力道山)을 찾아갔으나 불법체류자로 잡혀 일본에서 1년간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1957년 도쿄의 역도산체육관 문하생 1기로 입문한다. 역도산으로부터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사나이라는 뜻의 오오키 긴타로(大木金太郞)라는 이름을 받았다.
<김일-벽화>
1963년 세계레슬링협회(WWA) 세계태그챔피언 2회(1963, 1967), 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65년 극동헤비급챔피언, 66년 도쿄 올아시아 태그챔피언, 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태그챔피언에 오르며 20차례 챔피언 방어전을 치렀다. 장영철, 천규덕과 함께 한국 프로 레슬링 1세대로 활약하며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박치기 왕으로 전 국민으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금산면 어전리 평지(平地)마을 ‘김일기념체육관’ 앞에는 김일의 생가와 그가 잠든 묘역, 기념비 등이 세워졌다고 하나 들르지 못했다.
<김일기념체육관-네이버캡쳐>
옥룡쉼터를 지나 고개 넘어 사람 키를 덮는 숲을 지날 때 겨우살이를 준비하던 말벌 때들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앞에 먼저 가던 도반께서 자기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리고 갔는지 처음에는 길이3㎝ 크기의 말벌 대여섯 마리가 윙윙대다가 원군을 불러와 떼로 공격을 한다. 최선을 다해 방어를 하였으나 결국 손등에 한방, 양쪽 무릎부근에 각 한방씩 쏘인다. 손은 금방 퉁퉁 부어오르고 얼굴까지 화끈거린다. 다른 동행 분께서 119에 신고하여 평생 처음으로 구급차 신세를 져본다. 먼저 그곳을 지나간 여성 두 분도 봉침 동기가 되었다.
<말벌-네이버캡쳐>
녹동의 모 의료원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같이 온 일행들과 합류하기 위해 택시로 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에 간다. 벌에 쏘인 자리는 퉁퉁 부어 콕콕 쑤신다. 일행들이 오기 전에 소록도 해안 길을 걸어본다. 해안 길에는 ‘애한의 추모비’가 서있다. 이 비는 일제 때 개원한 소록도병원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원생들이 자치권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는 협상대표 84인을 처참하게 학살당하였는데, 다시는 이 같은 죄악이 저질러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이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2002년 8월 22일에 세운 비다.
<소록대교>
<애한의 추모비>
<소록도해안길>
소록도(小鹿島)는 녹동으로부터 약 500m 거리에 있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 부른다. 예전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한센병 환자와 병원 직원들만의 섬이었으나 현재는 아름다운 경관이 알려지면서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그래도 소록도는 사실상 섬 전체가 병동의 일부로, 7개 마을에 각각 치료소를 설치하여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다.
<소록도지도>
국립소록도병원은 한센병 환자의 진료·보호·수용·관리와 한센병의 연구조사를 목적으로 설립한 것으로 1916년 5월에 설립된 소록도자혜의원을 전신으로, 1949년 5월 중앙나요양소, 1957년 12월 소록도갱생원, 1960년 7월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편되었다. 1968년 11월 소록도에 국립나병원을 신설하면서 산하에 있던 국립익산병원(구 익산소생원)·국립칠곡병원(구 칠곡애생원)·국립부평병원(구 부평성혜원)을 모두 폐지하였다. 1977년 부설 간호보조원양성소를 설치하고 1982년 12월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칭하였다.
<국립소록도병원>
1916년 초대 원장이던 일본인 아리카와 도루 이래 대대로 소록도 병원장들은 한때 6,000여 명에 이르렀던 나환자들을 동원하여 섬 가꾸기에 열을 올렸다. 섬 가운데 벽돌공장을 세우고 거기서 만든 벽돌로 예배당, 회관, 치료실 등 각종 건물 50여 동을 지었으며 진도, 완도, 대만 등지에서 보기 좋은 관상수와 바위들을 옮겨왔고 섬 일주도로까지 닦았다. 이미 병에 갉히어 이지러진 몸으로 강제노동을 견디다 못한 환자들 가운데는 나무토막이나 물통을 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소록도성당>
더욱이 이곳 중앙공원은 1934년부터 환자 위안장으로 가꾸어 오던 산책지를 대유원지로 만들어 확장하면서 완도와 득량 등지로부터 운반된 기암괴석들과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들여온 나무들을 조화롭게 만들어 1940년 4월에 완성하였다. 그리고 1962년 벽돌가마터주변을 공원으로 추가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이곳 환우들의 동원된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소록도 중앙공원의 황백(황금편백)나무>
이청준의 소설 1974년 4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신동아>에 연재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던 병원장(주정수 원장)이 물러나고, 5·16군사정변 이후 예비역대령 조백헌이 원장으로 오게 된다. 조 원장은 환우들을 위한 복지를 위해 힘쓰고 그들에게 ‘당신들을 위한 천국’으로 만들어주겠다며 오마도간척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하는 행동은 점점 주원장과 닮아가며, 그가 세우려는 천국이 모두의 천국이 아닌 자신의 천국이 되어가는 것으로 비춰진다.
<고 이청준(1939~2008)작가-네이버캡쳐>
결국 환우들이 생각하는 천국과 조 원장이 생각하는 천국에는 많은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소설 속 조원장이 검은 마음을 먹고 자신의 천국을 세우려고 일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천국을 세우겠다는 강한 목표의식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희생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원장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이다. 실제로 조백헌원장은 ‘천국의 기록’을 이청준에게 넘겼고,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소설로 썼다. 그 후 조백헌은 정선과 밀양에서 진폐증 병원을 열어 환자를 돌보다 2018년 4월 93세로 별세했다.
<고 조백헌 원장-네이버캡쳐>
이 섬을 아주 잘 아시는 분이 안내를 하여 땅거미가 이미 진 시간에도 섬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었어 고마웠으나, 날이 어두워 사물이 잘 보이질 않아 많이 아쉬웠다. 시인 한하운선생의 ‘보리피리’ 시비도 있고 이곳의 시련을 적은 기념관과 탑이 있는데 어둠 속에서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져 침탈당해야만 했던 그 시절이 하나의 예리한 파편이 되어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소록도에서 본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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