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옛 역사를 찾아서(5)
(2018년7월24∼8월1일)
瓦也 정유순
5. 갈석산, 노룡두와 산해관(7.29)
어젯밤 산서성 성도 타이유안[태원(太原)]에서 밤 (침대)열차를 약 12시간을 이용하여 친황다오[진황도(秦皇島)]시에 도착하자마자 조반을 마치고 제스산[갈석산(碣石山)]으로 향한다. 진황도는 보하이만[발해만(渤海灣)]에 면해 있는 부동항(不凍港)으로 진시황(秦始皇)이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이곳에 행차한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대한민국과 가깝고 옛 조선 땅이라 그런지 아침식사의 입맛은 고향 맛이다. 말이나 문자는 중국 것이어도 낯설지가 않고 어디선가 눈에 익은 모습들이다.
<타이유안(太原)역>
<태원-진황도 기차표>
해발 1000m이상의 고원지대에 있다가 발해만 해변으로 이동하니 무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갈석산 수암사(水岩寺)의 배경 산으로 뒤에 위치한 갈석산(碣石山, 695.1m)은 온통 하나의 큰 바위로 보인다. 더욱이 고조선 영토의 경계지역으로 지금의 북경(北京) 근처인 하북성 창려현에 위치한 산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산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도 고대로부터 타 민족과의 경계로 인식해 왔던 곳이다.
<갈석산 표지석>
<갈석산 전경>
<수암사 전경>
산으로 가기 위해 수암사 오른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절 외벽에는 진시황(秦始皇)이 B.C 215년 가을 동쪽을 순방할 때, 한무제(漢武帝)는 B.C 110년에, 위무제 조조(魏武帝 曹操)는 서기 207년에 오환족을 정벌하는 중에, 북위문성제(北魏文成帝)는 446년 갈석산에 올라 문무백관에게 큰 연회를,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은 고구려 원정 때 왔었고, 이외 진(秦) 2대 호해(胡亥), 진선제 사마의(陳宣帝 司馬懿), 북제 문선제(北齊 文宣帝) 등 총9명이 다녀갔다고 선전한다.
<진시황, 진2세 호해, 한무제>
<조조, 진선제 사마의, 북위 문성제>
<북제 문선제, 수양제, 당태종 이세민>
오전인데도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에서 땀이 샘물처럼 솟는다. 다른 날 같았으면 무더위 때문에 산행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았을 이 땅을 언제 또 밟아 볼까? 오히려 감정이 북 받쳐 오른다. 가쁜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니 미세먼지에 가려 희미하기는 하나 옛 낙랑(樂浪) 땅이 발아래 펼쳐진다. 고지도에는 진황도를 포함하여 이 지역 부근이 낙랑군이었다.
<진황도시-옛 낙랑군지역>
갈석산은 바위산이지만 중턱 아래로는 몸 하나 가릴 정도의 그늘이 있는데, 숲 속에는 야생으로 자라는 대추나무가 섞여 열매를 맺어 있다. 대추(棗)는 꽃이 핀 자리에는 틀림없이 열매가 맺힌다 하여 후손의 번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사상에 제일앞자리에 올려놓는다. 그 위에는 고욤나무가 도토리만 하게 열매를 맺었다. 감(柿)은 어떤 씨를 심어도 싹이 나면 고욤이 되기 때문에, 좋은 감이 되려면 필히 접을 붙여야 한다. 이는 세상에 태어났으면 감과 같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큰 인물이 되라는 의미로 제사상에 오른다.
<갈석산 대추>
참고로 밤(栗)은 씨 밤이 싹이 나면 그 나무가 생명을 다할 때까지 뿌리 중앙에 붙어 운명을 같이하여 ‘후손을 지극히 사랑’하는 조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당의 위패도 밤나무로 만든다. 그래서 대추[棗]·밤[栗]·감[柿]은 제사상에 꼭 올려야 하는 필수품이다. 대추와 고욤을 보는 순간 옛 조상들이 출생율이 저조하고 환골탈태하지 못하여 새롭고 큰 인물이 못되는 지금의 후손들에게 무언의 경각심을 주는 것 같다.
<갈석산 고욤>
물이 흐르지 않는 갈석폭포에는 물 대신 붉은 색으로 ‘碣石(갈석)’이란 글씨가 차지한다. 정상에는 주요국가보안시설인 통신 탑이 있어 접근이 어려운 것 같다. 동북쪽 발해(渤海)와 옛 조선 땅을 아주 멀리까지 바라본다. 배달겨레 의 함성이∼, 말(馬)에게까지 갑옷을 입혀 대륙을 주름잡았던 고구려의 개마무사(鎧馬武士)들의 말발굽소리가∼, 찬란한 문화강국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었던 진국·발해(振國·渤海)의 맥박이 심연(深淵)에서 고동친다.
