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관령 옛길을 띠라

와야 정유순 2018. 8. 20. 03:06

대관령 옛길을 띠라

(2018. 8. 18)

瓦也 정유순

  대관령(大關嶺 832m)은 백두대간의 중심고개로 이곳을 기준하여 동쪽은 영동(또는 관동) 서쪽은 영서(또는 관서)로 구분된다.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방 사람들은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 대관령 길을 넘어 다녀야 했다. 오죽헌에서 태어난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도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의 손을 잡고 함께 넘었을 것이고, 관동별곡을 쓴 송강 정철(松江 鄭澈)도 이 길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며, 당시 물류의 주역인 보부상(褓負商)들도 대관령 옛길을 넘나들며 발품을 팔았을 것이다.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


  고개의 총연장이 13이고, 고개가 아흔 아홉 굽이에 이른다. 고개 마루를 넘어 영동고속도로가 지났으나 200211월 횡계강릉구간이 터널로 바뀌었다. 대관령을 경계로 동쪽은 남대천이 강릉을 지나 동해로 흐르며, 서쪽은 남한강의 지류인 송천(松川)이 흘러 서해로 향한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발왕산 등에 둘러싸인 분지로 고위평탄면 지형을 이룬다. 기후는 한랭 다우지역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리는 지역이다.

<등산로 안내>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서 선자령(仙子嶺 1157m)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다. 엊그제까지 무쇠도 녹일 것처럼 뜨겁던 날씨도 오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늘은 서늘하다. 부챗살처럼 퍼지는 햇살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의 하모니다. 숲길을 따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올라선 곳은 백두대간 마루금 서쪽 너머로 우리나라 유일의 약 20정도의 대관령 양떼목장으로 철조망이 앞을 가린다.

<대관령 계곡>

<대관령 양떼목장>


  그리고 선자령으로 갈리지는 갈림길로 기다림과 실패, 도전 그리고 성공이 있는 대관령 영웅의 숲이다. 이 숲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두 번의 실패와 12년의 기다림, 그리고 화전지(火田地)를 숲으로 바꾸기 위한 10년의 실패와 끊임없는 산림복구도전으로 방풍림으로 성공한 40, 동계스포츠의 불모지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황량했던 대관령에 강풍을 이겨낸 녹음이 가득한 숲이다.

<대관령 영웅의 숲>


  갈림길에서 대관령 옛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범일(梵日, 810889)국사를 모신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와 대관령산신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장군을 모신 대관령산신당(大關嶺山神堂)이 나온다. 동서로 약30떨어진 이 두 곳은 매년 음력 415일이면 성황제와 산신제가 함께 열리며, 강릉으로 위패를 모시고 내려갔다가단오제 마지막 날 거행하는 송신제에 남대천에서 대관령으로 모셔온다고 한다. 두 사람은 신라 때 고승이며 장군이다.

<대관령 국사성황사>

<대관령 산신당>


  성황당 앞에서 돌계단을 기어오르고 kt송신소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대관령옛길이다. 대관령에는 원울이재[員泣峴, 원울현]가 있는데, 이곳은 신임 강릉부사가 부임할 때 고갯길이 험해서 울고, 임기가 끝나서 다시 고개를 넘어갈 때는 강릉의 인정에 감복해서 울었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옛길은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 해서 대굴령이라 불렀는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은 대관령을 대굴대굴 넘나들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대관령 구름이 처음 걷히니(大嶺雲初捲 대령운초권)

꼭대기의 눈이 아직도 남아 있네(危顚雪未消 위전설미소)

양장처럼 산길은 험난도 한데(羊腸山路險 양장산로험)

조도 같은 역정은 멀기도 하네(鳥道驛程遙 조도역정요)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老樹圍神廟 노수위신묘)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했구나(晴烟接海嶠 청연접해교)

높이 올라 글을 지으니(登高㻣作賦 등고감작부)

풍경이 사람의 흥을 돋우네(風景使人遼 풍경사인요)

<산신당에서 대관령으로 올라가는 길>

<선자령으로 가는 임도> 

 

  조선 영조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냈고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인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16821751)도 대관령을 넘으며 세월을 읊어본다. 강문팔학사는 조선 중기 대 학자였던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 16411721) 문하의 대표적인 충청도 제자 8명을 가리킨다.

