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충주 비내길과 고구려 비

와야 정유순 2018. 6. 21. 03:55

충주 비내길과 고구려 비

(2018619)

瓦也 정유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중원(中原) 땅으로 불리었으며, 남한강을 끼고 있는 삼국시대 요충지로 중원 땅을 차지하는 국가가 강성했던 상징의 땅이 충주(忠州)였다. 또한 충주(忠州)의 충()은 한반도에서 삼국의 중심(中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가 차지했을 때에는 국가의 근본이라는 뜻의 국원(國原)으로 불리었던 지역이다.

<충주지도>


   이러한 충주에는 중원문화길, 새재넘어 소조령길, 반기문꿈자람길, 대몽항쟁길, 종댕이길, 하늘재길, 사래실가는길, 비내길 등 충주풍경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중 충주시 앙성면에 있는 비내길을 찾아 길을 나선다. 앙성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앙암면(仰岩面)과 복성면(福城面)에서 ()’자와 ()’자를 따 앙성면(仰城面)이 되었으며, 남한강을 따라 경치가 수려하고, 탄산온천으로 유명하며 한우와 복숭아가 입맛을 돋운다.

<비내길 행보도>


   서울 양재역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앙성온천광장에 1시간 20여분 만에 도착한다. 비내길은 이 온천광장이 시작점이자 끝나는 지점으로 두 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양지말산을 중심으로 강변을 걷는 7구간으로 두 시간이 소요되며, 2코스는 새바지산 임도, 비내마을, 비내섬 구간을 더해 총연장 14구간으로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준비운동을 끝내고 앙성온천광장을 출발하여 새바지산(281.6)을 들머리로 하여 임도로 접어든다.

<앙성온천광장>


   비내길에는 충주 출신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6)의 시화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 달래강 옛 나루에, 그림, 목계장터등 글과 그림으로 작품화한 시화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특히 1987년에 발표된 장편시집인 <남한강>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명품 비내길>

<신경림의 시화판>


   초입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전망대까지는 걷기가 좋았는데, 몇 구비 돌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홍수 후에 물 빠진 도랑처럼 불규칙한 자갈들이 너덜 길을 만든다. 경사가 좀 급한 곳에서는 미끄러질 위험도 도사린다. 첩첩이 싸인 산 중 밭에는 담배 잎이 무성하고, 흐드러지게 핀 밤꽃 향에 취해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멀리서 보면 감자 꽃 같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무 밭에 하얀 장다리가 피었다.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는 앙성면 조촌리 비내마을을 지키며 재 넘어온 나그네 이마의 땀을 씻어 준다.

<임도 올라가는 길>

<담배 밭>

<장다리 꽃(무꽃)>

<느티나무>


   비내마을에서 오작교 같은 다리를 건너면 비내섬이다. 비내섬은 태백시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흘러 내려오는 남한강을 타고 켜켜이 쌓여온 토사가 이루어진 섬으로 일종의 하중도(河中島)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갈대를 비내(베어낸다)’는 어원에서 비내도가 되었다고 한다. 섬 안에는 갈대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도 키가 무성하다. 멸종위기종 2급인 단양쑥부쟁이도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비내섬>

<비내섬가는 다리>


   정해진 길을 따라 비내섬을 나와 남한강 변 비내길로 접어든다. 먼 옛날 같았으면 경향(京鄕)으로 오고 갈 배들로 분주했을 나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곳 출신 신경림은 <목계장터>라는 시 첫 연에서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이하생략) 육상교통의 발달로 쇠락해 버린 뱃길을 바라보며, 구름과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세상인심을 바라보며 남한강의 서정과 서민들의 심정을 독백처럼 읊조렸다.

<남한강>


   나무계단 옆 목책에는 지난겨울 추위를 버텨낸 붉은 인동(忍冬)’이 쳐다보는 사람 없어도 혼자 얼굴을 붉힌다. 맑고 깨끗한 남한강 비내섬에는 철새들의 도래지로도 유명하다. 원앙이 물길을 따라 헤엄치고, 큰고니(백조)는 수면 아래 물갈퀴를 쉬지 않고 움직여 고운자태를 유지하며, 청둥오리도 짝을 지어 세상을 희롱하고, 백로와 왜가리는 텃새로 자기의 몫을 단단히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왜가리만 목을 길게 뽑는다.

