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백화산 구수천계곡과 영동 양산팔경

와야 정유순 2018. 6. 4. 06:18

백화산 구수천계곡과 영동 양산팔경

(201862)

瓦也 정유순

1. 백화산 구수천계곡

   지구온난화영향인가? 봄이 끝나기 무섭게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며 태양은 작열(灼熱)한다. 새벽길에 걸쳤던 긴소매 얇은 바람막이는 벗어서 배낭에 쑤셔 넣고 버스 안에서 눈꺼풀이 내려 한 숨 졸았더니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는 옥동서원(玉洞書院, 국가지정문화재 제532, 20151110) 앞이다. 상주의 백화산 구수천계곡과 영동 양산팔경을 가기 위해서다.

<백화산 구수천계곡 지도>


   옥동서원은 조선초 명재상인 방촌 황희(厖村 黃喜, 13631452)의 영정을 봉안하여 존현(尊賢)하고, 교학(敎學)하던 사학기관으로 당초에는 현재 서원의 북쪽 신덕리에 있던 백옥영당(白玉影堂)으로 자리했으나, 1715(숙종41)에 이곳 백옥동 산자락 남동쪽으로 옮겼으며, 1789(정조13)에 옥동서원으로 사액(賜額) 받아 이름이 바뀌었다. 누각인 청월루(淸越樓) 좌우 온돌방 난방을 위해 아래층에 높은 화덕을 만들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옥동서원 전경>


   배향선현(配享先賢)으로는 황희를 비롯하여 병자호란 때 의병장 전식(全湜), 조선 중기의 문신 황효헌(黃孝獻), 황효헌의 증손이며 문신인 황뉴(黃紐)가 모셔져 있다. 옥동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황희를 모신 서원으로는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아 오늘날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출입문인 회보문(懷寶門)이 잠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백화산호국의길로 접어든다.

<옥동서원 회보문과 청월루>


   백화산호국의길의 백화산 한성봉(白華山 漢城峰, 933)은 신라 태종 무열왕 때는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고, 고려 때 몽골침입 당시에는 몽골군과의 격전이 벌어진 곳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들의 주 활동지였다. 본래 구수천 옛길로 불리던 이 길은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하면서 문화·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길로, 나라를 지킨 선조들을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길은 옥동서원에서 옛 반야사 터까지 약5km 정도 걷는 길이다.

<참싸리 꽃> 


   옥동서원 좌측 산길로 접어드는데 경사가 가파르다. 예쁘게 피었을 참싸리 꽃은 시들어 가는 것으로 보아 씨를 만들기 위한 준비에 바쁘고, 소나무는 숲을 이뤄 그런대로 뜨거운 햇빛을 가려준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능선을 타고 간 끝 지점에는 백옥정(白玉亭)이 반겨주고, 동쪽으로는 상주시 모동면 신천리 들녘이 길게 뻗어 있다.

<소나무 숲>

<백옥정 원경>

<백옥정에서 본 신천리 들녘>


   1723(경종4)에 최초 건립된 백옥정은 상주의 서쪽 헌수봉(獻壽峰)능선 말단인 옥봉(玉峰)에 위치한 정자이며, 옥동서원의 부속 건물로 서원에서 공부 하던 선비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곳이다. 정자에 걸려 있는 <백옥정기(白玉亭記)>에는 따뜻한 봄이 되면 백화(白花)가 난만하여 아름다운 그림 같고, 무더운 여름에는 만목(萬木)이 번음(繁陰)하여 심신이 상쾌하고, 서리 오는 가을에는 아름답게 단풍들어 옥녀로 단장하고, 눈 오는 겨울에는 옥가루를 뿌린 듯이 층층이 백옥(白玉)이라노래한다.

<백옥정>


   백옥정에서 옥동서원 반대쪽으로 넘어오면 백화산호국의길을 품은 석천(石川)이 흐른다. 일명 구수천(龜水川)으로도 불리는 석천은 경북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봉황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화서면을 관류하고, 상주시 화동면의 남서부와 모서면의 중심부, 모동면의 서부를 거쳐 영동군 황간면 서쪽에서 장교천을 합하여 초강이 되어 흐르다 심천면 심천에 이르러 금강 본류에 합류한다. 석천에는 아름다운 여덟 개의 여울이 어우러지는 <구수천팔탄(龜水川八灘)>이 있는 하천이다.

