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驪江)과 영∙녕릉(英∙寧陵)
(2018년 6월 6일)
瓦也 정유순
오늘은 현충일(顯忠日)!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을 맞이하여 걷기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한국걷기동호회연합’ 5개 동호회 회원 200여명이 여주 여강 길 2코스와 3코스에서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합 클린걷기를 실시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시(驪州市)에 있는 한강문화관으로 아침부터 일찍 모인다.
<한강문화관>
한강문화관은 ‘오천년 풍류를 누리다’를 주제로 물길 위에서 풍류의 나눔과 소통을 나누던 선조들의 이야기와 함께 다양한 지역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2012년 4월 15일 개관했다. 그리고 이천보, 여주보, 강천보 등 한강의 보와 충주댐과 팔당댐을 연계운영 하여 안정적인 한천관리를 위해 설립된 ‘수자원공사 한강보관리단’이 한강문화관 내에 함께 있다.
<강천보의 아침>
여강(驪江)은 경기도 여주군을 관통하는 남한강을 일컫는다. 남한강이 강원도 원주에서 흘러나오는 섬강(蟾江), 용인에서 발원한 청미천(淸渼川)과 만나는 지역이 바로 여주의 점동면 삼합리(三合里)이기 때문에 여주시에서는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곧 한강 상류이며 여주 북쪽에 있다.”고 하여 ‘여주를 지나는 한강’을 여강으로 불렀다.
<여강>
한강문화관에서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우리가 담당할 여강 3코스 시작점인 강천마을회관으로 이동한다. 강천(康川)마을은 원래 강원도 원주 땅으로 남한강과 섬강의 합류지점이며, ‘배가 편안하게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강천’으로 유래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강천면이 경기도 여주 땅이 되었다.
<강천마을 여강길3코스 안내>
마을에 당도하여 강둑을 따라 저마다 쓰레기 집게와 봉투를 지참하고 길을 나선다, 강 안쪽으로 수초가 잘 발달된 굴암늪이 있고, 강 건너에 강천섬이 보인다. 강천섬은 처음부터 존재한 섬이 아니다. 남한강 물이 불어나면서 육지와 분리되던 퇴적한 지형을 4대강 사업을 통해 조성된 인공 섬이다. 현재는 잘 관리된 공원과 적당히 방치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 같으나 섬 중앙으로 한창 녹음이 짙어야할 몇 그루의 나무들이 나목(裸木)으로 서있다.
<강천섬-네이버캡쳐>
그리고 이 지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한강에서만 서식하는 단양쑥부쟁이 서식지로 알려진 곳이다. 4대강사업으로 개발될 때 환경단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개발을 반대하며 멸종위기종인 단양쑥부쟁이를 보호하려 했지만 대체서식지를 만들어 준다는 당국의 힘에 밀리고 말았다. 대체서식지로 옮긴 단양쑥부쟁이는 생육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많은 개체가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연에서 멸종된 것인 줄로만 알았던 야생 단양쑥부쟁이가 이곳 바위늪구비에서 발견이 됐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단양쑥부쟁이-네이버캡쳐>
남한강 북안으로 뚝 끝에는 바우늪구비 위로 숲길을 지나면 강천섬과 나란히 나 있는 뚝 길로 나온다. 강변 넓은 하천 변에는 북아메리카 원산인 금계국이 황급 벌판을 만들어 놓았다. 비옥한 곳보다는 약간 척박한 곳에서 잘 자란다는 금계국(金鷄菊)은 길가에 많이 심는 꽃으로 길모퉁이나 작은 언덕에 많이 심는데, 이곳은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해가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곳이라서 군락을 이룬 것 같다.
<여강변 금계국>
한강 변은 생각보다 깨끗하다. 1980년 초 우리나라 환경행정이 처음 시작할 때를 생각하면 환경에 대한 국민의 의식과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다. 30여 년 전 “더 맑게! 더 푸르게!”란 환경슬로건을 처음 정할 때 ‘더 좋은 환경이 과연 우리세대에 도래할 것인가?’ 하며 반신반의도 했었지만 강과 산은 더 푸르게 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도 있지만 황사와 미세먼지는 아직도 우리의 하늘을 더 흐리게 한다.
<남한강과 강천보>
그래도 묵은 쓰레기들이 풀포기 사이에 끼어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가 힘들다. 겉으로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보물 찾듯 집게로 집은 쓰레기는 봉투를 거의 채운다. 더욱이 요즘은 거의 생활필수품이 되어 편리하게 다용도로 사용하는 비닐이나 플라스틱류들은 자연에서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고 버릴 때 특별히 주의를 요하여야 한다.
<한강 폐비닐 수거작업>
<한강쓰레기 줍기>
<한강클린작업>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남한강대교 밑을 빠져나와 범바위들을 지나면 갈갱이고개 자락으로 자리 잡은 종교법인 <대순진리회여주본부도량>이 나온다.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증산교 교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믿는 증산교계통의 종교단체이다. 증산교 신도인 박한경(朴漢慶, 일명 牛堂)이 1968년 4월 경남 함안에서 올라와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서 대순진리회를 세우고 증산교의 분파들 가운데 가장 조직성을 갖춘 종교단체로서 능동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며 활발하게 교세를 확장시켰다.
