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네 번째-1)
(풍산∼부용대, 2018년5월26일)
瓦也 정유순
계절의 여왕 5월도 짙어지는 녹음과 함께 끝물에 접어들었다. 경북 예천읍에서 눈을 뜨고 안동시 풍산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 한참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세 번째 끝 지점이었던 남후면 계곡리에서 서안동대교 건너 북단에 있는 풍산면 계평리이다. 풍산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 모양이 콩밭에 누워 있는 형상이라 굽을 ‘곡(曲)’자와 콩 ‘두(豆)’ 합쳐서 풍성할 ‘풍(豊)’자와 뫼 ‘산(山)’자를 붙여 풍산(豊山)으로 하였다고 한다.
<풍산면 개평리부근의 낙동강>
서안동대교 교각 위에는 요즘 보기 드문 제비집 한 쌍이 보이는데, 무슨 길조라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기분 좋게 한다. 강 건너 절벽 위에는 낙암정이 오라고 유혹한다. 낙암정(洛巖亭)은 1451년(문종 1)에 여말선초 안동 출신의 문신 배환(裵桓)이 처음 건립하였다. 낙암정은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 건지산을 뒤로 하여 낙동강변의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전망이 확 트인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낙암정 앞에는 넓은 풍산평야가 펼쳐진다. 풍산평야는 풍산읍 안교리와 풍천면 하회마을 일대에 이르는 들을 가리킨다.
<서안동대교 밑의 제비집>
<낙암정 원경>
천변을 따라 걷다가 안동 강노을펜션 앞에서 숲길을 가로질러 풍산읍 화곡보건진료소 앞까지 간다.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라 논으로 낙동강 물을 대는 양수장(揚水場)도 바삐 움직인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는 좀 쌀쌀한 기분이었는데,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올라간다. 소하천(중수천)을 건너 레미콘 공장 옆을 지나다가 길이 막혀 버스로 마애선사유적지로 이동한다.
<논으로 물을 대는 농수로>
마애선사유적지는 2007년 ‘마애리솔숲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조사를 통해 후기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집 자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안동지역에서는 처음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마애선사유적전시관에서는 발굴 당시의 집 자리를 실제 모습으로 꾸민 발굴지와 이곳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찍개 등의 구석기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는데 전시관은 둘러보지 못했다.
<마애선사유적지>
마애솔숲공원을 지나 낙동강 변에는 북아메리카 원산인 금계국이 노랗게 수(繡)놓는다. 비옥한 곳보다는 약간 천박한 곳에서 잘 자란다는 금계국(金鷄菊)은 길가에 많이 심는 꽃으로 길모퉁이나 작은 언덕에 많이 심는데, 이곳은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해가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곳이라 군락을 이룬 것 같다. 꽃밭에 노랗게 취해 거닐다 풍산읍과 남후면을 잇는 풍남교를 지나 풍산천(豊山川)을 건너 유교문화길을 따라 병산서원 입구로 접어든다.
<낙동강 금계국 군락지>
유교문화길은 낙동강 비경을 조망하며 한국 전통문화 탐방도 가능한 길로 유교문화길 1코스(풍산들길)은 낙암정에서 풍산읍에 있는 풍산한지까지 풍산평야를 섭렵하는 14.5㎞ 구간이고, 2코스(하회마을길)는 풍산한지에서 현회삼거리까지 화산(花山, 460m)을 중심으로 병산서원과 화회마을로 이어지는 13.7㎞이며, 3코스(구담습지길)는 현회삼거리에서 부용대를 경유하여 구담교까지 연결되는 14.5㎞ 구간으로 총42.7㎞가 개설되어 있다.
<화산>
풍천배수장에서 시작하여 비포장도로로 약2㎞ 연결되는 병산서원 입구는 유홍준(兪弘濬, 1949년 1월 18일∼)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병산서원과 함께 아름다운 길로 묘사되었으며, 풍산 류 씨 문중에서도 비포장을 희망하고 있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어락정(魚樂亭)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낙동강과 자연이 함께 어울리는 선비의 여유로움이 우러난다. 토종 엉겅퀴도 외래종이 판을 치는 세상에 선비정신을 가다듬으며 외롭게 터를 지킨다.
<병산서원 오솔길>
<토종 엉겅퀴>
화산 자락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고, 7년의 전란을 눈물과 회한으로 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 째 아들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조선조인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서애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 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병산서원 전경>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에 탔으나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1563∼1633)를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향사(享祀)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屛山書院(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철종 14년(1863)의 일이며 1868년에 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서원을 정리할 때에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가운데 하나이다.
<병산서원>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 한국서원 건물의 으뜸으로 알려진 병산서원 정문은 복례문(復禮門)이다. 솟을대문인 복례문의 이름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것으로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갈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복례문을 들어서면 정면 7칸으로 길게 선 만대루 아래로 강당인 입교당이 보인다. 만대루 아래는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 누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마음과 몸을 다시 한 번 겸손하게 하라’는 의미 같다.