새나 다닐 험한 길은 하늘에 걸렸고(鳥道眩天去 조도현천거)

   이 길을 가는 나도 반절은 공중을 걷고 있네(我行在半空 아행재반공)

   연 이은 산들 에는 눈이 내려 흰빛 이고(山連雲岳白 산연운악백)

   물을 붉은 해에 씻기여 붉게 비친다(水湯火輪紅 수탕화륜홍

   훤히 트인 바다는 아득히 천리에 뻗었고(關海千里遠 관해천리원)

   구름은 한눈에 시원히 트였구나(雲煙一望通 운연일망통)

   평생에 품었든 온갖 뜻이(平生四方志 평생사방지)

   오늘에야 긴 바람을 타는 구나(今日駕長風 금일가장풍)

<대관령 옛길>


  엊그제 내린 비의 영향인지 길가에는 버섯이 우산처럼 서 있고 빗물에 도랑처럼 패인 길은 나무그늘에 가려 더 깊게 보인다. 솔바람에 저절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숲을 빠져나오면 횡계와 강릉을 이어주던 구 영동고속도로가 지금은 한가한 456번 지방도로로 변했고, 횡단보도를 따라 건너오면 대관령 옛길의 반정(半程)이다. 반정은 조선 때 대관령 초입에 있던 구산역과 대관령 위에 있던 횡계역의 중간 지점이라는 뜻이다. 반정의 마당에서 동으로 바라보면 바다와 접하는 강릉시가 아늑하게 자리한다.

<대관령 움푹패인 옛길>

<대관령 버섯>

<구 영동고속도로>


  6살 율곡의 손을 잡고 관동대로를 따라 서울 시댁으로 향하던 신사임당은 대관령을 넘을 때 친정을 그리워하며(踰大關嶺望親庭 유대관령망친정)’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이별의 아쉬움을 글로 대신한다.

백발의 어머니 강릉에 계시온데(慈親鶴髮在臨瀛 자친학발재임영)

이 몸 홀로 서울로 가는구나(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回首北坪時一望 회수북평시일망)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반정>

<반정에서 바라본 강릉>

 

  반정에서 숲길로 내려와 지나치려는데 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돌무지 같은 것이 보이고 앞에는 비()가 서있다. 터가 얼마나 좋으면 예까지 묘를 썼을까 생각했는데, 묘가 아니라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記官 李秉華 遺蕙不忘碑)이다. 이 비는 대관령을 오가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개인재산으로 반정에 주막을 지은 강릉부의 향리(鄕吏) 이병화의 은덕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으로, 대관령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막에서 머물거나 묵을 때마다 그의 공덕을 잊지 않았고 이를 기념하고자 1824(순조24)에 비를 반정 아래에 세웠다.

<기관 이병화 혜불망비-네이버캡쳐>

 

  관동대로(關東大路)는 조선시대 때 서울의 흥인지문(동대문)을 출발하여 중랑포를 지나 원주, 진부, 횡계,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리고 강릉에서 삼척, 울진을 거쳐 평해까지 연결된다. 그러나 관동대로의 종점은 평해이지만 동대문 밖은 강릉이다라는 옛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는 관동대로는 강릉서울 구간이다. 대관령 옛길은 조선 중종 때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길을 넓혀 놓았다.

<대관령 옛길의 돌무더기>


  깊은 계곡인지라 흐르는 물소리도 우렁차다.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정성들여 쌓아 올린 돌무더기가 서둘지 말라고 타이른다. 빗물은 얼마나 휘젓고 지나갔는지 길옆의 나무는 뿌리를 햇볕에 말린다. 맑디맑은 물이라 징검다리 건너며 사진으로 찍어도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은 스스로 모양을 만들지 아니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세상에 소용되듯이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직접 보는 것 같다.

<노출된 나무뿌리>

<맑은 계곡>

<대관령 금강소나무 숲>


  맑게 고여 있는 물에서 발을 담갔다가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옛 주막 터이다. 대관령 옛길 주막자리에 전통초가를 복원하여 오가는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준다. 물레방아가 있고 집 주변을 깨끗하게 단장하여 분위기를 띠운다. 초가 안에 관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리인이 상주하는 것 같다.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났지만 영업을 아예 하지 않아 그냥 접는다. 대관령에는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는 역()과 숙박을 담당하는 원()이 있었다. 그 원인 제민원(濟民院) 터에 대관령박물관이 위치하고 대관령 옛길이 끝난다.

<맑은 물에 피로를 풀고>

<대관령 옛길의 초기(주막 터)>

<대관령 옛길의 맑은 물>

<대관령 옛길의 푸른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