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옛 역사를 찾아서(8 完)
(2018년7월24∼8월1일)
瓦也 정유순
8. 여순감옥(8.1)
홍해탄에서 물든 노을은 저녁 내내 이어지다가 잉커우[영구(營口)]시에서 아침을 맞는다. ‘오래 걸으면 집이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오늘은 이번 여정의 마지막으로 뤼순[여순(旅順)]감옥을 둘러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이 무겁다.
<다렌으로 가는 길>
안중근(安重根, 1879.9.2.∼1910.3.26)장군의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일백년이 훌쩍 지나는 동안 이행하지 못한 후예(後裔)로서 장군을 대할 면목이 없다. 그러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피하지 말고 가슴에 깊이 새겨두자.
<안중근장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사(義士)로 알고 있는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나는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써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장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니 포로로 대접해 달라’고 주장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144일 동안 독방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자서전을 집필하였고, 유묵들을 남기셨다. 그래서 의사 보다는 장군으로 호칭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안중근장군의 유묵>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中天)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땀을 쥐어짠다. 여순감옥(旅順監獄)은 1902년 러시아가 동북 3성의 반러성향 중국인들을 수감시키기 위해 건축했으나,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로 여순을 점령하게 된 후 1907년 현재 형태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총 면적은 약26,000㎡로, 275개의 여러 형태 감방이 있으며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옛 여순감옥>
보안검색 등 입장절차를 마치고 안내방향대로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한글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가 보다. 입구에는 ‘여순감옥은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 여순에 건립한 감옥으로 애국동포와 항일지사를 수감하고 처형한 파시스트 감옥이다. 이러한 감옥의 역사는 근대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축소판이다.’이란 설명으로 감옥의 설립배경을 설명한다. 이 감옥은 1902년에 건축되어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해체 되었다.
<보안검색대 입구>
처음 들른 곳이 검신실(檢身室)이다. 수감자들이 공장에 가서 부역할 때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먼저 모두 옷을 벗고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번호를 외치며 나무막대기를 뛰어 넘었다. 수감자들은 검사가 끝난 후 공장으로 부역을 가거나 감방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못에 걸려 있는 수의(囚衣)들은 그때의 실상을 설명하는 것 같다.
<검신실>
검신실을 지나면 바로 감방이 나온다. 건물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층마다 복도를 따라 감방이 방사형으로 나란히 나열되어 있으며 복도 중간부분에는 간수들의 감시 및 투광, 상하층의 공기소통 역할을 하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면적은 11∼15㎡(약3∼5평)으로 한방에 7∼8명을 수감하였다. 감방 벽에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 3개국 문자로 된 감옥규칙을 붙여 놓았으며, 문 앞에는 죄수를 확인하는 번호표가 있다. 공기는 혼탁했고 여름에는 무더웠으며 겨울에는 난방이 없는 냉골이었다.
<감방내부>
안중근장군의 독방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간수휴게실이 나온다. 10명의 역대 형무소장의 이름과 재임기간표가 액자로 걸려 있고, 여순형무소의 조직기구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고문실이 나온다. 조강(弔杠), 호랑이의자 등 고문기구들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친다. 조강은 사지를 묶어 막대기로 가로질러 메달아 놓고 통닭구이 하듯 하는 고문기구 같다. 주요 고문수단은 납으로 감싼 대나무로 살이 찢어지고 터지도록 때리는 태형(笞刑)이다.
<안중근장군 독방의 책걸상>
<각종 고문기구들>
수형자들의 강제노역을 착취하던 공장 등 작업실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사형장이 나온다. 1934년 비밀사형장을 증설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수감자를 여기에서 교수형으로 집행하였다. 여기에서 사형당한 항일투사는 헤아릴 수 없고,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700여명이 집행되었다고 하며, 일본이 항복한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에도 여러 명을 사형시켰다고 한다.
<사형집행기구들>
사형은 사형수를 1㎡의 나무판에 끌고 와 수갑을 채운 후 눈을 가리고 형구를 씌워 연결고리고 단단히 묶은 다음 경첩이 열리면서 사형수가 떨어지면 심장박동 등 생사여부를 검시 한 후 나무통에 시신이 반절 꺾이게 담아 형무소 안의 묘지에 매장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검시과정에서 쇠꼬챙이로 목을 찌르기도 한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 백정이다.
<여순감옥 내의 무덤>
인간으로서 참담한 심정으로 나와 여순형무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셨던 애국지사들의 숨결이 담긴 전시실로 가본다. 입구에는 중국의 영원한 재상(宰相) 저우언라이[주은래(周恩來)] 총리의 “청일전쟁 후 중국 한국 양국 국민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은 20세기 초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를 처단할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회고담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실에는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을 비롯하여 독립지사들의 자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주은래 어록>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아명이 ‘응칠(應七)’이다. 어릴 적 안중근은 초패왕 항우를 동경하고 학문보다는 사냥을 좋아하는 등, 자유분방하고 호기로운 성향을 키웠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교의 진리는 믿되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면서 “외국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종놈이 된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통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서 날 것이며,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서 살 것인가?
<안중근장군 동상-서울남산>
이회영(李會榮, 1867.3.17.∼1932.11.17)선생은 조선의 명문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태어났다. 한말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여섯 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 특사’ ‘고종의 국외망명’ ‘의열단’ 등 국외 항일운동의 전반에 관여하였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한 학교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하였으며 신채호, 이을규 등과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회영선생>
이회영선생은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대련(大連)]으로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상하이 밀정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붙들려 심한 고문 끝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동생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은 1945년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을 위해 신흥대학을 설립하였으나, 한국전쟁과 재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신흥대학재단을 조영식(趙永植, 1921∼2012)이 인수하여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되었다.
<이시영선생 동상-서울남산>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이며 사학자와 언론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내외의 민족영웅정신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선생은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여 한국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단재 신채호선생>
단재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의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힐 것이다.”라고 했다.
<고조선 전도>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며 미래’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대통령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 부역자 중 6,763명을 사형에 처하고 26,529명을 징역형에 처하면서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또 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정치인, 언론인, 작가, 시인 등은 사회여론의 주도층으로서 가중처벌을 받았다. 과거 일제청산을 하지 못한 우리에게는 시사 하는바가 매우 크다.(完)
<샤를 드골대통령>
※ 8회에 걸쳐 이어온 저의 졸필 <조선의 옛 역사를 찾아서>를
끝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8박9일 동안 중국의 하북성, 산서성, 요령성 등 약3,500km에 달하는 거리를 走馬看山격으로 스쳐 지나고만 다녀서 미쳐 보지 못한 것도 많을 것이고, 보았다 하더라도 짧은 지식과 식견으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족함이 많을 줄 압니다. 너그러이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좀 더 좋은 글이 되도록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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