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천 삼 백리 길을 따라(세 번째-1)
(안동 가송리∼안동댐, 2018년4월28일)
瓦也 정유순
들어가는 입구가 공사 중이라 지난번에 지나쳤던 청량산(淸凉山, 870m)을 향해 조반 숟가락을 놓자마자 출발한다. 버스로 입석대까지 이동하여 신록이 짙어지는 아침공기를 폐 속 깊이 들어 마신다. 초입에는 조선 숙종 때 문신 권성구(權聖矩, 1642∼1709)가 청량산을 노래한 시구가 반긴다.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聞說金剛勝 문설금강승)
여태껏 살면서도 가지 못했네(此生遊未嘗 차생유미상)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淸凉卽其亞 청량즉기아)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 만하지(呼作小金剛 호작소금강)
육육봉 올려보며 숨 가빠할 틈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더 가파른 계단을 타고 무위당(無爲堂)을 지나 응진전(應眞殿)에 당도한다.
<도립공원 청량산 표지석>
<청량산 입석대>
응진(應眞)은 ‘불교의 수행자 가운데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아라한(阿羅漢)’을 말하는데, 이곳 응진전은 금탑봉(金塔峰)의 중간 절벽 동풍석(動風石) 아래에 위치한 청량사(淸凉寺)의 부속 건물 중 하나로 보인다. 안에는 석가삼존불(釋迦三尊佛)과 16나한(羅漢)이 봉안되어 있고, 특히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상(像)이 안치되어 있다.
<청량산 무위당>
<청량산 응진전>
응진전에서 김생굴로 가는 중간에는 총명수(聰明水)라는 약수(藥水)가 있는데, 이는 신라 후기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물을 마시고 더 총명해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천길 절벽이 좌우로 우뚝 선 곳에서 물이 일정하게 솟아나는데 가뭄이나 장마에 상관없이 솟아나는 양이 일정하다고 한다. 청량산에는 총명수를 비롯하여 치원암(致遠庵), 풍혈대(風穴臺) 등 최치원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있다.
<청량산 총명수>
김생과 청량 봉녀(縫女)가 글씨와 길쌈 기술을 겨루었다는 전설이 서린 김생굴은 경일봉(801m)과 금탑봉(646m) 중간에 있다. 굴속은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 신라 명필 김생(金生, 711∼791)이 10년간 글씨 공부를 한 곳으로 전해진다. 김생의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이며 한평생 서예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예서(隸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능하여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 불렸으며, 송(宋)나라에서도 왕희지(王羲之)를 뛰어넘는 명필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김생굴>
다시 김생굴에서 급한 경사에 몸을 굴리듯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거닐었던 오솔길을 따라가며 오산당(吾山堂)이라 불리는 청량정사(淸凉精舍)에 들어선다.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4호(1991년 5월 14일)로 지정된 청량정사는 조선 중기에 안동부사를 지낸 퇴계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가 청량산에서 조카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이황 등을 가르치던 곳이다. ‘오산(吾山)’은 ‘우리 집 산’이라는 뜻이면서 ‘유가(儒家)의 산’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청량정사>
청량산도립공원 내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청량사(淸凉寺)는 663년(신라 문무왕 3)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33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청량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절은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47)과 응진전만 남은 채 피폐해졌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고, 공민왕이 친필로 썼다는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특이하게도 청량사의 약사여래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라고 하며 금칠이 칠해져 있다.
<청량산 장인봉과 청량사>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사 약사여래불>
본전 앞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원효(元曉, 617∼686)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아랫마을에서 논갈이를 하던 뿔이 셋 달린 소를 시주 받아 절에 돌아왔는데,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날뛰던 소가 신기하게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 절을 짓는 제목과 여러 물건들을 밤 낯없이 운반하고는 완공을 하루 앞두고 죽었다. 이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원효는 이 소를 지금의 소나무 자리에 묻었고 그 곳에서 가지가 셋 달린 소나무가 자라 후세 사람들이 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고 부른다.
<청량사 삼각우송>
<청량사 일주문>
오전 내내 청량산을 두루 살펴보고 오후에는 고산정이 건너 보이는 가송협(佳松峽)에서부터 낙동강 걷기를 시작한다. 벌써 마음은 여울을 이루며 졸졸졸 흐르는 강물 위에 쪽배를 띠우고 열심히 노를 젓는다.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목에는 월명담(月明潭)이 낙동강 절벽에 부딪혀서 소(沼)를 이룬다. 예부터 전해오기를 이곳 깊은 못에 용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는데 영험(靈驗)이 있었다고 한다.
<가송협>
<월명담>
농암종택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宗宅)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에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어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옮겨와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으로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는데 하룻밤 묵으며 선인들의 체험을 경험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농암종택 전경>
<긍구당>
<분강서원 유도문>
농암종택 아래 강변 오솔길을 따라 한속담 벽력암 등 절경이 초록빛이 짙어지는 나무 가지 사이로 스치고 지나간다. ‘퇴계 오솔길’은 사유지 관계로 해결이 안 되었는지 농암종택에서 단천교까지 건지산을 타고 돌아가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퇴계가 걸었던 길을 더듬으며 찾아 가는데 역시 길은 거칠고 나중에는 길이 끊긴다. 벼랑을 타듯 겨우 전망대까지 와서 숨을 고른다. 청량산 주봉들이 멀리 보이고 걸어온 길들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청량산 봉우리 사이로 하늘다리도 가물거린다.
