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여덟 번째-2) (2018년9월15일∼16일, 박석진교∼창녕 적포교) 瓦也 정유순 밤송이가 여물어 가는 강변 인근에 있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장군의 묘소를 찾아간다. 조선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외가인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 십 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6월1일이 현재의 ‘의병의 날’이다. <밤나무> <망우당 곽재우 가족묘원> 그는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입고 백마에 높이 앉아 아군과 적군에게 위엄을 보이고 위장전술로 적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장군이 이끄는 의병은 왜병의 진로를 차단하여 호남진출을 차단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성주목사, 경상좌도방어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더 이상 다른 벼슬은 나아가지 않았으며, 1617년 눈을 감을 때 봉분을 돋우지 말고 평장(平葬)하라고 유언을 하였다. 1709년(숙종35)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네이버캡쳐> 곽재우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마지막 제자이며 외손서(外孫壻)이다. 남명이 곽재우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외손녀의 배필로 직접 정했다고 한다. 남명은 퇴계와 함께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퇴계는 인(仁)을 중심으로 제자를 가르쳤고, 남명은 의(義)를 중심으로 훈육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실천하는 양심’으로 가르침을 받은 곽재우 정인홍(鄭仁弘, 1535∼1623) 등 남명의 제자 50여명은 들불 같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救國)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망우당 곽재우 봉분> 다시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포리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를 연결하던 대암나루[대암진(臺岩津)] 자리에는 우곡교(牛谷橋)가 차지하여 흔적도 없다. 구지면 대암리 새골마을을 지나 무심사(無心寺)로 접어드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면서도 고요가 깃든 길이다. 목탁에 맞춰 청아하게 흘러나오는 독경소리는 낙동강 벼랑에 맑게 흩어진다. 무심사는 매주 토요일마다 ‘철야 정진 기도도량’으로 신도들의 발길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대구광역시 경계를 넘어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송곡리)로 들어선다. <산길로 접어들기 전의 강둑> <무심사 안내> 무심사 입구에는 ‘숙식무료제공’이라는 푯말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지역민들과 화합·소통을 위해서 우포늪 해맞이와 해넘이 행사에 매년 떡국 무료제공과 우포늪 보존 감시원들에게 의복과 신발을 무상으로 제공해 왔다. 이곳의 무심(無心)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낙동강 절벽에 의탁한 절이지만 절경은 그만이다. KBS ‘TV문학관’에서 김원일의 소설 <바라암>을 촬영한 무대이기도 하다. 재 넘어 장천리에 도착하니 어둠이 저만큼 밀려온다. <무심사 극락보전> 한때 온천의 메카로 불리던 창녕군 부곡온천에서 숙면(熟眠)과 조반을 하고 숙소에서 가까운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산만년교로 먼저 이동한다. 보물 제564호(1972년3월2일 지정)인 ‘영산만년교(靈山萬年橋)’는 홍예교(虹霓橋)로 너비 3m, 길이 13.5m, 높이 5m이며, 1780년(정조4) 영산 남천(南川)에 가설된 다리로 속칭 만년교라고 부른다. 남천 석교비(石橋碑)에 의하면 이 다리는 석수 백진기(白進己)가 축조하였고, 그 후 1892년(고종 29)에 현감(縣監) 신관조(申觀朝)가 석수 김내경(金乃敬)을 시켜서 중수하였다. 우리나라 수많은 보물 중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예는 아주 극히 드문 일이다. <영산만년교> 만년교가 있는 곳은 ‘남산호국공원’이다. 영산은 임진왜란 때 현감 전제(全濟)장군이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에서 충의용사들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전승지이고, 3·1운동 때는 이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였으며, 한국전쟁 때는 두 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는 등 국난을 극복한 조상들의 호국충절의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에 조상들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자 충의용사들의 호국충혼탑을 건립하였다. <남산 호국충혼탑> 만년교에서 가까운 곳에는 연지(硯池)라는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유래는 예부터 영산 고을의 진산인 영축산은 불덩어리의 형상을 한 산으로 고을에 화재가 일어날 수 있다 하여 불은 물로 다스린다는 오행 사상에 의거 화재를 예방하고 또 농사에 이로운 치수구로 벼루 모양으로 못을 만들었다. 오랜 세월 가꾸지 않아 못의 구실을 못 하다가 1889년에 다시 파고 막아 개울물을 끌어들이고 하늘의 오성을 본 따 다섯 개의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산 연지(硯池)> 이번에는 영산면에서 서쪽으로 약5㎞쯤 떨어진 창녕군 장마면 유리에 있는 창녕지석묘(昌寧支石墓)를 보기 위해 이동한다, 이곳에는 원래 7기의 지석묘가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되어 일명 칠성바위라고 불리어지고 있었으나, 1912년 도로공사 때 일본인이 일부 파괴·공사에 사용하여 현재 1기만 남았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은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평지에 있는 고인돌과는 다른 입지조건을 보여주는 것으로 학술상 가치가 크다. <창녕지석묘> 다음은 우포늪으로 이동한다. 