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네 번째-2)

와야 정유순 2018. 5. 31. 02:29

 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네 번째-2)

(부용대삼강나루, 2018527)

瓦也 정유순

   낙동강 답사를 위해 연속 이틀을 잔 곳이 예천(醴泉)이다. 예천은 유교경전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 나오는 구절 天降甘露 地出醴泉”(천강감로 지출예천-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단술이 솟는다)에서 따온 지명으로, 이중환(李重煥, 16901756)<택리지(擇里誌)>에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물이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라 했다. 따라서 물맛이 감주(甘酒)처럼 단맛이 나는 샘이 있어서 얻은 지명 같다.

<예천의 아침>


   이러한 영향이 있어서 인지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면을 현재 경상북도청신도시(慶尙北道廳新都市)로 묶어 신도시 조성 마무리단계에 있으며, 이미 경상북도청과 경상북도의회, 경상북도교육청은 20162월에 이전해 왔고, 경상북도지방경찰청은 20187월에 이전한다. 그리고 도청과 관련된 기관들도 순차적으로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천은 안동과 더불어 앞으로 도청신도시의 배후로 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기대되는 곳이다.

<경상북도청-네이버캡쳐>


   우선 예천에 온 김에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초간정으로 간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143, 198585)로 지정된 초간정(草澗亭)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을 저술한 조선 중기의 학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1582(선조 15)에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후손들이 여러 번 고쳐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70(고종 7) 후손들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초간정>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단군조선 이래 조선선조까지의 사실(史實인물·문학·예술·지리·국명·성씨·산명(山名목명(木名화명(花名동물명 등을 총망라하여 원()나라 음시부(陰時夫)<운부군옥(韻府群玉)>의 예에 따라 운자(韻字)의 차례로 배열·서술하였다. 초간정에 보관해오다가 지금은 예천권씨 초간종택에 장서고인 백승각(白乘閣)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금곡천>

<금곡천 출렁다리>


   금곡천이 휘감아 흐르는 암반 위에 올려놓은 듯 지은 초간정은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증거로 초간정사(草澗精舍)’ 현판이 걸려 있다. 후손인 청대 권상일(淸臺 權相一)초간정사술회(草澗精舍述懷)’에서 공손히 손 씻고 선조의 남긴 책을 펼치니(我來盥手披遺卷 아래관수피유권) 의기로운 마음은 정녕 시들지 않으리라(盈溢巾箱政不貧 영일건상정불빈)”고 하며 시냇가 풀잎 푸르디푸르러 세속에 물들지 않은 조상의 얼을 마음에 새긴다.

<초간정사>


   초간정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예천 금당실송림으로 이동한다. 천연기념물 제469호인 금당실송림은 오미봉(207) 밑에서 용문초등학교까지 800에 걸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원래 이 송림은 2가 넘는 송림이었으나 1892년 마을 뒷산인 오미봉에서 몰래 금을 채취하던 러시아 광부 두 명을 마을 주민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심 끝에 마을의 공동 재산이었던 소나무를 베어 러시아 측에 배상금으로 충당하는 바람에 솔숲이 줄었다고 한다.

<금당실 송림 표지석>

<금당실 송림>


   용문면사무소가 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은 예부터 마을의 금곡천에서 사금(砂金)이 있었다 하여 금당실이라 불린 마을로 조선시대 전통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연화부수형의 형국으로 북쪽의 매봉, 서쪽의 국사봉, 동쪽의 옥녀봉, 남쪽의 백마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으로 매봉이 조산(祖山)이 되고 그 뒤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내룡(來龍)이 되어 연못을 상징한다고 해서 금당(金塘)이라고도 한다.

<용문면사무소>

<추원재(追遠齋) 및 사당(祠堂)>


   마을의 집집마다 사람이 사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적막감이 흐른다. 마을의 보호수 느티나무는 500년 넘게 당산을 지키고, 한 때는 학생 수가 천 명이 넘었다는 초등학교는 지금은 5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도 예전부터 자리 잡았던 꽃들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향을 피운다. 금당실 주막 주모는 천주교 용문공소에 주일예배 보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청사초롱 깃발만 펄럭인다.

<수령 500년 이상 된 느티나무>

<용문초등학교>

<금당주막>

<천주교 용문공소>


   용도천문(龍跳天門, 용이 뛰어 하늘 문에 이른다)의 고향 용문면 죽림리에는 예천권씨 초간종택(醴泉權氏 草澗宗宅)이 있다. 보물 제457호인 초간종택은 조선 전기의 별당으로 초간 권문해의 조부 권오상(權五常)15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4,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건물을 바라볼 때 오른쪽 3칸을 대청으로, 왼쪽 1칸을 온돌방으로 꾸몄다. 중요한 것은 초간정에 보관해 오던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이곳 백승각으로 옮겨와 보관하고 있다.

<용도천문>

<예천권씨 초간종택>

<백승각-네이버캡쳐>


   기왕에 내친김에 모래로 유명한 내성천변의 선몽대로 이동한다. 명승 제19호로 지정된 선몽대(仙夢臺)1563(조선 명종 18) 퇴계 이황의 종손인 우암 이열도(遇巖 李閱道: 15381591)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꿈을 꾸고 난 후 1563년에 지은 정자이다. 앞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의 내성천(乃城川) 백사장이 내려 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주변 풍광이 가히 절경이다.