<석천(구수천)>


   백옥정에서 내려오면 구수천제1탄인 세심석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큰 바위 같으나 옛날에 공부하던 선비들이 바위에 올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수양하던 바위라고 한다. 관심이 없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세심석을 지나면 한바탕 꽃의 향연이 끝난 때죽나무들이 줄을 잇는데 그래도 늦게 핀 꽃들은 종 모양으로 매달려 꽃이 향의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때죽나무는 열매를 돌로 찧어 물에 풀어 놓으면 물고기들이 떼로 떠올라 붙여진 이름이다.

<때죽나무 꽃>


   여울져 흐르는 물소리에 12탄 손 꼽으며 가던 길을 깜박 잊어버린다. 개인 농장을 가로질러 꽃자리를 잡아가는 밤나무 숲을 지난다. 밤은 제사상에서는 대추와 함께 빠져서는 안 되는 제수(祭需)품이다. 대추는 꽃이 피는 자리에는 틀림없이 대추[()]가 열리기 때문에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은 씨 밤이 싹이 나서 밤나무가 죽을 때까지 뿌리에 붙어서 명을 같이하기 때문에 후손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라 제사상에 첫째와 둘째로 올려놓는다고 한다. 개인농장 구간이 제3탄 같다.

<밤나무 밭>


   밤나무 밭 끝에는 출렁다리가 기다린다. 요즘은 전국 각 지에 출렁다리가 무슨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이곳은 그 이전부터 출렁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밤나무 그늘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출렁거리는 다리 위에 몸을 얹어 놓는다. 어릴 적 떨림이나 스릴은 많이 식었지만 출렁거림에 내 마음도 함께 출렁거리고 흘러가는 냇물에 지나간 동심을 슬며시 끄집어낸다. 여기서부터 보장골까지 제4탄이라고 한다.

<출렁다리>


   출렁다리를 건너 구수천(석천)을 따라 내려가면 귀수정(龜水亭)이 나오고 제5(보장골전투갱변)인 임천석대가 나온다. 북과 거문고를 잘 다루던 고려 악사인 임천석은 고려가 망하자 이곳으로 들어와 높은 절벽 위에 대를 만들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고 종내는 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자결했다고 한다. 그의 충절을 흠모한 후세 사람들은 이곳을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불렀는데, 자리한 자태가 풍류를 즐기며 음풍농월(吟風弄月)도 할 만한 곳 같다.

<임천석대>


   제6탄은 전투갱변저승골까지이다. 저승골은 고려를 침입해 온 몽골군을 유인하여 반 이상이 죽은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나중에 재차 침입한 몽골군들이 이때를 앙갚음하듯 사로잡힌 우리민족이 2068백여 명이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는 저승골에서 패퇴한 보복으로 여겨진다.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는 이곳이 반역의 장소로 되어 세간의 이목에서 멀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저승골 안내판>


   제7탄은 저승골명경호(明鏡湖) 구간이다. 8탄은 명경호충북 영동군으로 넘어가는 도계까지이다. 옛 반야사 터에는 푯말만 덜렁하고 경상북도 상주시 표지석만 묵직하다. 비록 행정구역을 달리할망정 서로 왕래하던 옛길을 서로 협력하여 공유한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좌로 돌리니 강 건너에 반야사가 보인다.

<반야사 옛터>

<경상북도 상주시 경계석>


   징검다리처럼 콘크리트 위에 돌을 놓은 다리를 지나 도착한 반야사(般若寺)는 목마른 자에게 감로수를 안겨 주듯 연화(蓮花) 속에 머리를 내민 용두(龍頭)에서 약수가 흘러나온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에 있는 반야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720(성덕왕 19) 의상(義湘)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상원(相源)이 창건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 뒤 수차례의 중수를 거쳐서 1464(세조 10) 왕의 허락을 얻어 중창하였다고 한다.


<반야사 음수대>

<반야사 대웅전>


   반야샤를 문수도량이라고 하는 데는 세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설화에 기인한다고 한다. 세조가 이 절의 중창된 모습을 살피고 대웅전에 참배할 때 문수동자(文殊童子)가 나타나 망경대(望景臺) 영천(靈泉)으로 인도하여 목욕할 것을 권하였다. 동자는 왕의 불심(佛心)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사라졌는데, 왕이 목욕을 마친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설화가 있다. 이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고 한 것도 문수보살의 지혜를 상징한 것으로 반야샤로 절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반야사 삼층석탑>

<반야사 보호수 배롱나무(수령300년)>


   문수전(文殊殿)은 반야사에서 서북쪽으로 약200올라가면 망경대(일명 문수바위)와 영천이 나오고 그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는데 가지 못했고, 세조도 병이 나아 어필(御筆)을 하사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반야사 당도하기 전 백화산 너덜 길을 지나올 때 큰 돌무더기가 반야사 경내에서 보면 커다란 호랑이 형상이라며, 이는 산기슭에서 오랫동안 흘러내린 돌무더기가 그려낸 형상이라고 한다.

