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암자순례길과 무풍한송로
(2018년 3월 31일)
瓦也 정유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서울에서 4시간 넘게 달려와 도착한 곳은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 주차장이다. 입구에는 영축산문(靈鷲山門)이 자리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문제가 있다. 영축산(靈鷲山, 1,050m)의 ‘축(鷲)’자는 옥편이나 한자사전에 분명 ‘독수리 취(鷲)’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만 ‘축(鷲)’자로 읽는다. 이는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영취산(靈鷲山)’ 또는 ‘취서산(鷲栖山)’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2001년 1월 9일 양산시 지명위원회에서는 영축산(靈鷲山)으로 확정발표 하였다.
<영축산문(靈鷲山門)>
영축산인지 영취산인지 헷갈려가며 산문을 통과하여 우측 길로 들어서면 ‘바람 한 점 없지만 소나무에서 품어 나오는 찬 기운이 시원한 솔밭 길,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가 나온다. 길 가의 바위마다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게 새겨져 있다. 아마 그 시대에는 바위에 이름 새기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다. 바위마다 더 깊게 더 예쁘게 새겨 넣어야 장수하고 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가 파괴하고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외(敬畏)의 대상이다.
<무풍한송로>
<바위마다 새겨진 이름들>
이런 행위를 탓이라도 하는 듯 “세상은 참으로 허무한 것을/이 몸은 자꾸만 죽어 가는 것을/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이것을 깨달으면 다툴 것이 없는 것을∼” 법구경(法句經)이 대신 변명을 해준다. 바위를 정으로 이름을 깊게 콕콕 찍힐 때마다 소나무도 몹시 아팠던지 제대로 하늘을 향한 게 별로 없다.
<법구경 비문>
<등 굽은 소나무들)>
양산천을 따라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를 걷다보면 일주문 당도하기 전에 통도사 성보박물관이 나온다. 통도사 내에 있는 성보박물관은 1987년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찰 박물관으로 도난·훼손 등 위험요소가 있는 사찰 전래문화재들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보존 전시하는 한편,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불교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런데 거대한 성벽 같은 박물관 건물은 고즈넉한 천년 통도사의 옛 모습을 앗아 가버린다.
<성보박물과 전경>
홍예교(虹霓橋) 건너 일주문을 지나 마주친 사천왕문도 성보박물관의 위용에 눌린다. 천년 고찰답게 전각들이 저마다 위치를 잡고 존재를 자랑한다. 극락보전(極樂寶殿) 앞 봉발탑은 서 있는 자세가 삐딱하다. 그 이유는 전각들과 방향을 맞춘 것이 아니라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과 방향을 같이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발탑은 부처님의 제자인 가섭존자가 석가여래의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교리에 따라 만든 상징물이다.
<봉발탑>
통도사(通度寺)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불보(佛寶)사찰이다. 통도사의 이름도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차산지형통어인도영취산형],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로 통도로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위승자통이도지],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 한다[通萬法度衆生, 통만법도중생]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통도사 일주문>
통도사는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 사찰이다. 그 중 국보 제290호로 지정된 대웅전(大雄殿)은 상로전(上爐殿) 영역의 중심건물이자 사찰을 대표하는 목조건축물이다. 건물 뒤쪽에 자장율사가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어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646년(선덕여왕 15)에 처음 지은 후 수차례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우운대사(友雲大師)가 고쳐지었다.
<통도사 대웅전>
이 대웅전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형태로 내부의 기둥 배열이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지붕은 ‘정(丁)자’형을 이루고 있어 앞뒤좌우 면이 모두 정면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건물의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각기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특히 금강계단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고 한다.
<금강계단 현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계단을 친견하기 위해서는 대웅전 현판이 있는 동쪽에서 신발을 벗어 들고 들어가 계단(戒壇)을 한 바퀴 돌아 서쪽의 대방광전 쪽으로 나와야 한다. 계단의 중앙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종 모양의 석조물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이 항상 계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경주의 황룡사가 왕실귀족불교의 중심지였다면, 통도사는 산중에 자리 잡은 수행불교(修行佛敎)의 중심도량이었다.
<금강계단>
일주문으로 돌아 나와 암자순례길을 나선다. 통도사에는 소속 암자가 선원(禪院)인 극락암을 비롯하여 백운암·비로암 등 19개의 암자가 있다. 이곳 암자에 대한 사전답사를 하지 않아 어느 암자부터 순행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우선 극락암으로 방향을 잡는다. 통도사 뒤편으로는 제법 넓은 사찰경작지가 봄갈이를 준비하고 있다. 경작지를 지나 소나무가 우거진 솔밭 언덕길을 한참 오르니 극락암이 나온다.
<통도사 암자 순례길>
<극락암 가는 솔밭길>
극락암(極樂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부속암자이다. 1332년(충혜왕 2) 창건하였으며, 창건자는 미상이다. 1758년(영조 34)에 철홍(哲弘)이 중창하였고, 극락선원(極樂禪院)은 많은 수행인들을 배출하였다. 1953년 11월 대선사 경봉(鏡峰)이 조실(祖室)로 추대되자 많은 수행승들이 모여들었다. 선원의 증축이 불가피해지자 1968년 경봉은 가람 전체를 중건, 중수하여 9동 104칸의 선원으로 만들었다.