<선몽대 원경>

<선몽대 전경>


   건물 중앙에는 유선몽대(儒僊梦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꿈에 신선(神仙)을 보는 곳이 아니라 꿈에 선비가 춤추는 곳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신선이나 선비가 꿈속에 춤을 춘다는 것은 모두 신선에 해당할 것이다. 선몽대 안에는 이황의 친필 편액과 정탁, 류성룡, 김상헌, 이덕형,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새겨진 목판이 걸려 있고, 매년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동제(洞祭)가 열리며, 예천군 및 진성이씨 백송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유선몽대>

<내성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몇 군데 돌아보고 바삐 안동시 풍천면 도양리 부용대 입구인 광덕교 아래부터 낙동강 걷기를 시작하여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예천군 지보면으로 접어든다. 지보면(知保面)은 북부가 나부산(羅浮山, 330m)을 비롯하여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지역은 연화산(連花山, 267m) 등의 낮은 산지와 구릉 및 평탄지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이며 고추·마늘 등의 채소류와 특용작물인 깨가 산출되고, 사과·감 등의 과수재배가 성하다.

<예천 지보면의 낙동강>


   오후에는 풍지교부터 걷기를 시작한다. 예천의 풍양과 지보의 이름 첫 자를 따서 풍지교를 만들었는데, 오랜 세월 사람의 발에 밟히고 자동차에 눌려 이제는 사람들만 다닌다. 그리고 옆에 새로 만든 지인교는 보라는 듯이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강둑을 따라 어제부터 내내 따라온 금계국도 발걸음에 맞춰 살랑거린다. 멀리 예천 삼수정 회화나무가 쉬어가라 손 짓 한다.

<풍지교>

<낙동강 길>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인 삼수정(三樹亭)은 강물이 굽이도는 강안(江岸) 마을 등성이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옆면 2칸이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고, 1420년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며 1636년에 없앴다가 다시 중건하였다.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다시 지었다. 자리도 3번 옮겼지만 1909년 원래의 위치로 환원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6(2005620)로 지정되었다.

<예천 삼수정>


   회화나무는 한자로는 괴화(槐花)나무로 표기하는데 발음은 중국발음과 유사한 회화로 부르게 되었다. 홰나무를 뜻하는 한자인 ’()자는 귀신과 나무를 합쳐서 만든 글자이다. 회화나무가 사람이 사는 집에 많이 심은 것은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 부근에 많이 심었다. 그리고 서원이나 향교 등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당에도 회화나무를 심어 악귀를 물리치는 염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예천 삼수정 회화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이 되었다. 영문명으로는 차이니즈 스칼라 트리(Chinese scholar tree)라고 한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흔히 선비나무 또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부른다. 이 나무의 기상이 학자의 기상처럼 자유롭게 뻗었을 뿐 아니라 주나라 사()의 무덤에 이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유교 관련 유적지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회화나무를 볼 수 있다.

<예천 삼수정 회화나무>


   삼수정을 지나면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에 접어든다. 쌍절암은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이 곳 동래정씨 집성촌에 침입하여 따라오는 왜병을 피해 두 여성이 두 손을 맞잡고 낙동강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킨 곳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듣고 왕명으로 정려(旌閭)를 짓게 하고, 비문과 쌍절각(雙節閣)을 세워 정절을 기리고 있다.

<쌍절암 설명문>


   데크로드로 연결된 쌍절암 생태숲길은 낙동강에 접한 단애(斷崖)로 코끼리바위, 멧돼지바위 등 기암들이 즐비하고 대동정(大同亭) 같은 쉼터도 만들어 놓아 산책하며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을 전망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낙동강 해돋이가 환상적이라는 조그만 암자인 관세암이 있지만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했다.

<코끼리바위>

<멧돼지바위>

<대동정>


   생태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비룡교가 나온다. 비룡교는 예천 삼강주막에서 회룡포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 280m, 5m의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교량으로 20128월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이 다리만 건너면 내성천 회룡포(回龍浦)가 바로인데, 건너지 못하고 바로 도착한 곳은 삼강절경인 삼강나루터이다.

<비룡교>


   삼강절경(三江絶景)은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만나 삼강이 화합하여 흘러가는 곳으로 낙동강의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과 수령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가 있어 주변의 뛰어난 자연경관과 절경을 이룬다. 삼강나루는 문경의 주흘산맥과 안동의 학가산맥, 대구 팔공산의 끝자락이 만나며, 내성천과 금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여 수륙교통의 요충지였다.

<삼강절경>

<삼강주막>


   또한 삼강나루는 서울로 장사하러 가는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나 선비나 장꾼들이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갈 때, 반드시 거쳐 가던 길목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을 이어주는 나룻배 두 척이 오갔었는데 큰 배는 소와 물류를 수송했고, 작은 배는 15명가량의 사람을 태워 건넜다. 우리도 낙동강 네 번째 여정을 마치고 삼강나루를 건너간다.

<삼강대교-삼강나루터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