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석파령너미 길
(2018년 10월 3일)
瓦也 정유순
춘천은 30여 년 전에 옛 직장 춘천사무소에서 근무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만약에 경춘국도가 없었다면 틀림없이 이 석파령을 넘어 임지로 갔을 것인데, 그 당시에는 이런 길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지금은 철도와 도로망이 확충되어 내륙의 거점 중심도시가 되었지만, 1980년대 초 당시에는 서울과 춘천을 연결하는 교통망은 완행열차만 운행하는 경춘선 철도와 왕복 2차선인 경춘국도가 거의 전부였고, 또한 강원도 북부는 휴전선으로 가로 막혀 내륙의 종점(終點)이었다.
<석파령너미길 지도>
석파령너머길로 첫발을 띠기 위해 우리가 당도한 곳은 당림리로 서울에서 석파령을 넘기 위해 처음 만나는 마을이다. 당림리(塘林里)는 울창한 숲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이곳에 말(馬)의 안녕을 비는 말사당[馬堂]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역원(驛院)제도가 있을 때 안보역(安保驛)에 있던 늙은 말이 언제나 당림리를 지날 때는 숲 안쪽에 있는 말 무덤을 향해 절을 하고 간다는 소식을 듣고 원님이 말의 효성을 갸륵하게 여겨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당림리 마을 입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안보역(安保驛)이 춘천부의 서쪽 42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던 사람들은 석파령을 넘기 전에 안보역(安保驛)에서 숨을 돌리곤 하는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안보역(安保驛)>이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남겼다.
오래된 역 산자락에 기대 있는데
(古驛依山口 고역의산구)
사립문 단 여덟아홉 집만 있구나
(柴荊八九家 시형팔구가)
문 앞에는 푸른 비단 물이 감돌고
(縈門綠羅水 영문록나수)
시냇가엔 하얀 모래 널리어 있네
(帶岸白銀沙 대안백은사)
곱게 우는 새는 깊은 숲에서 울고
(好鳥歌深樹 호조가심수)
한가로운 개는 지는 꽃 아래서 조네
(閑厖睡落花한방수락화)
누가 알리오 황량하고 궁벽진 곳이
(誰知荒僻處 수지황벽처)
홀로 온갖 화사함을 다 차지한 걸
(獨自擅華奢 독자천화사)
<석파령너미길 임도>
이 마을은 산골짜기 안에 있는 조용한 마을로 손바닥만 한 논에는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인다. 조선시대 때 안보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정신병원인 춘천예현병원 건물이 자리한다. 병원 옆으로 하여 잡초가 우거진 임도에 풀 섶에 발이 감기기도 하면서 완만한 구절양장(九折羊腸) 고갯길을 따라 석파령으로 올라간다. 길 벽으로 단풍이 붉게 물들이고 길옆으로 손을 내민 머루는 오랜만에 가을정경의 맛을 느끼게 한다.
<춘천예현병원>
<길벽의 단풍>
석파령(350m)은 삼악산 북쪽 고개로 경춘국도가 뚫리기 전까지 서울(한양)과 춘천을 오가는 중요한 육로였다. 고개가 험해 아무리 높은 벼슬아치라도 말을 타고 넘지 못하고 걸어서 넘었다는 이 고개는 일명 사직고개라고도 불렸다. 또한 신·구 춘천부사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으로 장소가 좁아 자리 하나를 둘로 나누어 앉았다 하여 석파령(席破嶺)이라 하였고, 지금은 석파령을 오가는 길에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옛날처럼 험하지는 않다.
<석파령 정상>
과거에는 춘천과 외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던 석파령을 넘어 춘천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은 이 험한 산골에서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여 울었고, 떠날 때는 정들었던 후한 인정과 이별하기가 섭섭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안보역(安保驛)이 있었던 당림리를 출발하여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들이 환하게 맞이하더니 석파령을 넘어 덕두원리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알밤들이 떨어져 가는 발목을 자꾸 더디게 한다.
