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옛 역사를 찾아서(3)
(2018년7월24∼8월1일)
瓦也 정유순
3. 산시성[산서성(山西省)] 불광사와 평요고성(7.27)
포광사[불광사(佛光寺)]는 산시성 우타이셴[오대현(五臺縣)] 동북쪽에서 32km떨어진 불광산(1320m) 산기슭에 있으며 북위 효문제(北魏 孝文帝)시기(471∼499년)에 건조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5대 명찰(名刹)이 되어 명성이 장안(長安)과 돈황(敦煌) 등지와 멀리 일본과 아시아지역까지 널리 알려졌다. 당나라 회창(會昌) 5년(845년)에 무종(武宗)이 불법(佛法)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사원이 파괴되었다가 선종(宣宗)이 계위한 후 불법을 회복하고 사원을 다시 건설하였다.
<불광사 전경>
지금 있는 동대전은 당 선종11년(857년)에 다시 건설한 것이며 문수전은 금나라의 건축이다. 고색창연한 조사탑(祖師塔)은 북위(北魏) 때 불광사 창건 시에 보류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유일한 실물로서 지금 중국에 있는 제일 오래된 고탑이며, 그 외 산문·가람전·만선당·충풍화우루·요동 등은 모두 명·청시기에 건축한 것이다. 불광사는 중국에서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첫날 들렀던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은 바로 이 불광사 대웅전을 모델로 했다고 하며,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불광사 조사탑>
누각(樓閣) 가운데 아래로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대웅전 앞뜰에는 수령 천 년이 지난 소나무 한 쌍이 불광사의 역사와 함께 한다. 현판이 ‘佛光眞容禪寺(불광진용선사)’라고 쓰인 본당 안 전면에는 본존불만 있고 협시불 대신 제자들이 호위하는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와 다른 상황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했으나 불상의 색상이 변한다고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냥 돌아섰다. 또 우리 사찰과 다른 점은 불상 뒤에 있는 후불탱화가 없다는 것이고 건물에 단청(丹靑)을 입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광사현판-불광진용선사>
<불광사 대웅전>
<불광사 천년송>
본당 전각을 우측으로 한 바퀴 돌아본다. 대전 후방에는 천보년간(742∼756) 창건된 팔각전탑(塼塔)은 대기(台基)만이 남아 있다. 대전 후면 벽은 황토로 미장만 되어 있을 뿐 아무런 치장이 안 되어 있다. 한국의 사찰 같았으면 부처의 일생 등을 그려 놓았을 텐데… 올라갈 때 급경사였던 계단이 내려올 때는 경사가 더 급해지는 것 같다. 난간에 의지하여 마당으로 내려오면 화단에는 제철을 만난 나리가 붉게 물들인다.
<불광사 대웅전 후면>
<대웅전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나리꽃>
마당 중앙에는 ‘지은 죄를 씻어주고 수명을 늘여준다’는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를 새긴 당탑(幢塔)이 버티고 서있다. 한국 사찰의 당간지주 보다 덩치가 더 큰 이 당탑은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며 팔대영탑과 함께 거란 등 북방불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미리 준비한 망고와 수박으로 중복(中伏)의 무더위를 달래본다.
<당탑-석경당>
불광사에서 나와 버스로 점심 이동 중 가파른 언덕 위에 사찰이 보여 불쑥 올라가 본다. 지붕에 잡초가 무성한 현묘사(玄妙寺)전각 안에는 비단 옷을 입은 부처(또는 보살)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세상을 자비롭게 바라본다. 헛걸음 했다는 기분으로 가파른 계단을 기어오르며 가끔 뒤돌아보면 눈앞에 바라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자비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현묘사>
<현묘사 불상(또는 보살)>
<현묘사 아래 옥수수밭>
오후에는 여의도 면적의 5배에 달하는 핑야오고성[평요고성(平遙古城)]으로 간다. 산서성(山西省) 진중시(晋中市)의 평요현(县)에 있는 평요고성은 안휘성(安徽省) 서셴고성[흡현고성(歙县古城)], 쓰촨성[사천성(四川省)]의 낭중고성(阆中古城), 윈난성[운남성(云南省)] 리장고성[여강고성(丽江古城)]과 함께 중국의 4대 고성이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입구에는 당서기와 국가주석을 지낸 江澤民(강택민, 장쩌민 1926.8.17∼)과 총리를 지낸 朱鎔基(주용기, 주룽지 1928.10.22∼)의 친필 표지석이 서있다.
