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奉化)지방에서 영주부석사까지(1)
(2018년 10월 6일)
瓦也 정유순
태풍 ‘콩래이’가 남부지방을 강타한다는 일기예보 덕분인지 평소 같았으면 서울을 빠져나가는 고속도로가 복잡하지 않고 그런대로 뻥 뚫린다. 서울을 출발한지 약 두 시간 반 만에 일제강점기 때 독립투사 14분을 배출한 봉화읍 해저리(海底里) ‘바래미’마을에 도착한다. ‘바래미’는 ‘바다 밑’의 이곳 토속어로 추정되고, 아주 오래 전 바다 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면 마당에 고인 물이 거짓말 같이 빠져 나간다고 한다.
<바래미마을 지도>
<바래미마을 안내도>
해저리 마을은 원래 여(余)씨들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 1524년∼1590년)의 현손인 팔오헌 김성구(八吾軒, 金聲久, 1641∼1707)가 들어와 살면서부터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성촌이 된 마을이다.
<바래미마을 전경>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들른 곳이 팔오헌 종택(宗宅)이다. 팔오헌 김성구(八吾軒 金聲久)는 본관 의성(義城)이며 자는 덕휴(德休)이다. 경북 성주(星州) 출생으로 1662년(현종3)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持平)·정언(正言)·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1693년(숙종19) 강원도관찰사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로 봉해졌고 봉화 십현(十賢)을 모시는 송록서원(松麓書院)에 배향되고 있다.
<팔오헌 전경>
김성구는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되었으며, 은퇴 후 자손들이 만대를 살아나갈 터를 이곳에 잡고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세워 후학양성에 매진한 결과 면학분위기가 대대로 이어져 수많은 인재(대과 14장, 소과 66장)가 배출하였다. 이 때 창건된 팔오헌은 후손들이 조선시대 후기에 현재의 건물로 중창하여 종택(宗宅, 경북문화재 자료 제445호)으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터전이 되기도 한다. 저서로는 <팔오헌집(八吾軒集)>이 있다.
<팔오헌 편액>
팔오헌에서 마을 위쪽으로 의성김씨가 모여사는 개암종파(開巖宗派)종택이 있다. 이 종택은 개암 김우굉의 10세손인 김연대(金鍊大, 1753∼1824)가 매입하여 정착하였고, 11세손인 김우영(金佑永, 1787∼1824)이 다시 고쳐지었다고 한다. 가옥은 5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솟을대문이 아닌 평대문인 대문채 안쪽으로 사랑마당이 있고 그 안에 사랑채가 남향으로 앉아 있다. 이 집에서 태어난 13세손 김창우(金昌禹, 1854∼1937)는 한일병탄(韓日倂呑) 후에 유림단 독립청원의거(儒林團 獨立請願義擧) 참여하였다.
<개암종택>
다음에 둘러본 곳이 남호구택(南湖舊宅)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5호로 지정된 이 구택은 응방산(鷹坊山) 줄기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연접(連接)히여 ‘口’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 가옥은 농산 김난영(聾山 金蘭永)이 1876년(고종13)에 건립하여 그의 아들 남호 김뢰식(南湖 金賚植, 1877∼1935)이 살던 곳이다. 남호는 경상도의 명망 높은 부호(富豪)였는데, 상해임시정부의군자금 모금 시 전 재산을 저당하고 대부를 받아 제공하였다고 한다.
<남호구택>
남호구택 장서고(藏書庫) 문지방 위에 걸려 있는 전서체(篆書體)로 쓴 孝悌忠信(효제충신), 禮義廉恥(예의염치) 여덟 글자는 ‘효도, 형제와 이웃 간의 우애, 충성, 신의, 예절, 의리, 청렴, 부끄러움’을 아는 삼강오륜의 요체이다. 옛날 양반집에서는 이 여덟 자를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방법으로 각 한 자씩 병풍(효제문자도)을 만들어 방에 비치하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신분 질서가 붕괴되면서 내용이 다양해졌다. 장서고에 보관 중이던 4천여 권의 장서가 2002년에 안타깝게도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효제충신>
<예의염치>
남호구택 앞에 있는 소강고택(所岡古宅)은 남호 김뢰식이 둘째 아들인 소강 김창기(所岡 金昌棋)가 장가를 들자, 새살림을 내어 주며 문살 하나까지 춘양목으로 지어준 가옥(1910년경 건축)이다. 가옥의 형태는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가 연접한 ‘口’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사랑채 측면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간문을 두고 사랑채 정면에는 큰사랑과 연접하여 도장방을 두었으며, 돌담을 쌓아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한 특이한 평면형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이다.