<붉은 인동초>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앙성천(仰城川) 합류하는 지점 봉황섬에는 초목들이 밀림을 이룬다. 저 숲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저마다 존재의 가치를 실현하며 공존(共存)하는 평화의 세상일까? 뭇 생명들의 어울림은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철새전망대공원을 돌아서면 앙성면 용포리 둔터고개에서 발원하여 능암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앙성천이 나온다.

<봉황섬-남한강과 앙성천 합류>


   앙성천 하구의 비내길 전망대 앞에는 커다란 수탉 벼슬처럼 생긴 바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바위는 먼 옛날 마고할미가 수정을 치마에 싸서 들고 가다가 실수로 떨어뜨려 생긴 바위라고 전해온다. 그래서 그런지 바위의 영험이 있어 예로부터 벼슬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찾아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위에는 김씨 처녀의 소원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정승까지 지낸 조선비와의 애틋한 사랑이 수정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벼슬바위>

<앙성천>

 

   이팝나무와 산수유가 가로수로 늘어선 앙성천 제방을 타고 상류로 한 시간여를 걸으면 앙성온천광장이 나와 비내길 걷기를 마감한다. 약간 늦은 점심을 하고 1979년 발견된 고구려비를 보기 위해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고구려비전시관으로 이동을 한다. 전시관은 충주고구려비를 전시한 <고구려의 천하 관>과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된 <안악3호분 벽화 관>, 세계 최초의 철갑전사인 <개마무사 관>으로 구분하였다.

<앙성천 제방>

<옹기전>


   국보 제205(19813)로 지정된 충주고구려비는 마을 어귀에 아주 오래전부터 돌기둥 하나가 서있어서 마을이름이 입석마을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돌기둥을 대장간 집 기둥으로 쓰기도 하고, 돌에다 떡을 바치며 득남을 원하기도 하여 마을을 지키는 수호석(守護石)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9년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하여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충주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우리 고대사를 푸는 열쇠로 만주부터 남한강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준다. 또한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그리고 삼국 간의 정치적 관계와 문화적 교류,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줌은 물론 절사(節賜), 절교사(節敎賜) 등 이두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라의 이두(吏讀)가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추정한다.

<충주 고구려비>


   <안악3호분 벽화 관>은 북한 국보 제28호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57년 제작된 고분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 중 가장 크다. 무덤의 규모와 짜임새, 벽화의 구성, 표현방법이 뛰어나 4세기 중엽 고구려 문화를 복원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문간방과 2개의 곁방, 널방 등 4개의 방에 자 회랑을 갖춘 33규모다. 벽화는 각종 생활도와 250여명으로 구성된 대형행렬도가 장관을 연출한다.

<안악3호고분 내부 평면도-네이버캡쳐>

<고분 벽화의 견우직녀도>

<대형 행렬도>


   <개마무사(鎧馬武士)>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사람과 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철철편(鋼鐵鐵鞭)을 가죽으로 이어붙인 철갑(鐵甲)을 착용하고 긴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함으로써 기동성과 공격력에 단단한 방어력을 부가하여 그 위용과 기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활용한 것은 우수한 철기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서양보다 천 년 앞서서 말까지 갑옷으로 무장시켰다는 것은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했다는 증거이다

<전시관 내의 개마무사 상>

<천등산휴게소의 개마무사 상>


   삼족오(三足烏)는 태양에 살면서 천상의 신들과 인간세계를 연결해주는 신성한 상상의 길조(吉鳥)인 동시에 세 발 달린 검은 새로 천손(天孫)의식이 깊은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또한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양사상은 한민족의 원형적 사유구조라고 볼 수 있어 해와 달 하늘과 땅을 근본으로 삼아왔다. 전시관 입구에 세운 삼족오 조형물과 전시실 안에 있는 태양 속의 삼족오를 보며 만주 벌판을 누볐을 광개토대왕의 위용을 다시 생각하면서 중원 땅 충주를 뒤로한다.

<전시관 안의 삼족오>

<전시관 입구의 삼족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