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세 번째-2)
(안동댐∼풍산, 2018년4월29일)
瓦也 정유순
어제 시간을 맞추지 못해 들르지 못한 도산서원이 눈에 밟히지만, 이른 아침에 짬을 내어 임하면 천전리에 있는 안동 의성김씨 종택(安東 義城金氏 宗宅)으로 간다. 이 종택은 16세기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이 다시 건립한 것이다. 16세기 말 학봉이 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 그곳 상류층 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서 지었기 때문에 그 배치나 구조에 독특한 점이 많다고 한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가는 ‘내앞’으로 한자로는 천전(川前)이 되며 마을이름은 ‘내앞마을’이다.
<의성김씨 종택>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과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문신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일본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정사인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눈빛이 반짝이며, 담과 지략을 갖춘 인물로 쳐들어 올 것”이라 하였고, 부사 김성일은 “그는 쥐의 형상을 한 인물로 그리 두려워 할 상은 못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조는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아무 대비도 못하고 일본이 쳐들어오자 야반도주하기 바빴다.
<내앞마을>
이곳 내앞마을은 지리적으로 아름다운 마을임에는 틀림이 없고, 반듯한 와가(瓦家)들이 잘 정비되어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포근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북의 독립운동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 같다. 이러한 공간에서 이곳 출신 학봉 김성일의 당시 순간적인 오판으로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해 얼마나 국가적인 큰 재앙을 불러왔는지를 배울 수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서둘러 안동댐으로 이동한다. 안동댐은 경북 안동시 와룡면(臥龍面) 중가구리(中佳邱里)에 있는 다목적댐으로 높이 83m, 길이 612m이며 총저수량 약 12억 5천만 톤이고 유역면적 1,584km2인 낙동강 본류를 가로막은 사력(砂礫)댐이다. 낙동강 수계에 처음 등장한 이 댐은 하류 지역의 연례적인 홍수 피해를 줄이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및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1971년 4월에 착공하여 1976년 10월에 준공되었다.
<안동댐(내부)>
<안동댐(외부)>
이 댐은 연간 9억 2600만 톤에 달하는 각종 용수를 공급함으로써 구미·대구·마산·창원·울산·부산 등지에 혜택이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9만kw 용량의 수력발전소를 설치하여 연간 l억 5800만kwh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으며, 댐 하류지역에 역조정지(逆調整池)를 만들고 그 물을 이용한 양수발전(揚水發電)도 겸한다. 안동댐으로 조성된 안동호(湖)는 와룡면·도산면(陶山面)·예안면(禮安面)·임동면(臨東面) 등에 걸쳐 저수지 면적이 51.5km2에 달한다.
<안동호>
댐 광장에서 댐 상부인 공도를 횡단하여 나가려했으나 아직 개방시간(오전10시) 전이라 문이 잠겨있다. 근무자에게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나서 문을 열어 주신다. 공도를 건너면 우측에 안동루(安東樓)라는 누각이 나온다. 누각(樓閣)은 보통 글자 그대로 이층의 다락집 형태이다. 안동댐 바로 밑에 위치하여 댐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퇴계 이황은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陶山月夜詠梅, 도산월야영매)’라는 시로 안동루 주변의 운치를 음풍농월(吟諷弄月)한다.
<안동댐 공도>
<안동루>
<퇴계 이황의 시>
<댐하류 전경>
물가로 길을 잘 만들어 놓아 데크를 타고 월영교로 향한다. 월영교(月映橋)는 안동댐 밑으로 상아동과 성곡동을 연결하는 길이 387m에 폭 3.6m의 목책 인도교이다. 다리의 명칭은 주민 공모를 통해 결정하였으며, 안동 지역에 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고, 안동댐 민속경관지에 월영대(月映臺)라고 적힌 바위글씨가 있어 월영교라고 하였다.
<월영교>
<월영교 입구>
월영교 아래로 황포돛배는 봄기운을 가르고 발길은 낙동강 따라 하류로 향한다. 간선도로인 석주로를 건너 철다리 밑으로 들어가자마자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七層塼塔)’이 나온다. 이 탑은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국보 제16호로 높이 16.8m인 한국 최고 최대의 벽돌로 쌓은 신라 후기의 전탑이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음 세김 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황포돛배>
<법흥사지 칠층전탑>
그리고 법흥사 절터는 칠층전탑 외에는 아무 흔적도 없으며, 현재는 고성이씨(固城李氏) 탑동파(塔洞派) 종택이다. 고성이씨는 본래 중국 당나라 때 난을 피하여 들어온 이경·이황 형제를 시조로 한다. 고려 때는 개경 송악산 밑에서 살았는데, 토족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경상남도 고성 땅에 가서 살게 되어 ‘고성이씨’로 관향(貫鄕)을 얻었으며, 조선 세조 때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이 안동에 내려와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보물 제182호인 임청각(臨淸閣)은 1515년(중종10)에 형조좌랑을 지낸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이었다고 하나, 일제가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지금은 70여 칸만 남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의 하나인 이 집은 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의 생가로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임청각 전경>
또한 이 집은 용(用)자를 가로로 눕힌 것 같은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임청각의 사랑채인 군자정은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상태다. 임청각이란 뜻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깊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며, 당호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임청각평면도-네이버캡쳐>
<군자정>
석주 이상룡은 1905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석주 이상룡 초상>
임청각을 나와 다시 낙동강을 따라 걷는다. 법흥교 아래로 내려와 하류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낙동강이 반변천과 만나는 지점이 정하동(亭下洞)이다. 영양군 일월산(日月山, 1,211m)에서 발원한 반변천(半邊川)은 영양읍 북쪽에서 장군천(將軍川)과 합류하여 영양군과 청송군을 거쳐 흐른다. 안동시에서 임하댐에 머물다가 낙동강과 합류한다. 조선시대에는 신한천(神漢川)이라고 하였으며, 영양 읍내를 흐를 때 강변이 반으로 줄어들어 반변천이 되었다고 한다.
