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곡사 솔바람 길과 백범

와야 정유순 2018. 5. 6. 15:23

마곡사 솔바람 길과 백범

(201855)

瓦也 정유순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 일컬어질 만큼 봄의 경치가 으뜸인 마곡사를 향하는데 고속도로는 아침부터 바쁘다. 진입하기도 힘들지만 제자리에 들어서서도 기어가기는 마찬가지다. 평소 같으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리를 세 시간 가까이 걸려 목적지에 당도한다. 마곡사 입구에는 지역 토산품을 파는 노점(露店)들이 벌써 진을 친다.

<태화산마곡사 일주문>


   태화산마곡사(泰華山麻谷寺) 일주문을 지나자 바로 산길로 접어들어 재를 넘어 마곡사 입구를 거쳐 영은암 앞을 지나 백련암 쪽으로 간다. 백련암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23세의 김구(金九, 18761949)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몸을 숨긴 후 스님이 되어 머물렀던 곳이다.

<백련암>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마애불은 바위에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선이 부드럽고 굽어보는 눈길이 부드럽다. 백범이 망국의 한을 씹으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했던 마곡사 솔바람 길을 조용히 사색한다. 백범(白凡)가장 낮은 곳의 무리를 뜻한다고 하는데, 이곳 솔바람 길을 걸으며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백범이라는 호를 얻었나 보다. 마곡사 솔바람 길은 백범명상길(1코스), 백범길(2코스), 송림숲길(3코스)이 서로 일부 겹치면서 세 길을 걸을 수 있다.

<백범명상길 표지>

<백범명상길 올라가는 길>


   그 당시 양반의 가문이 아닌 평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 人乃天)’라는 말에 감화되어 동학에 입문하였던 그가 삭발하고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삼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심지를 굳게 다짐했던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어 반갑다. 그러나 완전히 통일된 조국을 그토록 염원했건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두희(安斗熙, 19171996)의 흉탄에 가버렸으니

<백범 김구-네이버캡쳐>


   백련암 뒤로 오르막 계단을 100오르면 바위에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선이 부드러운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이 마애불은 누구든 소원을 빌면 꼭 한 가지는 이루어진다는 영험이 있다고 소문이 나있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왼팔을 명치끝에 올려두고 삼라만상을 굽어보는 눈길이 부드럽다.

<백련암 마애불>


   마애불 기도처를 지나 태화산 활인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마곡사를 품은 태화산은 백범의 은신처이자 사색의 공간이었다. 예로부터 이곳은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로 정감록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실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당하지 않은 곳이었다고 하니 하늘이 도운 백범의 은신처였는지도 모르겠다.

<솔바람 길 초입>


   활인봉(423)에는 표지석과 정자가 있으나 달리 조망할 공간은 별로 없는 것 같고 올라와서 쉬어가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활인봉에는 신비한 샘물이 있었는데 이 샘물을 마시면 죽어가던 사람도 살아난다고 하여 사람을 살린다는 뜻의 활인샘이 있어서 활인봉이 된 것 같다.

<활인봉>


   애기붓꽃 등 봄꽃들이 저마다 고개를 내밀고 사랑의 신호를 보내지만 숨이 가빠 제대로 눈인사 한번 못하다가 나발봉으로 내려갈 때는 그래도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소나무 잎을 흔들고 불어오는 솔바람은 봄의 향기를 잔뜩 실어온다.

<태화산의 신록>


   나발봉(417)은 표지석도 없는 것 같고 잠시 쉬어 온 정자가 나발봉 정상 같은 생각이 든다. 나발봉은 한때 도적의 소굴로 파수꾼이 올라와 보초를 서던 곳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나발을 불어 요새에 신호를 전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나발봉 정상의 정자>


   활인봉으로 계속 올라갈 때는 숨 가쁜 고행길이 언제 끝나려 나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나발봉을 경유하여 내려오는 마곡사 솔바람 길 제3코스(송림 숲 길)의 솔바람은 켜켜이 쌓였던 세상의 근심을 한 방에 싹 날려 버린다. 송림 숲 길 자락 끝에는 한국문화연수원이 자리한다. 한국문화연수원은 전통문화와 불교문화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교육연수시설로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체험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휴식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한국문화연구원과 은적교>


   한국문화연수원 앞 은적교와 영은교를 건너 좌측으로 꺾어 군왕대로 향한다. 이 길은 백범이 승려가 되기 위해 삭발했던 삭발바위에서 군왕대로 이어지는 백범명상 길이다. 백범은 백범일지에서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선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고 삭발당시를 회고한다.

<삭발바위에서 군왕대로 가는 백범명상의 길>


   군왕대(君王垈)는 마곡사에서 가장 지기(地氣)가 강한 곳으로 가히 군왕이 나올 만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몰래 매장하여 나라가 어려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말기에 암매장된 유골을 모두 파낸 후 돌로 채웠다. 조선 세조는 군왕대에 올라 내가 비록 한 나라의 왕이라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인 이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나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군왕대>


   군왕대에서 내려와 마곡천을 건너면 2층 누각으로 된 마곡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나온다. 대웅보전(보물 제801)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51(조선 효종2)에 각순대사(覺淳大師)에 의해 중수되었다. 외관상으로는 2층 건물형태인 중층이나 내부는 하나의 공간이다. 내부 중심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좌우에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셨다.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많지 않은 중층 건물로 목조건물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내부의 아름다리 싸리기둥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마곡천 징검다리>

<마곡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싸리기둥>


   대웅보전 아래에 있으며 마곡사의 중앙에 위치한 대광보전(大光寶殿, 보물 제802)1788(조선 정조12)에 세워졌다. 건물 안에는 본존인 비로자나불이 법당의 서쪽에 동쪽을 향해 모셔져 있다. 이런 배치는 대개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처럼 서방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앉아 있는 방식인데, 이곳에서는 비로자나불이 이처럼 앉아 있어 드문 예를 보인다. 또한 조선조 세조가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러 올 때 타고 온 어가가 보관되어 있다.

<대광보전>


   대광보전 앞 오층석탑은 고려 후기 석탑으로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탑으로 다보탑(多寶塔)이라고도 불린다.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후 라마탑에서 보이는 풍마동(風磨銅) 장식을 하였는데, 전 세계에서 희귀한 사례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층석탑>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김구와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백범당(白凡堂)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백범의 친손자가 기증한 백범의 휘호가 걸려 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백범이 즐겨 인용했던 휴정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바로 옆에는 선생이 1946년 환국하여 다시 마곡사를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푸른빛을 더해가고 있다.

<백범당>

<백범이 기념식수한 향나무>


   태화산 기슭에 맑은 계곡을 끼고 위치한 마곡사는 조계종의 충남지역 70여 사찰을 대표하는 대본산으로 643(백제 의자왕 3)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창건하고 1172(고려 명종 2)에 보조국사가 중건하였다.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법문을 열 때 모인 대중이 삼밭의 삼대 같이 많았다하여 마곡사(麻谷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마곡사 전경>


   마곡사는 가람배치가 좀 독특하다. 태극도형으로 흐르는 태화천(泰華川)을 중심으로 북측에는 대광보전과 대웅보전 및 오층석탑(보물 제799) 등 부처님의 공간인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상징하며, 하천 남쪽으로는 영산전(靈山殿) 명부전과 국사당이 있어 주로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전각들이 있다. 두 공간을 극락교를 통하여 연결하고 있다.

<마곡사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