<대순진리회 본부도장 표지석>
1969년 5월 광진구 중곡도장을 기공한 이래 사회봉사 활동을 병행하며 교세가 급성장하자 1987년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여주본부도장을 세웠다. 이밖에 제주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이 있다. 교육 사업으로 1992년 3월 경기도 포천시에 대진대학교를 개교한 이래 대진고등학교, 대진여자고등학교, 분당대진고등학교, 대진디자인고등학교, 대진정보통신고등학교를 세웠다. 의료사업으로는 1998년 8월 분당제생병원을 개원한 이래 동두천제생병원과 고성제생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순진리회 본부도장 정문>
다시 강천면 이호리 망경개들을 지나 <목아불교박물관> 앞에 도착한다. 목아불교박물관(木芽佛敎博物館)은 한국의 전통 목공예와 불교미술의 계승 발전을 위해 1993년 6월 개관한 사립 전문 불교 박물관이나,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들르지 못했다. 박물관주차장이 있는 야외조각공원 가장자리 잡초 속에는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이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어서 안쓰러웠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자손인가?
<문이 굳게 닫힌 목아불교박물관>
<잡초 속에 방치된 단군상>
오전의 남한강 클린행사를 마치고 오후일정으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남한강 변의 신륵사(神勒寺)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나, 내려 쬐는 폭염(暴炎)에 그늘도 없는 들길을 걷기가 몹시 난감하다. 그래서 경지정리가 한창인 여주시 북내면 가정리 하천들에서 목적지를 바꾸어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5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릉으로 이동한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世宗)을 모신 英陵(영릉)과 제17대 임금인 효종(孝宗)을 모신 寧陵(영릉)이 함께 있는 곳이다. 원래 입장료가 있는 곳인데 현재 세종대왕 능 주변을 조선 왕릉의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관계로 출입이 제한되어, 출입이 가능한 지역만 무료로 입장 한다. 영릉 입구에 도착하여 우선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을 경유한다.
<세종대왕 영정>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입구에는 훈민정음의 초성 ‘ㅎㅁㅈㅇ’자를 형상화 해놓았다. 내부에는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세종실록)”는 기본으로 과학기술을 연구하고 기구를 발명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혼천의(渾天儀) 등 천문관측기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을 만들었으며,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직설(農事直設)을 제작하여 널리 배포하였고 아악(雅樂)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업적의 바탕에는 세종의 애민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훈민정음 조형물>
<편경>
역사문화관을 나와 ‘왕의 숲길’로 들어선다. 왕의 숲길은 세종대왕 영릉(英陵)과 효종대왕 영릉(寧陵)을 연결하는 길로 조선왕조실록에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영릉(寧陵)을 먼저 참배한 후 영릉(英陵)을 참배했다”는 기록에 따라 조성한 길로, 이 길을 걸으며 왕의 발자취를 느껴보라는 의미가 있다.
<왕의 숲길>
우리는 울창한 왕의 숲길을 따라 먼저 英陵(영릉)으로 간다. 세종대왕능인 영릉(英陵)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1446)를 합장한 무덤이다. 조선 왕릉 중 최초로 하나의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합장한 능이자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랐다고 한다. 국조오례의는 조선 초기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 등 오례(五禮)에 관한 의식절차를 기록한 책이다.
<세종대왕 영릉>
원래 英陵(영릉)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獻陵, 태종의 능) 경내에 왕과 왕비를 합장하여 쌍실을 갖추고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 1469년(예종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설치되었으며, 봉분 내부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혼유석(魂遊石) 2좌를 마련하여 합장 능임을 표시하였으며, 난간 석에 12지신 상을 조각하는 대신 12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고 한다. 혼유석은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돌이다.
<세종대왕릉의 참배 장면>
일부 참배객들이 예를 올릴 수 있는 정자각까지 공사 중으로 갈 수 없어서 묘역 앞에서 배(拜)를 올리는데 하지 말라고 단속이 심하다. 이럴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는 참배객을 위해서 임시로라도 별도의 공간이나 장소를 마련해 주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 가 하는 생각을 하며 왕의 숲길을 되짚어 나와 홍살문을 따라 寧陵(영릉)으로 올라간다.
<출입금지구역에서 세종대왕릉의 참배>
寧陵(영릉)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1618∼1674)의 무덤이다. 왕릉과 왕비 능을 좌우로 나란히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배치한 쌍릉 형식이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최초의 형태라고 한다. 처음엔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東九陵)의 태조 무덤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봉분 안으로 빗물이 샐 염려가 있다 하여 1673년(현종 14) 세종의 무덤인 영릉(英陵) 동쪽으로 능을 옮겼다.
<효종대왕의 영릉 전경>
<효종대왕릉>
<인선왕후릉>
홍살문[홍전문(紅箭門)]은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문이며,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정자각(丁字閣)은 왕릉(王陵) 등의 바로 앞에 짓는 ‘丁’자형 침전(寢殿)으로 제례(祭禮) 때는 이곳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石函)은 제사가 끝난 뒤 철상(撤床)하면서 축문을 태워 묻는 곳인데 이를 예감(瘞坎)이라 한다. 정자각 우측 뒤로는 영릉비(寧陵碑)가 있는데, 이는 효종대왕 릉의 조성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예감(瘞坎)>
<효종대왕 영릉 비각>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흐르는 금천(禁川)을 건너 밖으로 나오다가 효종의 寧陵(영릉) 재실(보물 제1532호)을 둘러본다. 재실은 제관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건물이다. 조선왕릉의 재실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멸실되어 그 일부만 남아있으나, 이곳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300년 이상된 느티나무와 회양목은 말없이 이곳의 역사를 지킨다.
<효종대왕 재실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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