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옛 역사를 찾아서(2)
(2018년7월24∼8월1일)
瓦也 정유순
2. 산시성[산서성(山西省)] 오대산일대(7.25∼26)
삼조당과 비호욕 공중초원 등이 있는 허베이성[하북성(河北省)]은 ‘황하의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호욕을 빠져나와 밭마다 옥수수가 가득하고 남북 길이만 600㎞, 동서로 250㎞나 뻗은 거대한 타이항산맥[태항산맥(太行山脈)]을 남서쪽으로 바라보며 버스는 달린다. 태항산맥의 별칭은 ‘중국의 그랜드 캐년’으로 춘추전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역사적으로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진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루는 태항산맥의 서쪽이 산시성[산서성(山西省)]이다.
<하베이성에서 산시성으로>
<태항산맥과 옥수수밭>
<태항산맥의 풍력발전기>
산시성은 ‘진[晋]’이라고도 부르며, 성도(省都)는 타이위안[태원(太原)]이다. 화베이[화북(华北)] 지구의 서쪽에 있는 성으로, 춘추시대에는 오패(五覇)의 하나였던 진(晋) 나라가 있던 곳이며, 전국시대에는 칠웅(七雄)의 하나인 조(赵) 나라와 위(魏) 나라 등의 영토였다. 진(秦) 나라 때 타이위안군[태원군(太原郡)]·허둥군[하동군(河东郡)]·상당군(上党郡)이 설치되었고, 한(汉) 나라 때는 빙저우[병주(并州)]라고 불렸다. 원(元) 나라 때는 중서성 산시도[산서도(山西道)]에 속하였고, 명·청(明·清) 나라 때 성이 설치되었다.
<산시성지도>
하베이성에서 산시성으로 접어들면 북쪽의 헝산산[항산(恒山)]이 나온다. 항산은 오악 중의 하나로, 북악이라고도 하며 그 높이가 최고봉이다. 산시 성훈위안 현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산맥은 150여 km 이어져 있다. 주봉인 천봉령(天峰嶺)은 해발 2017m 로 구름을 뚫고 높이 솟아 있는 모습은 그 형세가 험악하여 예로부터 군사상 전략적 요지였으며 지금도 옛날의 잔도(棧道)가 남아 있다. 항산은 관광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오후 5시까지만 입장이 가능하여 시간관계상 입구에서 돌아선다.
<항산>
<항산 입구>
항산의 절벽에 매달려 있는 현공사(懸空寺)도 항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차창으로 기이한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현공사는 그 모습이 마치 비취색 병풍 같다 해서 ‘취병산(翠屛山)’이라고 일컫는 단애(斷崖)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현공사의 사(寺)라는 글자만 보고 이곳을 불교 사찰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북위시대를 대표하는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의 제자 이교(李皎)가 491년에 건립한 도교사원으로 각종 도상(道像)과 함께 불상이 안치돼 있다고 한다.
<현공사 원경>
<현공사>
<현공사 뒷산>
중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넓은 땅이라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어제 공중초원에서 중식을 하고 비호욕을 거쳐 잠깐 항산에 들렸더니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우타이현(五台县, 오대현)에서 하룻밤 의탁하고 조반을 마치자마자 우타이산[오대산(五台山)]으로 이동한다. 산 중턱 대형주차장에서 소형버스로 바꿔 타고 다시 정상으로 질주한다. ‘화북지방의 지붕’이란 뜻의 華北屋脊(화북옥추)라고 쓰인 하얀 문을 통과하여 북대(北台)의 엽두봉(葉斗峰)에 도착한다. 특이하게도 동, 서, 남, 북, 중으로 이뤄진 5개 봉우리 모두 정상이 평평하여 오대산이라 불린다.
<오대산정상입구-화북옥추>
<오대산 엽두봉>
<오대산의 연봉들>
엽두봉(3061m)에서는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교사찰이 아니고 도교계통의 용왕전(龍王殿)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용왕전은 보통 섬이나 해안가 등에서 볼 수 있는 전각인데, 3000m가 넘는 오대산 북대의 엽두봉에 위치하는 것이 신기하다. 밀려오는 사람들에 의해 밀리다시피 빠져나와 정상주변을 산책한다. 민들레를 비롯한 야생화들이 나무가 없는 삭막함을 대신 달래준다. 꽤 너른 정상부위를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아 마지막으로 무구문수보살(無垢文殊菩薩)을 모신 북대정영응사(北台頂灵應寺)를 둘러보고 산 아래로 내려온다.
