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성백제의 발자취를 따라서(3 完)

와야 정유순 2018. 2. 21. 21:16

한성백제의 발자취를 따라서(3 )

(방이·석촌동고분군, 2018217)

瓦也 정유순

   세계평화의 문을 빠져나와 방이동사거리에서 늦은 점심을 한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단 몇 시간 만에 돌아본다는 것은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깊이를 자세히 볼 수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읍지로 추정되지만 땅 속에 비밀을 깊이 숨겨 놓고 있으며, 몽촌토성은 그나마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공원과 함께 고대와 현대가 함께하게 만나는 장이 되어 다행이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지도>


   방이동사거리에서 아파트와 각종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선 골목을 헤치고 방이동고분군에 도착한다. 송파구 방이동 125번지에 있는 방이동고분군은 이 일대의 낮은 능선을 따라 즐비하게 있던 무덤 일부를 1975년에 발굴 조사한 뒤 1983년에 정비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무덤은 8기로 서쪽 높은 지대의 4기와 동쪽 낮은 지대의 4기이다.

<방이동고분군 지도>


   방이동고분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강제점령과 식민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전국적으로 고적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1911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古迹及遺物保存規則)>을 제정하기 위해 유적현황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방이동, 가락동, 석촌동 일대에서 백제초기 고분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측량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고분분포도가 1917년에 공개되어 백제고분군의 존재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방이동고분군 안내도>


   그러나 방이동고분군은 세상에 알려진 후에도 한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다가 1973년 민간인 집 뒷산 언덕의 흙이 산사태로 무너지는 바람에 그 곳에서 방이동고분 제1호분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이렇게 시작이 되어 방이동 제4, 5, 6호 고분이 차례로 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방이동고분군1979년도에 사적 제270호로 지정되었고 고분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방이동고분군 제1호분>


   제1호분과 제4호분 그리고 제6호분 등은 깬 돌로 쌓은 궁륭식 천장의 돌덧널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백제 전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조사되었다. 도시개발로 사라진 제4·5호분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것은 10기 중에 4(1·4·5·6호분) 뿐이므로 나머지 무덤들(2·3·710호분)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궁륭식(穹窿式)은 네 벽을 모두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폭을 좁힌 다음 맨 위에 큰 돌을 올려 천장을 만드는 방식이다.

<방이동고분군 제2호분>


   무덤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제1호분은 당시 이미 도굴을 당했는지 토기 3점 이외에는 아무런 유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6호분에서 회청색 굽다리 접시를 비롯한 전형적인 신라토기들이 출토되어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성백제지역 이었던 서울 우면동, 하남 광암동, 성남 판교 등지에서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이곳 고분군이 백제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석촌동고분군은 이곳에서 약2남짓 떨어져 있다.

<방이동고분군 중 남쪽고분>


   석촌동고분군 입구 마을 소공원에는 <돌마리애향비> 용을 머리에 이고 서있다. 아마 석촌동의 석촌(石村)’이 순 우리말로 돌마리또는 돌마을이라는 뜻과 같은 것 같다. 일제 초기만 하여도 흙무덤[封土墳] 23, 돌무덤 66, 합하여 89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8기의 무덤만이 남았다고 한다. 주차장 북쪽으로 하여 고분군에 들어서자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돌무지무덤이 먼저 보인다.

<돌마리애향비>

<석촌동고분군 지도>


   이 돌무지무덤은 A호 적석총(積石塚)이라고 하며 안쪽에 지름 11.4의 흙무지 봉분이 있고, 바깥쪽에는 한 변의 길이가 16인 직사각형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7년 발굴조사에서 돌널무덤 3기와 돌무지 옴무덤 2기의 뚜렸한 윤곽이 안쪽 바닥면에서 발견되었으나, 돌무지무덤이 파괴된 다음에 만들어진 무덤일수 있어서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의 관련성은 분명치 않다고 한다. 내원외방형은 고대 우주관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진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표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석촌동내원외방형고분>


   관람의 편의를 위해 맨 남쪽에 있는 제5호분부터 보고 북쪽으로 올라온다. 5호분은 지름 17, 높이 3의 원형 봉토분(封土墳)이다. 이 봉토분은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정비 복원할 때 내부조사는 하지 않고 봉분의 흙을 쌓은 방식만 확인하였다. 특이한 것은 큰 흙무덤으로 보이지만 무덤의 주인공은 여럿으로 하나의 단일한 봉토로 덮어 나가다가 봉토 중간에 지붕을 덮고 그 위에 흙을 얹어 봉분을 마무리한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으로 토착민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석촌동고분군 제5호분>


   제5호분 북쪽 바로 옆에 있는 제1호분은 이미 훼손되어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발굴조사 결과 무덤 2개가 남북으로 이어진 쌍분으로 확인되었다. 북쪽 무덤은 3세기 중엽에, 남쪽 무덤은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한다. 두 무덤 기단부의 크기가 비슷하며 공간을 진흙으로 매우고 서쪽으로 길게 돌을 덧쌓아 연결한 구조이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금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무덤은 부부합장묘로 북 분은 토착 계 부인 묘로, 남 분은 고구려 계 남편 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석촌동고분군 제1호분-네이버캡쳐>