<갈석산 정상>
<갈석산 폭포>
<평택-제천 고속도로 천등산휴게소 개마무사상>
오후에는 만리장성의 해안 시작점인 라오롱터우[노룡두(老龍頭)]로 이동한다. 노룡두는 1579년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때 몽골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석성을 축성하였다. 석성의 끝자락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용이 머리를 바다에 담근 모습과 같다하여 얻은 이름이다. 그러나 1840년 이후 서구열강의 군함이 이 지역에 출몰하여 1900년에 노룡두를 포격하고 산해관을 점령하였는데, 이때 징해루와 함께 붕괴된 것을 1985년부터 시작된 노룡두 복원사업을 통해 재건된 것이다.
<노룡두-만리장성의 시작>
<노룡두 표지석>
노룡두가 완공된 후 세워진 닝하이성[영해성(寧海城)]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영해성은 둘레가 500m, 높이 7m로 축조되었다. 북쪽과 서쪽에 두 개의 성문이 있으며,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와 건륭제(乾隆帝) 때에 복구공사가 수차례 이루어 졌다고 한다.
<영해성 입구>
<영해성>
노룡두로 가는 길목에는 영해성과 함께 세워진 청하이루[징해루(澄海樓)]가 있다. 징해루 1층 처마 밑 중앙에는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가 썼다는 징해루(澄海樓) 현판이 걸려있으며, 2층 누각 처마 아래에는 명대(明代)의 학자 손승종(孫承宗)이 쓴 웅금만리(雄襟萬里) 편액이 걸려 있다. 웅금만리는 ‘힘찬 옷깃자락이 만리에 이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징해루>
‘老龍頭(노룡두)’ 표지석과 용머리 그림이 붙어 있는 성벽 끝자락에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무척 붐빈다. 예정된 시간에 쫓겨 서둘러 나오는데, 과거 수비병들이 훈련하던 용무영(龍武營) 자리에는 팔괘(八卦)모형으로 만든 미로게임장이 마당을 꽉 채운다. 우리는 언제 전통의 맥이 흐르는 놀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뜻인데 옛 것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무조건 새 것만 추구하는 세상이 되어 안타깝다.
<팔괘 미로게임장-용무영 마당>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갈 때 만리장성의 천하제일관문인 산하이관[산해관(山海關)]으로 서두른다. 산해관이란 지명은 14세기 초 명대(明代)에 성을 쌓고 산해위(山海衛)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킨 데서 유래되었으며,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관(關)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수(隋)·당대(唐代)에는 임유관(臨渝關), 요(遼)·금대(金代)에는 천민현(遷民縣)·천민진(遷民鎭) 등으로 불렸다. 고구려를 침입한 수문제(隋文帝)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곳이 임유관전투이고, 수양제(隋煬帝)의 침입을 을지문덕장군이 물리친 곳이 살수대첩이다.
<산해관>
산해관은 북서쪽으로는 러산산맥[연산산맥(燕山山脈)], 동쪽으로는 발해만(渤海灣)에 접해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4km 되는 곳이 노룡두(老龍頭)이며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북제(北齊) 때 이루어진 것이다. 산해관성 동쪽으로는 만리장성 동문성루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씌어 진 현판이 걸려 있다. 만리장성 동쪽 끝 시작지점으로 예로부터 자주 싸움터가 되어왔다.
<천하제일관(성 아래 입구)>
명(明)나라가 국방을 위해 산해관이란 철옹성을 구축하였으나, 이 산해관 때문에 명나라가 청(淸)나라에 멸망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명나라 말(末)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 1612∼1678)의 50만 대군은 난을 평정하기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고 산해관의 문을 청군에게 열어주었다. 북경을 정복한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이후 오삼계의 군대도 괴멸시켰다.
<천하제일관(성 위)>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만리장성은 장대하다. 그러나 만리장성도 벽돌로 표면을 쌓아 올려 견고한 곳은 수도 베이징에서 가까운 바다링[팔달령(八達嶺)] 등 특별한 곳과 관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장성이 중국인과 야만인들을 구별한려는 권력자들의 정책적인 의지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명나라 때 성벽은 과거와는 달리 요새뿐만 아니라 통상로로도 이용되었으며 관문 주변에는 시장과 도시들이 번성하였다.
<만리장성 위>
<만리장성 밖)
그리고 몇 년 전에 북경부근의 거용관(居庸關)에 갔을 때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적을 방어하며 활(또는 총)을 쏘아야 하는 전사구(箭射口)가 남으로 향해 있었다. 북방민족의 침입을 방어한다는 성(城)이라면 당연히 북을 향해야 하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거용성의 만리장성>
<거용성의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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