<오대산 용왕전>
2009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대산 산중에 1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북위·당·송·원·명·청 등 6개 왕조를 거치면서 조성된 53개의 사찰이 있고 산기슭의 타이화이전[대회진(臺懷鎭)]에도 많은 사찰이 집중되어 있으며 세계의 불교도가 순례하는 영지가 되었다. 원대(元代)에는 라마교가 들어왔으나 청대(淸代)에 이르자 몽골족과 티베트족에 대한 대책으로 특히 라마교를 중시하여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특히 신라의 혜초(慧超, 704∼787)가 이 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대산 정상 표지>
<티베트풍의 타르쵸>
신라에 화엄사상을 처음 소개한 자장율사(慈裝律師)도 우타이산[오대산(五台山)]에서 문수보살 앞에 기도하고 가사(袈裟)와 사리(舍利)5과를 받아 양산의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영월 법흥사, 태백의 정암사 등에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을 건립하였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곳이다.
<북대정영응사>
<오대산자락의 사찰들>
오후에는 보살정(菩薩頂) 후문으로 향한다. 영취봉(靈鷲峰)위에 위치한 금빛 찬란하고 화려한 보살정은 오대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라마사원이다. 북위(北魏)왕조 때인 470년 정도에 신축된 보살정은 최초에 대문수원(大文殊院)이라 했다가 631년 당(唐)나라 때 스님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진용원(眞容院)이라 개명했다. 그 뒤 송(宋)나라 때 문수상을 공양하고 봉진각(奉眞閣)이라 했다가 명(明)나라 때 보살정이라 이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살정 대문수전 보살상>
보살정은 청(淸)나라 때 최고의 번성을 누린다. 1656년 청나라 순치(順治)제가 어명을 내려 보살정을 라마사원으로 고쳐짓고 황제는 물론이고 몽골족과 티베트족 종교두령들도 오대산을 방문할 때 보살정에 묵게 하였다. 강희(康熙)제는 1683년에 대웅보전을 비롯한 보살정에 황실건물만이 누릴 수 있는 노란 기와를 얹게 하여 오대산에서 최고 명물을 만들었다. 넓은 부지에는 크고 작은 건물 110여 채가 틈새 없이 꽉 찬 구도를 자랑하나 여백의 미는 없어 보인다.
<보살정 황금색의 대웅보전>
108계단 맨 위에는 기둥 네 개가 받혀주는 3층 목조건물 패루(牌樓)에는 강희제가 친필로 쓴 “영봉승경(靈峰勝境)”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08계단 맨 밑에는 대조벽(大照壁)이 자리한다. 108계단을 하나씩 밟을 때마다 마음속의 만 가지 근심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리고 화엄사상의 본거지인 현통사로 자리를 옮긴다.
<강희제 친필의 영봉승경>
<108계단>
현통사(顯通寺)는 오대산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서기 68년[동한 영평11(東漢 永平11)]에 지어졌고, 1899년[청 광서25(淸 光緖25)]에 청나라가 중건하였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사원으로 낙양(洛陽)의 백마사(白馬寺)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사찰 중의 하나이다. 현통사의 대웅보전은 불사를 거행하는 주요한 장소이며 전내(殿內)에는 석가모니∙아미타불∙약사불상을 모시고 있다.
<현통사 대웅전>
현통사 무량전(無量殿)은 벽돌을 쌓은 구조로 안에는 동(銅)으로 주조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봉안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身,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인 법신불(法身佛)이며,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이는 신심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보인다는 것이다. 무량전은 대들보가 없는 매우 독특한 구조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하며, 동전(銅殿)은 청동 건축물로 만여 개에 달하는 소불상들이 있는 매우 보기 드문 청동제 문물이라고 한다.
<천발문수전>
<천발문수보살>
현통사를 둘러보고 백탑광장을 지나 메밀가루반죽으로 보살상을 빚었다는수상사(殊像寺)로 향한다. 수상사의 본당은 문수전(文殊殿)이다. 한국에서는 문수보살이라고 하면 대부분 불화 속에서 볼 수 있으며, 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흔치 않다. 그러나 이곳 중국의 오대산에는 어느 사찰을 가든지 문수와 보현보살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명나라 때 건축 되었으며, 이곳은 2004년 6월 한국 오대산 월정사와 자매결연(姉妹結緣)을 맺었다고 한다.
<수상사 문수전>
<수상사 문수보살>
그리고 문수사의 후원에서 점토로 토불(土佛)을 제작하는 과정을 보았는데 이는 흙 속에 생명을 불어 넣는 숭고한 작업이었다. 움직이는 손끝마다 장인들의 신심이 묻어나는 것 같다. 아직 미완이지만 광배(光背)가 더욱 빛난다. 이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자체가 행운이며 이번 여정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서산(西山)에 걸린 구름도 ‘山(산)’자를 그린다.
<토불 제작 장면>
<'山(산)'자를 그린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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