<알밤줍기>
<누리장나무>
고갯마루에서 천천히 옛길을 내려가자 조선시대 관아에서 운영하던 여관인 덕두원(德斗院)이 있었던 덕두원리 마을에 이른다. 이곳은 석파령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쉼터로도 유명했지만 소양강에 뗏목이 흐르던 시절, 덕두원 포와리를 지난 떼꾼들이 쉬어가던 휴식처로 번성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예전 춘천에서 한양(서울)으로 가려면 “소리개(송암리) 마을에서 신연강가의 배를 타고 건너 덕두원 골짜기를 타고 석파령을 넘어 안보리로 나갔다”고 한다.
<덕두원마을>
덕두원에서 닭갈비로 오전을 마무리하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밭이 많은 마을이라 밭마다 수수, 결명자차, 땅콩, 콩 등 밭작물들이 가을걷이를 기다린다. ‘호박꽃도 꽃이냐’며 천대를 받아오던 호박농장도 마지막 노란 꽃을 피우며 가는 세월을 아쉬워한다. 덕두원천(德斗院川)을 따라 ‘수래너미[거현(車峴)]고개로 들어선다.
<땅콩>
<수수>
수레너미 고개는 예전에 춘천 유수가 부임할 때 수레를 타고 넘었다고 하여 ‘수레너미’로 불리는데, 덕두원 2리에서 명월마을회관을 지나 숲속 오솔길로 이어진 가파르지 않은 고개 마루턱에 이른다. 그리고 고갯마루에서 천천히 내려가면 박사마을로 지정된 춘천시 서면 방동리이다. 그리고 계곡사이로 의암호 건너 춘천시내의 건물들이 멀리 보인다.
<수래너미 고개>
봄[춘(春)]내(천(川))는 원래 고대에 규모가 큰 원시부족국가였던 맥국(貊國)의 터로 삼국시대에 들어와 백제·고구려·신라의 지배를 차례로 받은 뒤에 조선조 태종13년(1413년)부터 현재의 이름인 춘천으로 불렀다. 강원도란 이름이 강릉(江陵)과 원주(原州)의 첫 글자를 조합하여 만들어졌듯이 원주와 강릉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춘천시내 원경>
그러다가 춘천이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것은 1888년으로 춘천은 유도부(留都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 속해 있다가 1895년에 영서지방을 통괄하는 관찰부가 들어섰고, 이듬해인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나누는 과정에서 영동지방을 포함한 강원도 전체를 관장하는 관찰사를 이곳에 두게 되면서 춘천은 강원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0년에 관찰사를 도청으로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방동리 대추>
수래너미고개 넘어 방동리(芳洞里)마을 어귀에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전공을 세운 충장공 한백록장군의 사당이 있다. 한백록(韓百祿, 1555년∼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수지(綬之)이다. 진잠현감, 지세포만호, 부산진첨사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서 옥포, 합포해전에 참전했으며, 미조항 싸움에서 전사했다.
<충장공 한백록 사당>
그리고 방동리는 ‘장절공마을’이라고도 하는데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군에 밀려 절대절명의 기로에 있을 때 왕건으로 위장한 신숭겸(申崇謙, ?∼927)이 장열하게 대신 전사하여 명당을 잡아 하사했다는 곳으로 이때 받은 시호가 ‘장절공(壯節公)’이다. 또한 잃어버린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묻었기 때문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봉분을 3개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절공 신숭겸은 평산신씨 시조로 봄·가을에 후손들이 모여 후하게 제사를 올린다.
<장절공 신숭겸 동상>
<장절공 신숭겸 묘역>
특이 한 것은 우리나라 8대 명당의 하나인 장절공묘역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이 마을에는 박사가 많이 배출 되어 ‘박사마을’로도 불린다. 1968년 송병덕 (의학)박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50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다고 한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도 박사마을이 배출한 인재 중의 한 명이다. 춘천시 서면은 평범한 농촌마을이지만 ‘박사마을’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단위 인구 당 박사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방동리마을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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