<낙동강과 반면천 합류지점>
정하동(亭下洞)에 있는 영호루(映湖樓)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강 이남의 4대 누각으로 꼽힌다. 영호루가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지게 된 것은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하여 자주 영호루에 나아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고 군령을 내리면서 마음을 달랜 곳으로, 홍건적이 물러나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 친히 ‘영호루(映湖樓)’ 석 자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영호루(공민왕글씨)-네이버캡쳐>
영호루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려 때 장군 김방경(金方慶)이 1274년(원종 15)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수차례 수마에 휩쓸려 유실과 복원을 거듭하다가 1934년 갑술년 대홍수 때 완전 유실된 것을 1970년 안동시민들의 모금과 국비 등으로 옛 영호루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재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한식 누각을 새로 지었다.
<영호루(박정희글씨)>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현판을 걸었고, 남쪽 면에는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의 한글현판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揭板)하였다. 현재 게시되어 있는 시판은 12점이고, 제영(題詠) 1점과 현판 2점이 있다. 누각 중앙의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 嶺左名樓)’라는 글씨는 1820년(순조 20)에 안동부사 김학순(金學淳)이 썼다고 한다.
<낙동상류 영좌명루>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느끼고 볼거리들이 많아서 그런지 오전이 후딱 지나간다. 안동에서 유래한 음식으로 삶은 닭에 온갖 채소와 양념을 섞어 졸여서 만든 요리인 안동명물 ‘찜닭’으로 허기를 채우고, 안동지역 예안이씨(禮安李氏)의 효(孝)와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상징하는 안동시 풍산읍 상리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인 체화정(경북유형문화재 제200호)으로 잠시 이동한다.
<체화정>
체화정(棣華亭)은 1761년(영조37)에 진사 이민적(李敏迪, 1702∼1763)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그 후 순조가 효자 정려(旌閭)를 내린 바 있는 용눌재 이한오(慵訥齋 李漢伍)가 노모를 체화정에 모셔 효도하였으며, 이민적이 형 옥봉 이민정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지던 장소였다고 한다. 정자 앞 연못 체화지(棣華池)의 세 개의 섬은 방장(方丈)·봉래(蓬萊)·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며, 산앵두나무의 꽃을 뜻하는 ‘체화’란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에서 그 의미를 따왔다고 한다.
<체화정과 세 개의 인공섬>
강 건너로 영호루가 훤히 보이는 낙동강 변에서 다시 오후 일정을 시작한다.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다가 옥수교를 건너서 안동시 수하동으로 들어선다. 옥수교(玉水橋)는 안동시 옥동(玉洞)과 수하동(水下洞)을 잇는 다리로 길이가 384m이며 유효 폭 8m, 다리 높이 11m이다. 옥동은 옛날 안동도호부 시절 옥(獄)이 있던 곳이었는데, ‘옥(獄)’이 ‘옥(玉)’으로 변하여 안동의 강남으로 떠오르는 곳이라고 한다. 수하동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안동시 교외 지역이 되어 골재공장을 비롯한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옥동과 수하동 지도>
<옥수교>
<수하동의 골재공장>
옥동과 수하동은 낙동강이 ‘S’자로 흐르면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맞물리는 형국으로 마주보고 있다. 수하동에는 중앙선 복선전철공사가 한창이고,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보에서 힘을 모았다가 더 큰 힘으로 세월을 박차고 나간다. 수하동에 있는 안동시수질환경사업소도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쉼 없이 돌아간다.
<중앙선복선전철공사 중>
<안동수질환경사업소>
강변을 따라가던 길이 갑자기 산으로 향한다. 올라가는 길옆에는 이미 꽃이 진 할미꽃이 꽃술만 내민 채 군락을 이룬다. 힘겹게 올라간 언덕의 정점에는 안동시광역매립장이 넓게 자리한다. 요즈음은 쓰레기도 그냥 버리는 게 아니고 다시 재이용하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자원이다. 그래서 쓰레기를 폐기물(廢棄物)이라고 하지 않고 순환자원(循環資源)이라고 부른다. 매립장에서 또 다른 고개를 넘어 안동시 남후면 개곡리(皆谷里)에서 세 번째 여정을 마무리 한다.
<할미꽃>
<안동시광역매립장>
<남후면개곡리 넘어가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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