<병산서원 복례문>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있다. 입교(立敎)는 곧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입교당은 서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이다. 가운데는 마루이고 양쪽에 온돌을 들인 정면 5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동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던 명성재(明誠齋)이고, 서쪽의 조금 더 큰 2칸짜리 방은 유사들이 기거하던 경의재(敬義齋)이며, 마루는 원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 입교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건물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병산서원 입교당>
병산서원의 백미는 복례문과 입교당 사이에 있는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만대루 같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晩對樓)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따왔다고 하며 “푸르른 절벽은 오후 ‘늦게까지 오래도록’ 대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출입이 금지된 이곳을 관리하시는 후손의 특별한 배려로 만대루에 올라 병산(屛山)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이라도 하고 싶지만 갈길이 바빠 잠깐 앉았다가 일어난다.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이어지는 십리길(4㎞)은 학동들이 호연지기(浩然之氣)하며 거닐던 길이었으며, 유교문화길(2코스 화회마을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길 같다. 시인 안도현(安度眩, 1961.12.15∼)은 그의 시 ‘낙동강’에서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그것은 어느 날의 선열처럼 뜨겁게”라고 읊었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그냥 뜨겁게 우러나오는 선열이 아니라 ‘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라고 하고 싶다. 낙동강을 흐르는 물은 차가운 육신을 덥히는 뜨거운 피다.
<낙동강과 풍산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그 낙동강을 끼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내 마음 띄워 보낸다. 짙게 채색되는 녹음 속을 해치며 나무들과 눈 맞추고, 오래보면 더 예쁜 들꽃들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벌써 열매를 맺은 오디와 버찌들과 입을 맞춘다. 이 길을 걸었던 선비의 걸음걸이는 어떤 걸음걸이였을까?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강바람에 휘파람을 날리며 화산자락을 벗어나면 모내기가 막 끝난 하회마을 논바닥에는 벼들이 뿌리를 내린다.
<산딸나무 꽃>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국가민속문화재 (제122호, 1984년1월10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은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하회리(河回里)에 있는 민속마을로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유씨(豊山柳氏)의 씨족마을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태극형(太極形)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이다.
<하회마을 지도>
하회마을의 중앙에는 삼신당(三神堂)이 있다. 하당(下堂)으로도 불리며 입향조(入鄕祖)인 류종혜(柳從惠)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높이 15m 둘레 5.4m의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로 마을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소망을 비는 곳이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洞祭)를 상당과 중당에서 지내고 그 다음 아침에 여기서 제를 올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된다. 상당(上堂)은 화산 중턱의 서낭당이고, 중당(中堂)은 국사당이다. 나무를 잘못 건드리면 동티가 난다는 속설도 있다.
<삼신당-느티나무>
류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낙동강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남촌의 충효당(忠孝堂)이 대표적인 건물로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류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고 한다.
<하회마을 큰길>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하회마을로 들어와 처음 지은 집으로 유서가 깊다.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내려왔고 대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갖는다고 한다. 양진당(養眞堂)이라는 이름은 풍상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영(柳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며, 사랑채의 현판 입암고택(立巖古宅)은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호 입암(立巖)에서 따왔다.
<양진당 대문>
<입암고택-양진당 시링채>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졌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柳相祚)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지은 것이며, 충효당(忠孝堂) 현판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년∼1682년)의 글씨이다.
<충효당>
<충효당-미수 허목 글씨>
넓은 마을의 곳곳을 둘러본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대충 중요한 것만 보고 부용대가 보이는 곳으로 서둘러 강변 만송정 솔숲으로 나온다. 천연기념물 제473호(2006년11월27일)로 지정된 만송정(萬松亭)은 서애(西厓)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柳雲龍, 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어서 만든 솔숲을 만송정(萬松亭)이라 하며, 현재의 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낙동강과 부용대>
<만송정>
만송정에서 4월이 되면 벚꽃 터널을 이룰 강둑을 지나 바삐 풍천면 광덕리 부용대 입구로 이동하여 우선 겸암정사에 들른다. 겸암정사(謙嵓精舍)는 류운룡이 1567년(명종22)에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을 위해 지은 곳이다. ‘겸양’은 그의 스승 퇴계 이황이 직접 써준 것으로 류운룡이 이를 귀하게 여겨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바깥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절벽 아래로 흐르는 깊은 강이 흐르고 강 건너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겸암의 면모가 그려지는 곳이다.
<겸암정사>
<겸암정사 현판>
부용대는 부용을 내려 보는 언덕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하며, 하회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곳에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면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여 마을의 모양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한다. ‘하회(河回)’라는 이름처럼 낙동강이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모습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장관은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9월말-10월초) 중에 펼쳐지는 참나무 숯을 이용한 줄불놀이다. 줄불놀이는 부용대에서 강 건너 만송정까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일종의 불꽃놀이다.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부용대에서>
부용대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오면 류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8호)를 지나 화천서원(花川書院)으로 내려온다. 화천서원은 유운룡(柳雲龍)이 1601년(선조 34) 향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기려서 현 위치에 세운 서원으로 겸암의 위패를 모셨고 제자인 김윤안(金允安)과 종손자(從孫子)인 유원지(柳元之)을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진 것을 후손들이 1996년 5월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옥연정사-네이버캡쳐>
<화천서원>
하회마을에는 하회탈이 유명하다.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재료는 오리나무가 많이 쓰였고, 옻칠을 하여 정교한 색을 내어 해학적 조형미가 잘 나타나 미적 가치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일반 평민들 사이에서 많이 성행했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양반 계층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전통역할극인 별신굿놀이에서 하회탈이 많이 사용되었다.
<하회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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