<소강고택>
해저 김건영가옥은 독립운동가인 해관 김건영이 지은 집으로 소유는 김호덕 명의로 되어 있고, 관리는 김호윤이 하고 있다. ‘경상북도기념물 제117호로 지정된 이 가옥은 口’자형 팔작지붕으로 다른 가옥과 비슷하다. 특이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파리장서사건을 전개할 때 사랑채가 지역유림들의 연명 장소로 이용되었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은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탄원서(獨立歎願書)를 보냈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해저 김건영가옥-네이버두산백과 캡쳐>
토향고택(土香古宅)은 입향조인 김성구의 넷째 아들 김여병(金汝鈵)을 10대조(十代祖)로 모시고,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다섯 칸 규모의 솟을 대문과 사방 일곱 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전형적인 영남 사대부가의 ‘口’자형 가옥이다. 뒷산의 소나무를 병풍 삼아 자리한 토향고택의 안채는 입향하기 전에 지어진 건물로 400여 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1876년 숭혜전 참봉ㆍ통훈대부를 지내고 현 봉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조양학교(1909년)를 설립한 암운 김인식(巖雲, 金仁植, 1855∼1910)이 중수하였다.
<토향고택 후원>
‘토향’은 김인식의 손자 김중욱(金重旭, 1924∼1967)의 호로 일제 때 징집되어 만주에서 행군 도중 탈출하여 소주(蘇州), 항주(杭州)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중앙고보,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예산담당관을 지내다 일찍이 작고하였는데, 그의 아들 김종구가 선친을 기리기 위해 현판으로 직접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토향고택은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후원에는 그네와 투호 등 민속놀이와 산책로도 있다.
<토향고택 대문 편액>
바래미마을 주차장 어귀에 있는 독립운동기념비 받침 석판(石板)에는 이 마을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배출한 14분의 독립투사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에 젖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자세히 보니 김하림, 김건영, 김순영, 김헌식, 김창우, 김뢰식, 김창벽, 김창근, 김흥기, 김중문, 김덕기, 김창엽, 김정진, 김창신으로 읽혀진다. 바래미 마을의 독립운동 중심에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출신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1962)이 있다.
<독립운동기념비>
심산이 바래미마을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된 데는 마을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바래미마을은 의성김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파조(派祖)는 개암 김우굉(開巖 金宇宏, 1524∼1590)으로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개암의 현손 팔오헌 김성구가 이곳에 이사와 터를 잡았다. 개암은 성주의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1540-1603)의 형이다. 바래미 마을에서 태어난 심산의 아버지 김호림은 개암의 12세손, 팔오헌의 8세손으로 1864년 23세 나이에 300년의 세월을 넘어 수백 리 떨어진 성주의 동강 집안으로 입양을 간 것이다.
<개암 김우굉 시비>
비록 심산이 동강의 13대 주손으로 성주에서 태어났지만 바래미는 아버지가 태어난 곳으로 본가와 같은 마을로 바래미 사람들은 심산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특히 심산은 해방 후 고구려의 태학(太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과 성균관, 조선의 성균관 등으로 맥(脈)을 이어오던 우리 전통의 국가교육기관을 국가교육기관으로 지정하고자 하였으나, 성균관은 사설교육기관으로 전락하고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이 국가교육기관으로 둔갑하였다. 후에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냈다.
<심산 김창숙-네이버노컷뉴스 캡쳐>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요즘 보기 드문 ‘정(井)’자형 네 귀퉁이를 돌로 짜 맞춘 큰 샘에서는 맑은 물이 용출(湧出)한다. 상수도가 발달하여 보급되기 전에는 우물이 그 마을의 생활중심지였고 소통의 장이었으며, 해마다 단오 날이나 따로 길한 날을 받아 용왕이 사는 용궁의 통로인 우물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큰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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