<망경대 문수전>


   처음에는 긴가민가하여 무심코 지나쳤는데 벽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본 후 백화산 돌무더기를 다시 바라보니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이다. 그래서 이곳은 반야사의 대표적인 명소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하며,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철이면 백화산을 향해 뛰어가는 호랑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반야사가 위치한 지형이 태극문양을 닮은 명당이라고 한다.

<백화산호랑이 벽화>

<백화산과 호랑이모형>

<호랑이모형의 돌무더기>

<태극모형의 반야사 전경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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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동 양산팔경

   이곳 영동 황간면에서는 올뱅이라고 부르는 다슬기국밥으로 오전을 마감하고 신라가요 양산가(陽山歌)의 고장으로 금강 상류 기슭에 있는 영동군 양산의 송호리관광지로 간다. 금강 상류에 자리 잡고 있어 강물이 깨끗하고 100년 이상 된 소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어 가족단위 관광지나 청소년 심신수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솔숲이 우거진 소나무 밭으로 들어가니 솔밭 귀퉁이에 양산 86경인 여의정이란 정자가 기풍 있게 서 있다.

<송호국민관광지 솔밭>


   ‘여의정(如意亭)’은 송호국민관광지 솔밭 바위 위에 세워 놓은 정자로 연안부사(延安府使)였던 만취당(晩翠堂) 박응종(朴應宗)이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여 강 언덕 위에 전원을 마련하고, 많은 해송(海松)종자를 손수 뿌려서 송전(松田)이라 불렀고, 만취당(晩翠堂)이란 정자를 지어 예의와 풍속 및 정치와 역사를 담론하며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그 후 후손들이 조상의 덕행을 추모하고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35년 정자를 새로 짓고 여의정이 되었다.

<여의정>


   조금 더 하류에는 흐르는 물들이 소용돌이치며 휘감기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양산 88경에 해당하는 용암이다. 바위의 생김새는 보통바위 같으나 그 주변을 맴도는 물살은 온 세상을 빨아들일 듯 돌기가 쌔다. 하늘로 오르려던 용이 선녀가 목욕하는 것에 반하여 오르지 못하고 떨어졌다는 바위이다. 하류 쪽 둑 밑 물도 빨아 올려 왈츠를 추듯 몇 바퀴 뺑뺑이 돌려 봉곡교 아래로 흘러 보낸다. 마치 물속에서 용이 승천하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다.

<용암>


   강 건너에는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와 앉은 바위 위에 날렵한 지붕이 얹혀 진 정자가 보인다. 봉곡교를 건너 가까이 갈수록 정자의 모습은 금강의 비단결에 감기고 소나무가 에워 싼 모습이 치맛자락 펄럭이며 속살을 보일 듯 말 듯 뭇 나그네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늘의 선녀 모녀가 강물에 비친 낙락장송(落落長松)과 석대(石臺)가 어우러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하강하여 목욕을 하였던 강선대(降仙臺)’라는 정자로 양산 82경이다.

<강선대>


   금강 북안으로 새로 조성한 금강둘레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인삼밭도 나온다. 데크로 조성된 길옆에는 제주도에서 올라온 현무암 돌하르방도 낯선 손님처럼 외롭게 서있다. 큰 눈에 자루병 같은 코를 가졌고, 입술을 다문 얼굴에 감투를 썼으며, 두 손을 배에 모으고 서 있다. 역시 모든 사물은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좀 아쉽다.

<현무암 돌하르방>


   강선대에서 금강 상류로 1.4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나무에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서있는 정자가 있는데 바로 제5경인 함벽정(涵碧亭)이다. 함벽정은 위치가 하도 좋아 옛날부터 시 읊고 글 쓰는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고 즐기는 경치를 함백정팔경이라 하여 따로 즐겼을 정도로 풍경이 탁월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어 그때 그 풍치를 상상만 할 따름이다.

