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다섯 번째-1)

와야 정유순 2018. 6. 27. 23:11

​​​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다섯 번째-1)

(삼강나루구미시 도계면, 201862324)

瓦也 정유순

   오늘의 출발점인 삼강나루로 가기 전에 먼저 내성천이 끼고 흐르는 회룡포를 관망하는 회룡대로 가기 위해서는 비룡산(飛龍山)을 넘어야 하고, 장안사(長安寺)를 거쳐야 한다.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비룡산장안사(飛龍山長安寺)는 신라 경덕왕 때(759) 운명조사가 국태민안을 염원하며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장안사는 세 곳이 있는데, 위로는 금강산, 아래로는 양산, 그리고 중간지점인 예천의 비룡산에 있다.

<회룡포 지도>


   근래에는 두타(頭陀)라는 젊은 승려가 전국을 행각하던 중 다 허물어진 장안사를 보고 혼자 괭이로 산길을 내고 우마차로 들보를 옮기며 새롭게 가람을 중수하는 모습에 마을주민들이 감복하여 불사를 도와 마침내 장안사의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신도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자 스님 두타화상(頭陀和尙)은 올 때 그 모습으로 걸망 하나만 매고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장안사 대웅전>


   대웅전 화단에는 백합(百合)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나리가 붉게 피었다. 나리꽃의 나리는 당하관(堂下官)의 벼슬아치를 높여서 부르던 호칭과 같은 말이다. 영산전(靈山殿) 앞으로 하여 한 계단 위로 올라오면 용왕바위와 용왕각이 자리한다. 용이 웅비하는 형상의 산 비룡산(飛龍山, 240)이 있고, 용왕바위가 있으니 이곳의 지명을 용궁(龍宮)이라 할만하다.


<붉은 나리>

<용왕바위>


   석불좌상을 둘러보고 김종서 성삼문부터 도종환 나태주까지 시화(詩畵)가 나열해 있는 희망의 200계단을 올라 회룡대(回龍臺)에 오른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회룡포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광경이 마치 용이 비룡산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가면서 물을 휘감아 돌아가는 형상인지라, 지금 회룡대에 서있는 내 마음은 용의 등에 올라 하늘로 비상(飛翔)하는 것만 같다.

 <석불좌상>

<회룡포>

 

   붕 떠 있는 마음을 추스르고 계단을 따라 회룡포로 내려온다. 내리막 끝 지점에 있는 어느 가정집에는 왕보리수열매가 손길을 기다린다. 주인아주머니는 우리 속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마음껏 따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욕심 같아서는 다 따먹고 싶지만, 막상 한 주먹 따서 먹고 나니 더 이상 손이 안 올라간다. 원래 서리라는 것은 주인 몰래 따먹는 재미가 쏠쏠한 것을

<왕보리수 열매>


   회룡포마을로 들어가려면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뿅뿅다리는 기존에 놓여 있던 외나무다리 대신 강관과 철 발판을 이용하여 다리를 놓았는데, 마을주민들이 이 다리를 이용하면서 발판구멍으로 물이 퐁퐁 솟는다하여 퐁퐁다리로 불렀으나 1998년도에 매스컴에 뿅뿅으로 잘못 보도되었고, 이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지금의 뿅뿅다리가 되었단다.

<제2뿅뿅다리>


   뿅뿅다리는 폭이 좁아 교행이 어려운 난간(欄干)이 없는 외다리로 다리가 고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흐르는 강물에 흔들리는 착시현상을 일으켜 어느 출렁다리 못지않게 긴장감을 안겨 준다. 고운 모래 위로 흐르는 강물에는 물고기들이 꼬리치며 물살을 가를 때마다 악동 같은 장난기를 일으키게 하는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제1뿅뿅다리>


   강물이 휘감아 돌아 육지 속의 섬마을이 된 회룡포(回龍浦)는 명승 제16(20058)로 지정되었다. 강물이 350도 휘감아 돌아나가서 마을 주위에 고운 모래밭이 펼쳐지며, 산과 강이 태극모양의 조화를 이룬다. 원래 의성포(義城浦)마을이었는데, 경북 의성군과 이름이 겹쳐 회룡포마을로 아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회룡포마을 표지석>


   제2뿅뿅다리로 회룡포에 들어가 마을을 가로질러 제1뿅뿅다리로 나오면서 펼쳐지는 모래와 강물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노래로 변주되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절경에 취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몸통을 오늘의 출발지인 삼강나루로 바삐 이동한다.

