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봉화(奉化)지방에서 영주부석사까지(2)

와야 정유순 2018. 10. 11. 01:53

봉화(奉化)지방에서 영주부석사까지(2)

(2018106)

瓦也 정유순

   바래미마을에서는 학록서당, 수오당, 만회고택, 추원사 등 눈여겨 볼만한 소중한 자산들이 많이 있으나 다음 일정 때문에 빗속을 빠져나와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로 이동한다. 안동권씨 집성촌인 닭실마을은 낮은 산들이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세로 포근한 어머니 품 같다. 이 마을은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이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때 파직으로 물러난 뒤 이곳 내성현(奈城縣) 유곡에 들어와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봉화 닭실마을 지도>

<봉화 닭실마을-충재박물관에서 재촬영>


   충재는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충절로 이름이 났고 시호는 충정(忠定)으로 불천위(不遷位)를 받았다. 후손들이 뜻을 기리고자 지은 충재박물관에는 과거시험답안지, 각급 교지(敎旨) 등 보물로 지정된 많은 유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불천위(不遷位)는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神主)는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충재박물관>

<제삿상 진설도>


   충재의 기상이 서린 청암정(靑巖亭)1526(중종21)에 건립하였는데,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평면 ‘T’자형 정자로 주변에 연못을 파서 장대석으로 돌다리를 놓았다. 바위를 자연 모습 그대로 살려 주춧돌과 기둥 길이로 조정하여 정자의 지붕을 올려놓았는데,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다. 정자에는 남인(南人)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靑巖水石(청암수석)’의 편액(扁額)이 눈길을 끈다. 이 글씨는 허목이 88세 때 쓴 마지막 글씨다.

<청암정>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편액을 청암정 중앙 들보에 걸려 있는 이유는 노론(老論)이 집권하자 정권에서 소외되는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南人)의 영수 허목의 글씨를 앞 세워 남인의 정신을 기리고 다음 정권을 잡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충재의 18대 종손이 설명해 준다. 또한 정조(正祖)가 충재를 칭송한 내용을 번암 채재공(樊巖 蔡濟恭)이 적은 어제(御製) 편액과 너른 심성으로 여유로움을 표현한다는 퇴계 글씨의 편액이 함께 한다. 그리고 조상의 얼을 계승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이야기한다.

<채재공이 받아 쓴 정조 어제편액>

<퇴계 이황 편액>

<미수 허목의 청암수석>


   청암정에서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문수산축서사(文殊山鷲棲寺)로 이동하여 점심공양을 한다.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13(673)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창건설화에 의하면 문수산(1208) 아래 지림사(智林寺-지금의 水月庵) 주지가 어느 날 밤 산 쪽에서 서광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의상과 함께 산에 올라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광채를 발산하고 있어서, 의상은 이곳에 축서사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축서사는 지혜를 가진 독수리 [()]가 깃들어 [()] 있다는 뜻으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을 의미한다.

<축서사 보탑성전>


   대형주차장에 도착하니 태풍 콩래이가 마지막 위세를 부리는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웬만한 우산은 조금만 바람방향이 어긋나도 꺾이어 버린다. 가파른 비탈을 타고 축서사 바깥마당에 들어서면 먼저 보탑성전(寶塔聖殿)이 위용을 자랑한다. 계단을 타고 보탑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한 가운데에 부처의 진신사리 112과를 모신 국내최대규모의 5층 사리보탑이 자리한다. 2005년도에 세워진 이 탑은 우리의 한옥모양의 자형으로 만들었으며, 우로 세 바퀴 이상 돌고 세 번 절하면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5층 사리보탑>


   축서사는 대웅전, 보광전, 약사전 등 많은 전각들이 있었고, 보광전에서 기도하면 큰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었으나, 조선 말기에 큰 화재가 나 건물 몇 동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후 1994년부터 무여스님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도량확장 등 불사를 마무리하여 면모를 일신하였다. 현재 소장되어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광전에 모셔진 석조바로지나불상과 후광배(보물 제955)와 대웅전 괘불탱화(보물 제1379 등이 있다.

<보광전 석조비로지나불상>

<대웅전 삼존불과 괘불탱화>


   세차게 몰아치던 비바람도 축서사를 떠날 때는 많이 잦아든다. 다시 버스로 물야면 북지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로 이동한다. 1980916일 국보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불은 높이는 4.3m이다. 이 마애불이 있는 북지리 일대는 신라시대에 한 절이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마애불은 호골산(虎骨山) 줄기 끝부분의 암벽에 새겨져 있으며, 자연암석을 파서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안에 본존불(本尊佛)을 양각한 보기 드문 신라시대의 거대한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이다.

<과거의 마애불>


  몸에 비해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잘 알아볼 수는 없으나 왼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었고 몸 둘레에는 화불(化佛)을 조각하였다. 수인(手印)은 부처만 할 수 있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서 불상의 가슴부분과 무릎부분이 파손되어 있고, 대좌는 윗부분만 연꽃으로 조각되었으나 마멸이 심하다.

<지금의 마애불>


   다시 바쁘게 물야면 가평리 계서당(溪西堂)으로 이동한다. 중요민속자료 제171(19841) 지정된 계서당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서 성이성(溪西 成以性, 15951664)이 살던 곳으로 정면 7, 측면 6칸의 자형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의 사랑채(정면3, 측면 3)와 중문칸으로 이어져 있다. 1613(광해군5)에 건립하여 문중자제들의 훈육(訓育)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힘쓴 곳으로 사랑채 부분은 후대에 증개축(增改築)된 것으로 보인다.

<계서당 대문>


   성이성은 본관(本貫)이 창녕사람으로 남원 부사를 지낸 부용당 성안의(芙蓉堂 成安義, 15611629)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인조5(1627)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부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4번이나 어사로 출두하였다. 검소한 생활로 훗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추서(追敍)받았으며 1695(숙종 21)에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1786(정조 10)에 영천의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되었다. 현재 계서의 신위는 고택의 우측 사당에 모셔져 있으며, 묘소는 봉화군과 연접한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뒷산에 자리한다.

<계서당>


   <춘향전> 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 이몽룡의 실존 인물이 성이성이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몽룡의 실제 모델은 성이성(成以性)이다. 성이성은 광해군 때 남원 부사 성안의(成安義)의 아들로 13세부터 17세까지 남원에서 살다가 33세에 과거에 급제해 훗날 암행어사로 활동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이몽룡이 읊었던 금준미주는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玉盤嘉肴 萬姓膏)”는 시는 실제로 성이성의 유고집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槁>성이성의 4대손 성섭이 지은 책 교와문고(僑窩文庫)’ 등에는 준중미주는 천인혈(樽中美酒 千人血)이요, 반상가효는 만성고(盤上嘉肴 萬姓膏)로 글씨 두 군데만 다를 뿐 뜻을 같이 한다.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 천인혈)

소반 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玉盤嘉肴萬姓膏 (옥반가효 만성고)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소리 또한 높더라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

<소설 춘향전 에서>

<성이성이 쓴 준중미주천인혈>

<계서당 앞의 사과밭>


   우리 일행이 온 것을 보고 밭일 하다 말고 오신 13대 종손 성기호님께서 집안 내력에 대해 설명해준다. ‘춘향이는 기생이라 원래 성()이 없었는데, 소설 속에서는 할아버지의 성을 붙여서 성춘향이 되었고, 할아버지 성이성은 이몽룡으로 되었다고 부연 설명하면서 남원과 봉화가 춘향전으로 다시 합해지면 영호남 지역갈등도 해소될 것이라며 열변을 토한다.

<계서당 앞 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