<함벽정>

<함벽정 현판>


   맑은 물을 자랑하는 강안에서는 아낙들이 다슬기 잡이가 한창이다. 다슬기는 반딧불이 애벌레 먹이로 일급수인 깨끗한 물에서만 서식한다. 금강 북안 전망 좋은 곳에는 봉양정(鳳陽亭)이란 정자도 함께한다. 봉양정은 금운 이명주(錦雲 李命周)가 동문수학하던 13명과 함께 세운 정자다. ‘어진 새들이 아침볕에 와서 울어 봉양정이라고 이름 지었다. 영동군 향토유적(13)으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1967년에 중건한 것이다.

<다슬기 잡이>

 <봉양정>

   다음은 제3경인 비봉산이다. 비봉산(飛鳳山, 460)은 강 건너 양산면 수두리에 우뚝 솟은 산이다. 낮은 구릉지에 속하지만 양산면에서는 비교적 높은 산이다. 산세보다 정상에서의 경치가 떠 빼어나다고 하며, 산책 삼아 정상에 오르면 금강과 양산팔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비단강 숲 마을 강변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일품이다.

<비봉산>


   양산팔경을 꿰고 흐르는 금강은 양강(陽江)이라 불린다. 양강 들머리의 수두리의 제4경인 봉황대(鳳凰臺)는 옛날 봉황이 깃들던 곳이라 하며 조망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큰 바위를 뺑 둘러 데크로 에워싸고 바위 서쪽에는 봉황대라는 정자가 새로 지어진 것 같다. 7경인 자풍당(資風堂)은 두평리 금강 변에 있는 서당으로 거리가 좀 멀어 가지 못하고, 1경인 천태산영국사(天台山寧國寺)로 이동한다.

<봉황대>


   천태산(天台山, 715)으로 올라가는 길목부터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옥같은 시들을 천에 새기어 계곡을 수놓고, 미끄럼틀 같은 삼단폭포는 명주실 타래처럼 길게 물줄기를 뽑는다. 천태산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산 이름도 천태가 된 영동의 명산으로 충북의 설악이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뛰어나며,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주변에 이름난 명소가 많이 있다고 한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시>


   삼단폭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天台山寧國寺(천태산영국사)’라는 일주문이 보이고, 일주문을 지나자 우측으로 천년 묵은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한다. 이 나무는 높이가 31,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 나이는 천살 정도로 추정한단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운다고 하며,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주변 경관과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룰 것 같다.

<천태산 삼단폭포>

<영국사 일주문>

<영국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지나 문을 통과하자 영국사 대웅전이 나온다. 영국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8년에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려 고종 때 안종필(安鍾弼)이 왕명으로 중건하여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로 부르게 되었으며, 홍건적이 처 들어오자 공민왕이 이곳으로 몽진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다가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으로 수복하게 되자 왕이 기뻐하며 사찰 이름을 영국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영국사 대웅전(우)과 극락보전(좌)>


   대웅전을 나와 좌측으로 올라가면 원각국사비(보물 제534)가 나온다. 이 비석은 1153(고려 의종7)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1171(고려 의종1)에 왕사(王師)가 된 원각국사의 비이다. 비 몸통은 점판암 1장으로 되어 있으며,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 전부를 알 수는 없다고 한다.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비 머리에 있는 네 마리의 용은 매우 특이하다. 원각국사비 뒤에는 누구의 비인지 알 수 없는 승탑 2기가 있다.

<원각국사 비각>

<원각국사 비>

<이름 없는 승탑 2기>


   영국사에서 남쪽으로 약200쯤 되는 언덕에는 보물 제532호로 지정된 원각국사의 사리를 모신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僧塔)이 있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의 일종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많이 조성되었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승탑이고,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영국사 승탑-원각국사 사리탑으로 추정>


   일주문 안으로 하여 동쪽으로 500쯤 되는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에는 망탑봉 삼층석탑(望塔峯 三層石塔)이 있다. 이 탑은 자연화강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암석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기단을 만들었다. 탑 돌은 받침을 두고 그 위에 세워졌고, 지붕돌은 다른 돌로 만들어 졌다.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는 2.43이다. 그리고 20떨어진 지점에는 사람이 흔들면 흔들린다는 무게 10여 톤의 상어바위가 바위 위에 버티고 있다.

<망탑봉 삼층석탑>

<상어(흔들)바위>


<위 글 내용 중 영국사 부분은 정유순 지음 정유순의 세상걷기(20173, 도서출판 박물관)’ 172174쪽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