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奉化)지방에서 영주부석사까지(3)
(2018년 10월 6일)
瓦也 정유순
오늘 일정의 정점인 부석사(浮石寺)로 간다.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있는 부석사는 2018년 6월 30일, 제42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공주마곡사, 보은법주사, 순천선암사, 해남대흥사, 안동봉정사, 양산통도사와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곳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큰 사찰들의 공통점은 대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구에서부터 개울을 건너게 되어 있다. 이는 아마 개울을 건너면서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의 때를 씻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영주부석사 지도>
매표소를 지나 박석(薄石)이 깔린 은행나무 사이로 걸어가면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일주문이 나온다. 이 일주문은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세웠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 사과나무 밭에는 탐스런 사과들이 물오른 새악시 볼처럼 빨갛게 익어 있고, 길바닥에는 은행알들이 발에 밟혀 고약한 향기를 내품는다. 길의 왼쪽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높이 4.28m의 당간지주가 삐죽이 보이고, 멀지 않은 곳 위로 천왕문이 있다.
<영주부석사 일주문>
<당간지주>
<땅에 떨어진 은행>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마련한 천왕문(天王門) 안 양쪽에는 사천왕이 버티고 서 있는데 무서운 표정 속에는 정감 있는 인간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사천왕은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최하위를 차지한다. 수미산 정상의 중앙부에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뿐 아니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말한다.
<영주부석사 천왕문>
천왕문을 지나면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인근 동쪽 골짜기 옛 절터에서 1958년에 옮겨온 단아한 삼층석탑 한 쌍이 길 양쪽에 서 있다. 그리고 서탑 뒤편에 있는 세 분의 불상은 1994년 인근 밭을 갈다 발견되어 부석사로 모셔왔다고 한다. 앞으로 조금 더 나가면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 현판이 걸린 범종루가 떡 버틴다. 정확히 말하면 부석사는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봉황산은 태백산의 줄기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산이다. 그래서 큰 산인 태백산을 주산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봉황산부석사>
앞으로 바라보며 코가 닿을 것 같은 가파른 계단을 기어오르면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의 최고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안양루 밑의 계단을 오르면 극락의 세계인 무량수전에 다다른다. 여기까지 오르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안양루 밑까지 직선으로 반듯이 올라가다가 안양루부터 무량수전까지 살짝 방향을 틀어 남쪽을 향한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숨 가쁘게 올라와서 확 트인 세상을 바라보라는 의미가 엿보인다.
<안양루>
다른 사찰과는 달리 산 능선을 따라 거의 일렬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는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도량으로 신라 문무왕16년(676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하여 화엄의 뜻을 폈던 곳 이다. 특히 창건 당시 도둑들이 절의 창건을 방해하자, 의상을 사랑하는 당나라 낭자 선묘(善妙)가 용(龍)이 되었다가 다시 떠다니는 돌이 되어 방해자들을 물리쳐 완공되었다고 한다. 그 부석(浮石)은 무량수전 좌측 뒤편에 이끼를 머금은 채 비스듬히 누워 있으며, 우측 뒤편에는 선묘낭자를 모신 선묘각이 따로 있다.
<부석>
우리나라의 최고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국보 제45호인 소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건물이 남향인데 비해 이 불상만 동향(東向)으로 모셔져 있다. 배흘림기둥으로 지붕을 주심포로 바치고 있고 날렵한 처마 끝은 물기 오른 아가씨 치마 자락 같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어둠을 밝히는 석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676년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중창이 있었고, 1611년(광해군3) 때 폭풍우로 파손되자 다시 복구하였으며, 1916년에는 해체·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무량수전>
<무량수전과 석등>
진흙으로 만든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높이는 278㎝이며, 광배는 나무로 따로 만들었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처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모시는 무량수전이라는 것과, 좌우에 협시보살을 모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로 확신한다고 한다. 신라시대 불상 조형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정교한 걸작이다.
<소조여래좌상-네이버캡쳐>
무량수전 오른쪽 낮은 언덕에는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보물 제249호로 지정된 이 탑은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넓고 탑신 1층의 몸돌이 넓어서 장중하게 보인다. 1960년에 해체·복원할 때 철제 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대개 이러한 탑은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어 더 넓은 세상을 굽어본다.
<영주부석사 삼층석탑>
무량수전 우측으로 삼층석탑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사당이 있고, 내려오다 다시 좌측으로 올라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의 전각이 나온다. 국보 제19호로 지정된 조사당(祖師堂)은 의상대사 상을 모신 곳으로 1377년(고려 우왕3)에 세웠고, 조선 1490년(성종21년)과 1573년(선조6)에 개축하였다.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출입문 안쪽 벽에는 고려 때 그려진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그리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었는데 1916년 건물을 수리하면서 무량수전을 옮겼다가 지금은 부석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영주부석사 조사당>
조사당 처마 밑에는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두었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하는 선비화(禪扉花)가 1,300년 이상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는데,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잎을 삶아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잎을 마구 따가 지금은 철조망으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높이 170cm, 뿌리부분 굵기 5c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수령이 최소 500년에 이른다. 일명 골담초라고도 불리는 이 꽃을 보고 퇴계는 시를 읊기도 했다.
빼어난 옥 같은 줄기 빽빽이 절문을 비꼈는데
擢玉森森倚寺門(탁옥삼삼의사문)
지팡이 신령스레 뿌리 내렸다 스님이 알려주네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석장의 끝에 혜능선사 조계의 물 닿아 있는가
杖頭自有曹溪水(장두자유조계수)
천지의 비와 이슬 그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온)
<철조망에 갇힌 선비화>
부석사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 왔다가 無量壽殿(무량수전) 현판을 써주었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면 볼거리도 많은데… 그러나 부석사의 백미는 무량수전 마당에서 안양루 우측으로 보이는 백두대간의 근육 소백산의 산들이다. 산이 겹겹이 있고 사이사이를 흰 구름이 메운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넓은 정원이 부석사에는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년)이 부석사에 들렸다가 읊은 감회어린 시구처럼 “백 년 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이미 늙었는데”
<영주부석사 안양루>
<소백산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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