<회룡포 백사장>


   삼강교에서 막 출발하여 낙동강 하류로 내려가는데 길이 막힌다.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서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로 건너가는 길목을 교량공사로 폐쇄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버스로 로 이동한 이목리는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강 주변으로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이목리에는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여 꽃개라는 마을이 있고, 마을 앞 강변에 검은 바위가 있다하여 금포라는 마을이 있으, 큰 흰 바위가 있다하여 백포라는 마을도 있다고 한다.

<이목리 전경>

<금포마을 표지>


   문경시 영순면에서 영강(潁江)을 건너면 상주시 사벌면이다. 영강은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문경시를 동서로 가로질러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에서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사벌지역은 옛날 사벌국(沙伐國)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였으나 신라 첨해왕(沾解王)에게 정벌되어 사벌주(沙伐州)라 불렸고,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사벌면이 되어 상주시의 동북부에 위치한다.

<낙동강변의 사벌국 표지> 

 

   상주는 경상도(慶尙道) 명칭을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에서 한자씩 따와서 지은 것만 봐도 이 고을의 역사적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 정기가 속리산에서 뭉쳐 있다가 동남으로 뻗어 내려 병풍처럼 둘러쳐져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낙동강(洛東江)이 대지를 적시어 땅이 기름진 곳이다. 즉 서북쪽은 산지여서 지세가 높고 동남쪽은 들녘이 발달하여 넉넉한 품으로 사람을 끌어안는다.

<낙동강-상주>


   한마디로 산··들이 어우러져 함께 숨 쉬는 명품고장이다. 상주의 옛 이름이 낙양(洛陽)이었는데 이곳의 동쪽으로 강이 흘러 낙동강이라 하였고, 또한 이곳에 고령가야(또는 가락국)이 있던 곳이라 낙동강이라 한다. 그리고 상주에서는 낙동강 칠백리라고 하는데 이는 상주에서부터 낙동강이 시발점이라 하고, 상류지역의 하천은 강()이 아니고 네성천, 반변천 등 내()로 표현했다고 한다. 

<상주의 산과 강과 들>

<낙동강칠백리 표지석>

 

   상주는 예부터 너른 들녘 덕택인지 쌀, 목화, 누에고치 등 세 가지 하얀 것이 유명하여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했으며, 지금은 목화 대신 곶감이 자리를 하고 있다. 기름진 땅에서 재배되는 상주 쌀은 질이 좋아 임금님 진상품이었고, 상주시 함창(咸昌)은 신라시대부터 명주산지로 이름난 곳으로 지금도 가을이면 명주장이 선다고 한다. 

<상주 함창의 명주베틀 벽화>


   사벌면 퇴강리를 지나면 어풍대(御風臺)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어풍대는 조선 중기 문신인 이재 조우인(頤齋 曺友仁, 15611625)이 승지(承旨) 관직을 마무리하고 이곳 매호(梅湖)로 낙향하여 남쪽에는 임호정(臨湖亭)이란 정자를 두고 이곳을 어풍대라 하였다. 매호리 앞을 지나는 낙동강은 잔잔하게 흐르는 숨결 같은 호수이다.

<어풍대 표지석>


·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은 조우인은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했다가 그 글로 말미암아 3년간 옥에 갇혔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작품으로는 이제영언(頤齋詠言)이 있다.