   제2호분은 돌로 덮힌 봉우리 모습으로 주변에 민가와 돌담장이 세워져 있었으나 1985년 석촌동고분군 정비계획에 따라 복원되었다. 겉모습은 돌무지무덤이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백제 식 돌무지무덤이다. 서북쪽 모서리 지점에서 나무 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든 것으로 흙무지 널무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확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2호분에서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곱다리 접시와 곧은입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석촌동고분군 제2호분>


   제4호분은 맨 아랫단 길이가 17가량의 사각형 3단으로 된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겉 모습은 완전한 돌무지무덤이지만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 있어서 고구려 식 돌무지무덤과는 다른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불린다. 주검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져 쌓은 지점 3군데에서 따로따로 확인되었다. 무덤 안에서 특별한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돌무지 속에서 기와 벽돌 토기 등의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돌을 쌓은 방식으로 보아 4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촌동고분군 제4호분>


   맨 북쪽에 있는 제3호분은 동서방향의 길이가 50.8, 남북의 길이가 48.4의 사각형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큰 돌을 깨서 3단 이상 쌓았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 여러 채의 민가가 무덤 위에 있어서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지만 최소 4.5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무덤은 땅을 잘 고른 후 4050두께로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위로 자갈 등을 차례로 깔았다. 무덤이 훼손된 뒤에 발굴조사를 했기 때문에 주검이 묻힌 자리는 찾지 못하였으나 중국 동진시대의 도자기 조각, 금으로 만든 얇은 양식 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 무덤은 45세기 백제 왕릉으로 보이며, 학계에서는 근초고왕릉으로 추정한다.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석촌동고분군에는 제2호분 동쪽 옆에 제2호움무덤과 내원외방형 서쪽 옆에 제3호움무덤이 큰 무덤들 사이에 외톨이처럼 끼어 있다. 움무덤[토광묘(土壙墓)]은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 무덤구덩이 작고, 특별한 바닥시설이 없다. 조사결과 석촌동 주변에는 움무덤이 많이 있었으며, 지배세력이 아닌 토착민들의 무덤 같다. 이들은 정치적 격변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한성백제가 끝난 후에도 이곳에서 오랜 삶을 영위해 온 것으로 추측이 된다.

<석촌동고분군 제2호옴무덤>


   석촌동고분군에서 북쪽으로 주택가를 비집고 얼마 안 가면 석촌호수(서호)가 지척이다. 석촌호수는 본래 송파나루가 있는 한강의 본류였다. 송파나루는 조선왕조 이전에는 한양과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뱃길의 요지였다. 옛날에는 한강의 토사가 지금 잠실 쪽으로 쌓여 형성된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있었는데, 1971년 부리도의 북쪽 물길을 넓히고, 남쪽 물길을 폐쇄함으로써 섬을 육지화 하는 대공사(한강 공유수면 매립사업)가 시작되었고, 그때 폐쇄한 남쪽 물길이 바로 현재의 석촌호수로 남게 되었고, 당시의 매립공사로 생겨난 땅이 현재의 잠실동과 신천동이다.

<석촌호수(동호)>

<석촌호수(서호)>


   지하철 2호선 잠실역으로 가는 석촌호수(서호) 북단에는 소위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있다.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의 막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청 태종이 세운 비석이다. 비신의 높이는 395cm, 너비 140cm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거대한 비석이다. 몽골문·만주문·한문의 3종류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음으로써 옛글자 연구의 자료로도 이용되고 있다.

<삼전도비 지도-석촌호수(서호)>


   이 비의 옆에는 비신이 없는 작은 귀부가 또 하나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 태종의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강요하는 청나라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 졌던 귀부가 용도폐기 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전도비>


   1963년에 사적 제101호로 지정된 이 비는 당초 한강변 나루터 인근에 세워졌으나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수난과 수차례 이설을 거듭해 왔다. 1980년대는 송파대로 확장 시 석촌동 289-3 주택가에 있는 아름어린이공원에 세워져 있던 비를 원래 위치를 고증하고 문화재 경관심의를 거쳐 20104월에 현재의 위치인 잠실동 47번지로 이전하여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수치스런 역사임에는 틀림없으나 사실을 직시하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 

 <삼전도비 귀부-뒤에 비신이 없는 귀부)>

지금까지 한성백제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적인 사실들을 대충 살펴보았지만, 패전의 역사가 얼마나 비참하고 왜곡되어 있는지 짐작이 간다. 아마 한성백제도 475년 고구려 3만 대군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가 처참하게 짓밟혔을 상황이 눈에 선하다. 더욱이 통일신라시대 때 더 처참하게 말살된 백제문화와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민족의 혼()까지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을 볼 때 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하남위례성 도성도>


   몽촌토성은 도시개발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주변 도시와 어우러져 어느 정도 모습을 보존하고 있지만, 풍납토성은 간신히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크다. 그리고 남한산자락의 낮은 구릉지역에 넉넉하게 자리 잡았을 방이동과 석촌동 고분군이 앞뒤좌우로 다 잘려나가고 겨우 명줄만 유지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더욱이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밑으로는 자동차지하차도가 설치되어 있고 지하철 9호선이 공사 중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영면(永眠)해야 할 영혼인들 편할 수 있을까?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며 미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아래 지하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