<극락암>
극락암 현판 뒤에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곳에 추사체(秋史體) 글씨의 无量壽閣(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낙관(落款)의 若阮(약완)은 200여 개의 김정희(金正喜) 호중 하나이나, 주변에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모각(模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추사의 无量壽閣(무량수각) 진품은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친분관계로 해남의 대흥사(大興寺)와 예산의 추사 집안의 원찰인 화암사(華巖寺)에만 있다고 전해온다.
<추사체의 무량수각 현판>
극락암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법당(法堂)을 중심으로 연수당(延壽堂)·정수보각(正受寶閣)·조사각(祖師閣)·수세전(壽世殿)·영월루(映月樓)·삼소굴(三笑窟)·여시문(如是門)과 요사채 4동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소굴(三笑窟)은 1982년까지 경봉(鏡峰)스님이 기거하면서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던 곳이라고 하며, 또한 경봉(鏡峰, 1892∼1982)스님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부딪혀 촛불이 춤을 추는 광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悟道頌)을 불렀던 곳이라고 한다.
<삼소굴>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하하 우습구나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
優曇華光法界流(우담화광법계류, 우담바라 광명만 온 누리에 흐르네)”
<극락암의 수선화>
이 밖에도 절 입구에는 극락영지(極樂影池)라고 하여 영축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그 못 위에 경봉이 홍교(虹橋)를 가로질러놓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더욱이 주변의 수선화와 벚꽃 등 봄의 전령들이 어우러져 만물이 소생하는 한판 굿마당을 펼친다.
<극락영지와 홍교>
<극락암 벚꽃>
웬만한 절보다 더 큰 극락암을 뒤로하고 사명암(四溟庵)으로 발길을 돌린다. 가로질러 가려는 욕심으로 길이 없는 솔밭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뒤돌아 나오기를 두 번 정도 하다가 큰 길을 따라 사명암을 찾아간다. 사명암은 통도사 산내 암자 중의 하나로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이곳에 모옥을 짓고 수도하면서 통도사의 금강계단 불사리를 수호한 곳이라고 전한다.
<사명암>
1573년(선조 6)에 사명대사를 흠모한 이기(爾奇)와 신백(信白) 두 승려가 암자를 지어 창건하였다고 하며, 승려 동원이 중수·증축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경내에는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과 일승대, 월명정 등 총 5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사명암 극락보전>
이곳에 봉안되었던 불화 ‘통도사사명암감로탱(通度寺四溟庵甘露幀)’은 문화·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315호)로 지정하였으며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실물은 확인하지 못했다. 감로탱이란 ‘지옥에 빠진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해주는 장면’을 그린 불화라고 한다.
<통도사 사명암 감로탱-네이버캡쳐>
<사명암 벚꽃과 자목련>
사명암 마당에 활짝 핀 자목련과 봄을 희롱하다가 발길을 돌려 내려오면 취운암(翠雲庵)이 나온다. 취운암은 통도사에 속한 19곳의 산내암자 중 하나로 통도사의 대웅전을 짓고 남은 돈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1650년(효종 원년)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창건하였고 1795년(정조 19)에 낙운대사(洛雲大師)가 중건하였으며, 1969년 태일화상(泰日和尙)이 다시 고쳐지었다. 총 6동 128칸에 이르는 건물로 통도사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암자이다.
<통도사 취운암>
취운암 1층 중앙을 통과하여 뒷산으로 오르면 통도사 전경을 관망할 수 있는 언덕 사자목(獅子目)이 있고, 그 자리에는 탑전(塔殿)과 통도사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사자목 오층석탑(獅子目 五層石塔)은 탑의 부재(部材)들이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들을 모아 1991년에 복원한 석탑이다.
<탑전>
1층 탑신석은 발굴된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여 복원하였으며, 결실(缺失)된 4∼5층 옥개석 및 탑신석은 새로 제작하였다. 1층 탑신석 남면에는 인왕상(仁王像) 2구를, 2층 탑신석 남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모두 4단이다. 노출된 사리공과 옥개석 등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자목 오층석탑>
<사자목 언덕의 진달래>
계단을 내려와 다시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를 통하여 밖으로 나오는데 들어갈 때 지나쳤던 석당간(石幢竿)이 보인다. 당간(幢竿)은 사찰을 나타내거나 사찰의 행사를 나타내는 깃발, 즉 당(幢)을 거는 대를 말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옆에 세우는 기둥인 지주를 합쳐서 당간지주(幢竿支柱) 또는 찰간지주(刹竿支柱)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찰 어귀에 세워져 있다. 고려 말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의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통도사 석당간>
<무풍한송로>
오전에 들어왔던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를 통해 영축산통도사와 부속암자들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나옹선사는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오도송(悟道頌)이 오늘을 사는 중생들에게 길잡이를 해준다.
<나옹선사의 청산은 말없이 살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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