우포늪천연보호구역은 낙동강의 배후습지로서 4개의 늪(우포늪, 목포늪, 사지포, 쪽지벌)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자연내륙습지로 한반도지형의 탄생시기를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화왕산(757.7m) 북쪽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들어오는 토평천이 가로지르고, 우기나 홍수 때에 충분한 수분을 토양 속에 저장하였다가 건기 때 주변에 물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여 국내 최대 규모의 천연 늪으로 각종 야생 동·식물의 서식처이다. <우포늪 제방(대대제)> <우포늪 안내도> 이곳에는 가시연꽃, 노랑어리연꽃, 마름 등의 수생식물을 비롯하여 약500여종의 관속식물, 400여종의 식물성플랑크톤, 20여종의 포유류, 180여종의 조류, 20여종의 양서류와 파충류, 그리고 30여종의 어류와 800여종의 곤충 등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여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4계절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먹이 때문에 많은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우포늪 가시연꽃> 이렇게 습지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우포늪은 다양한 생물들의 보금자리로 생태계보전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1997년 7월)으로 지정되었으며, 국제적으로도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지정(1998년 3월)되었고,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1999년 8월)되었다. 그리고 습지의 중요성으로 인해 천연보호구역으로도 지정(천연기념물 제524호, 2011년 1월)되었다. <우포늪 철새> 우포늪이 이렇게 국내·외적인 습지보호지역으로 인정받기 까지는 질곡의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40년대에는 홍수방지와 농경지를 확보하여 쌀을 수탈하기 위해 대대제방을 쌓았고, 1970년대에 들어 와서는 개발을 목적으로 매립공사가 진행되다가 비용과 기술력 부족으로 중단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에는 목포늪 주변에 생활쓰레기매립장이 만들어 지다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우포늪 전경>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옛말이 있듯이 내친 김에 합천군 덕곡면 밤마리[율지리(栗旨里)] 오광대발상지(五廣大發祥地)로 향한다. 밤마리는 무심사 아래로 낙동강을 건너가는 율지교를 지나면 바로다. 오광대는 경남에 전승되는 가면극을 통칭하는 용어로 그 발상지가 바로 이곳 밤마리[栗旨里]이며, 이곳에서 경남의 신반·의령·진주·산청·창원·통영·고성·진동·김해 등 가락지역과 부산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경남지역의 가면극을 오광대라 하며, 부산지역에서 전승되는 가면극은 야류(野遊)라고 한다. <오광대발상지 안내 표지판> <밤마리오광대문화체험관> <오광대놀이 벽화> 오광대놀이는 다섯 광대의 연희라는 의미에서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었기에 오광대라고 칭한다는 견해가 있다. 오광대에 등장하는 광대들이 다섯 명 이상이지만 주요 등장인물인 핵심 양반이나 신장(장군), 문둥이, 노름꾼이 다섯 명인 까닭에 오광대 연희라고 한다. 가산 오광대와 마산 오광대는 일곱 마당이지만, 나머지 오광대는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오행사상에 근거한 오방개념이 반영된 의미도 있다. 오방은 동서남북의 네 방위에 중앙을 가리키는데, 이 세상 전부를 의미한다. <오광대로타리> 혹시 ‘밤마리오광대문화체험관’에서 공연이라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문만 굳게 닫혀있다. 어차피 기대는 안 했지만 막상 그냥 돌아서려니까 몹시 아쉽다. 이렇게 유적지 답사로 오전을 보내고 오후에는 창녕군 이방면 장촌리 낙동강변으로 이동하여 본격 도보에 오른다. 마을입구 농로(農路)에는 4대강사업 때나 사용했을 것 같은 대형 모래채취선이 어울리지 않게 버려져 있다. 고가의 중장비가 일회용 장비였나? 고령군 강변에 버려진 크레인과 함께 뒤처리가 깨끗하지 못한 우리들의 치부를 들어내는 것 같다. <방치된 대형 모래채취선> 마을을 지나 강둑으로 올라서자 합천·창녕보가 가깝게 다가온다. 이 보는 길이는 328m(가동보 138m, 고정보 190m)이며, 가동보는 승강식 수문과 회전식수문으로 구성되어 수문의 곡선라인을 통해 부드러운 경관 디자인을 구현하였다. 하천의 바닥과 표면에 있는 물을 각각 흘려보내는 것 모두가 가능하며, 보조 수문의 조작을 통해 미세한 수위 조절까지 가능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이곳의 녹조농도가 역대 최고치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다. <합천·창녕보> <공도교> 합천·창녕보 조형탑과 전망대를 지나 강둑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산이 가로막는다. 아까 보를 지나치면서 화살표를 본 것 같은데 그냥 지나친 것 같다. 성묫길이 어슴푸레 나있기는 하나 풀과 나무가 우거져 쉬운 길이 아니다. 정상을 넘어 아래로 내려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동행하는 도반 한 분이 말벌에 쏘인다. 응급조치 후 적포교가 보이는 현창마을에서 빨리 마감한다. <합천·창녕보조형물과 전망대> <황강과 합류하는 낙동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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