<평요고성>
역사가 2,700여 년에 달하는 성벽 안에 명·청대시기에 지어진 사합원 3,000여 채가 있으며, 그중 완벽하게 보존된 저택만 400여 채에 이른다고 한다. 시루(市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4개의 큰 거리, 폭이 넓은 골목 8개, 좁고 굽이진 골목 72개가 그물처럼 연결되며 그 모습을 위에서 보면 팔괘 도안을 닮았다고 한다. 사합원(四合院)이란 사각형의 평면 구조로 건물을 연결하여 외부로부터는 폐쇄적이고 내부적으로 개방적인 독특한 가옥 형태이다.
<성루>
<사합원 구성도-다음캡쳐>
중국에서 장사를 가장 잘하기로 소문난 진상(晋商)이 고성 안에 은행, 포목점, 소금과 곡식을 파는 시장을 두고 살았다. 지금도 4만 여명의 후손이 고성에서의 삶을 이어간다고 한다. 사합원을 개조해 문을 연 레스토랑과 카페, 객잔(客棧) 등이 눈길을 끈다. 그러면서도 상업화에 찌든 기색이 없고, 극심한 호객 행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아서 좋다. 폭이 넓은 골목은 걷기가 수월하지만, 인파가 많아 자전거를 만나면 불편하다.
<평요고성 거리>
그리고 평요고성은 중국 은행의 시초이다. 1823년 이대전(李大全)이란 거부가 은화 30만량을 투자해 뇌리태(雷履泰)와 동업하여 표호(票号)를 세웠다. 당시는 상품 경제의 발달로 유통 물량이 대폭 증가했다. 상업의 결재 수단은 여전히 은화여서, 무거운 은화를 들고 다니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여기서 착안하여 어음을 발행하고 예치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 시작이다. 1840년대에는 일승창(日昇昌)이 가장 번영했을 때로 일본·싱가포르·러시아에까지 사업을 확장했으며, 예치 금액이 은화 3,800만 량에 달했다고 한다.
<일승창(日昇昌)>
일승창이 문을 연 시다제[서대가(西大街)]는 거리에만 22개의 표호가 생겨났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전란이 발생하여 상업이 몰락하고, 청나라 정부가 직접 은행을 설립하면서 일승창도 1914년 도산하였다. 지금은 3개의 정원과 100개의 방으로 이뤄진 일승창을 ‘중국표호박물관(中国票号博物馆)’으로 꾸몄으며, 당시 은행으로써 어음이 거래되었던 자료를 전시한다. 자기앞 수표를 발행하고 위조 방지 목적으로 암호를 사용한 것도 볼 수 있고, 사무실 바닥을 3m 정도 파서 금고로 사용했던 흔적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평요고성 옛 생활모습>
성벽은 BC 1027년경인 서주(西周) 시대에 처음 조성되었다. 원래 흙으로 쌓았던 토성(土城)을 1370년 명나라 때 방어를 위해 증축하면서 벽돌로 견고하게 쌓았으며 높이 12m, 둘레가 6,163m에 달한다. 명·청대에 걸쳐 26번이나 보수를 했다. 1977년 8월 대홍수에도 건재함을 과시하며 중국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완벽한 성벽으로 꼽힌다. 성벽을 따라 72개의 망루가 지금도 늠름한 자태로 우뚝 서 있다.
<성벽>
어느 고성에 가든 최소 하루는 머무르며 야경을 보면서 전통이 서린 객잔(客棧)에서 운치 있는 밤을 보내고, 관광지에서의 일상이 시작되기 전 이른 아침에 골목 산책을 나선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러면서 상술(商術)이 뛰어난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눈요기하는 것도 묘미가 있을 법 하다. 그리고 전통주를 전시하는 술도가를 돌며 쇼핑도 하고 시음(試飮)하는 재미도 쏠쏠 할 것 같다. 안주삼아 음식 맛도 보면서…
<술도가>
<가게 앞의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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