<숲이 우거진 퇴계오솔길>
<퇴계오솔길 주변의 낙동강>
<퇴계오솔길 전망대에서 본 청량산>
옛날에 풍요로 왔던 강변마을엔 빈집들만 계속 늘어나고 봄갈이를 해야 할 넓은 밭은 집나간 주인만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다. 길을 걸으며 폐허가 된 빈집들을 만날 때마다 한없이 가슴이 아려온다. 그 빈집들이 내가 살던 고향일진데… 무너져 내린 용마루로 빗물 스며들어 어릴 적 내 꿈 다 적셔 놓았는데… 고향을 떠날 때는 저마다 절절한 사연이 있겠지만 결국은 고향을 버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어찌 할꼬…
<봄갈이를 기다리는 밭과 빈 마을>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를 지나면 도산면 원촌마을이 나온다. 원촌마을은 퇴계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진성이씨집성촌(眞城李氏集姓村)으로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고향이다. 마을 동쪽과 남쪽은 낙동강 줄기에 의해 형성된 드넓은 구릉지가 펼쳐져 있다. 강 건너 남쪽에는 왕모산(王母山, 648m)도 솟아 있는데, 이는 공민왕이 청량산으로 갈 때 동행했던 왕모 노국공주를 기리고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촌마을>
이육사(李陸史)는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선비 집안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 유년시절 한학을 공부했으며, 결혼 후 한때 처가가 있던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이후 일본과 중국에서 수학했다. 귀국하여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이육사 시비공원>
출옥 후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기자생활과 항일투쟁을 함께 펼친다. 주로 육사(陸史)와 활(活)이라는 필명으로 시와 산문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발표했고 자오선(子午線), 영화예술(映畵藝術), 풍림(風林)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40년 짧은 삶 가운데 20여 년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였으며 1943년 가을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끌려가 이듬해인 1944년 1월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육사문학관>
<이육사시인 상>
산은 가슴이 되고, 강은 팔이 되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곳, 안동의 북쪽 낙동강 상류에 있는 원촌마을에는 이육사 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이육사문학관이 마련되어 있다.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냈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내 고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의 ‘청포도’와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의 ‘광야’가 입속에 맴돈다.
<이육사시비-청포도>
이육사문학관에서 산자락 고개 하나 넘으면 퇴계 이황의 묘소가 있으며 토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퇴계종택이 나온다. 퇴계의 묘소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다. 묘소는 살아생전에 소박함과 검소함을 중시하여 자신이 죽으면 비석도 놓지 말라는 유계(遺戒)에 따라 석물(石物)장식을 사양하였으나, 나라에서 최소한의 격식으로 만든 석물만 권하여 설치하였다. 비석도 선조임금으로부터 추증(追贈)된 영의정 등 관직을 넣지 않고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여 있다.
<퇴계 이황 묘소>
퇴계묘소에 올라가다 보면 맏며느리였던 봉화 금씨의 묘가 보인다. 며느리는 “내가 시아버님의 아낌을 많이 받았는데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다시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여 퇴계묘소 아래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죽어서도 며느리의 극진한 부양을 받는 자애로운 시아버지 퇴계선생의 인품이 그려진다.
<퇴계며느리 봉화금씨 묘>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1982년12월1일)로 지정된 퇴계종택은 원래의 가옥은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의 가옥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의 크기는 총 34칸으로 ‘ㅁ’자형이며, 전체 면적은 2,119㎡이다. 종택 오른쪽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추월한수(秋月寒水)는 “가을 달이 찬 강물에 비치듯이 한 점 사욕이 없는 깨끗한 성현의 마음”에 비유한다고 한다.
<퇴계종택 전경>
<퇴계종택>
<추월한수정>
청량산에서부터 퇴계오솔길을 따라 마지막으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둘러보려 했으나 입장시간이 마감(오후5시) 되어 들어가지 못하고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오천유적지(烏川遺蹟地)로 이동한다. 오천유적지는 조선 초기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약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世居)하여 온 마을로 세칭 오천군자리(烏川君子里)라 불리는 유적지이다.
<오천군자리 마을 전경>
이곳 건물들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구 예안면 오천리에서 집단 이건(移建)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이 중 탁청정(濯淸亭)과 후조당(後彫堂)은 국가지정문화재로, 탈청정 종가(宗家)와 광산김씨 재사(齋舍) 및 사당(祠堂), 그리고 침락정(枕洛亭)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유물전시관인 숭원각(崇遠閣)에는 선대의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다.
<광산김씨 예안파 신도비>
오늘을 마감하고 숙소로 가는 길목에 연미사(燕尾寺)에 있는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 이천동 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을 보러간다. 이 석불상은 마애불로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다. 몸체와 머리가 각기 다른 돌로 되었는데, 몸체는 마애불처럼 새기고 머리는 조각한 특이한 모습이다. 본래 무너진 채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것으로 ‘이천동 석불’의 잔잔한 미소는 안동의 상징적인 얼굴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천동 석불상>
속칭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는 이 석불은 바로 연미사의 대표적인 미륵불이다. 연미사라는 이름은 원래 조선시대 과객(過客)이 쉬어가는 숙소인 연비원(燕飛院), 속칭 제비원이라 불렀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당시 연미사 석불에는 제비 모양의 누(樓)가 덮고 있었으며 법당은 제비의 부리에 해당된다고 해 연미사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연미사 안내도>
그리고 이곳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 가인이 그 뉘기며(중략)∼♬” 길게 늘어지는 남도민요 ‘성주풀이’의 본향으로 넉넉하고도 묘한 석불의 미소는 우리 민족의 정한(情恨)을 부처님에 기대어 표출시키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한국 불교는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라기보다는 오랜 민속신앙과 결합된 종교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연미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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