<낙동강(매호)>


   상주와 예천군 풍양을 연결하는 상풍교(尙豊橋)를 지나고 매호평야를 지나면 경천대(擎天臺)로 접어드는 숲길이 나온다. ‘하늘을 떠받든다.’는 경천대의 옛 이름은 자천대(自天臺)하늘이 스스로 만든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낙동강 1,300여 리 물길 중 제1경으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이곳은 깍아지른 절벽과 노송으로 이루어진 절경이다.


<경천대>

<경천대 비>

   지금의 이름 경천대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불모로 심양으로 끌려갈 때 7년간 수행했던 우담 채득기(雩潭 蔡得沂, 16041646)가 낙향하여 무우정(舞雩亭)을 짓고 머물면서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라는 경천대비를 세운 후 경천대로 불리었다고 한다. 우담은 충북 충주출신으로 역학·천문·지리·음룰·병서 등에 조예가 깊었다. 32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지금의 상주에 들어와 무우정을 세우고 두문불출하면서 독서에 전념하였다. 

<무우정>

 

   무우정 아래 선착장에는 놀이 배 출입이 분주하고, 그 위로는 2001MBC가 창사 40주년 기념드라마 <상도>촬영 세트장이 있어 찾는 손님이 줄을 잇는다. 출렁다리를 건너 강변 계곡숲길을 따라 걷다가 큰길로 나오면 상주자전거박물관이 나온다. 상주는 역시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더 많은 도시다. 낙동강을 끼고 형성된 넓은 평야와 풍요로운 지역으로 자전거 타기에 더 없이 좋은 입지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상주자전거박물관 전경>


   1925년 경북선 상주역 개설기념으로 개최된 조선팔도전국자전거대회는 일제가 조선 사람에게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는데, 조선 최고의 선수 엄복동이 우승을 하고 상주출신 박상헌이 우수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상주에서는 자전거 타기 붐이 조성되었으며, 오늘날 전국 최고의 자전거도시가 될 수 있는 기반을 일찌감치 마련했다고 한다. 


<상주자전거박물관 조형물>

<자전거를 형상화한 경천교>

 

   자전거박물관을 지나면 낙동강생물자원관이 나온다. 낙동강생뭉자원관은 최근 기후변화와 개발사업 등으로 인하여 멸종하거나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담수생물자원의 발굴과 관리와 보전을 위한 대책마련이 필요하고, 2011년에 발효된 나고야의정서의 이행과 국제사회의 생물자원화와 산업화 추세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따라서 미개척 생물분류군을 중심으로 담수생물종을 신규 발굴하여 증거표본을 확보하고 생물주권 확립에 기여함은 물론 생물자원의 실용화 및 산업화 지원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곳이다.

<낙동강생물자원관 표지석>

<낙동강생물자원관>


   생물자원관과 경천섬공원 입구를 지나면 도남서원이다. 도남서원(道南書院)1606(선조 39) 상주시 도남동에 창건되었으며 1676년에는 숙종(肅宗)으로부터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797(정조 21)에는 동·서재를 건립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92년 지역 유림들이 힘을 모아 강당 등을 건립하였고, 2002년부터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 졌다. 이 서원에서는 정몽주·이황 등 아홉 분의 향사를 음2월과 8월 하정일(下丁日)에 지낸다.

<도남서원>

<경천섬> 

 

   도남서원을 나와 하류로 걸으면 큰 다리 같기도 하고 큰 댐 깥기도 한 낙동강 최상류에 있는 상주보가 버티고 있다. 상주보는 4대강사업으로 시작하여 길이 540, 511규모로 탄생했다. 자전거만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공도교를 통해 상주보 우안에서 좌안으로 건너간다. 수질오염문제로 보를 개방했지만 보() 안의 가장자리에는 녹조(綠藻)들이 물살에 출렁인다. 벼 포기 실하게 뿌리를 내린 논길을 따라 강창교 하천공원에 다다르니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상주보 공도>

<상주보 전경>

<낙동강의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