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성백제의 발자취를 따라서(1)

와야 세상걷기 2018. 2. 19. 16:56

한성백제의 발자취를 따라서(1)

(풍납토성, 2018217)

瓦也 정유순

    설 명절을 보내고 지하철 5호선과 8호선의 천호역 10번 출구로 나오자 한성백제왕도길길 안내판이 서서 반긴다. 안내판에는 풍납토성을 먼저보고 몽촌토성을 거쳐서 방이동고분군과 석촌동고분군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옛 한강을 따라 한성백제의 역사가 발달하였던 곳으로 풍납토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도읍을 정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1963년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지만 서울 인구의 급팽창으로 성벽을 제외한 성 안팎의 모든 곳이 개발되어 대규모 인구밀집 지역으로 변모한다.

<한성백제왕도길 안내지도>

<한성백제왕도길 위치도>


   온조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이복형제 유리(琉璃)가 태자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와 형인 비류(沸流)와 함께 고구려에서 빠져 나와 부아악(負兒嶽, 현 북한산)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폈다. 이때 오간, 마려, 을음, 해루, 홀우 등 열 명의 심복과 일족, 그리고 자신의 부족인 계루부의 수많은 백성이 이들의 뒤를 따랐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모형도-네이버캡쳐>


 -  열 명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河南)의 땅이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비옥한 벌판이 바라보고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막혀 있어서 하늘이 내린 험준한 지리적 이점이 있어 이곳이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다고 간하자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바다가 있는 곳에 살고자 미추흘(현 인천지방으로 추정)로 떠났으며,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들로 보좌토록 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기원전 18)이었다.

<풍납토성1>


   그러나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었다. 비류는 온조가 사는 위례성의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로서는 부끄러운 일로 고민을 하다가 병으로 죽고,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와서 십제에 귀속되었다. 이때 온 백성들이 온조를 따라 위례성으로 건너왔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백제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시작되어 지금에 이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참조>

<풍납토성2>


   안내판에서 천호대교 쪽으로 수십여 발걸음을 옮기자 좌측으로 흙으로 쌓은 높은 언덕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바로 풍납토성이다. 이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수없이 이곳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 세월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산책로로 조성돼 시민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풍납토성은 언덕이 멀리까지 이어져 있어 제법 웅장해 보인다. 1600년 전 이전의 백제시대에 사용했을 때는 얼마나 더 컸었는지 상상만 할 뿐이다.

<풍납토성과 아파트>


   백제는 한반도의 고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해양국가이다. 한성백제(BC18475)는 백제의 700여년 역사 중 500년간 한성(현 서울)에 수도를 두었던 시기를 말한다.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왕성인 위례성을 건설하고 풍요롭게 살며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 피웠다. 4759,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대군의 공격으로 백제 제21대왕 개로왕(21)은 전사하고 위례성은 고구려에 함락되고 도읍을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한다. 이렇게 하여 위례성은 점차 흔적마저 땅 속에 묻혀 한성백제는 잃어버린 왕국이 되었다.

<풍납토성-멀리 롯데월드타워가 보임>


   그 후 1600년 동안이나 지하에 묻혀 있던 한성백제의 역사가 1997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풍납동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굴삭기에 훼손되어 영원히 사라질 뻔 했던 한성백제의 왕성유적을 선문대학교 학술조사단 이형구교수가 발견한 것이다. 이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발굴과정에서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왕성이며 백제의 위대한 건축기술이 반영된 유적지란 학설이 힘을 얻게 된다. 백제의 역사를 통해 서울은 로마나 아테네에 버금가는 2000년 역사를 간직한 역사고도임을 확인하게 된다.

<풍납토성 유물발굴 터>


   물론 그 이전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토성이 유실되면서 다리가 셋 달리고 자루가 있는 작은 그릇 청동초두와 금 귀걸이, 금 허리띠, 유리옥, 수막새 등 화려하고 비중이 큰 유물들이 발견되어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일본학자 야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934년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곳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했으나, 국사학계의 원로로 군림한 이병도(李丙燾)는 하남시 춘궁리일대의 이성산성을 주장하여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은 긴 겨울잠에 빠져든다.

<청동초두-네이버캡쳐>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이 긴 직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추정된다. 서벽은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 강물의 범람으로 유실되었지만, 직선에 가까운 짧은 북벽과 남벽이 남아있고 일부 남아 있는 동벽은 남북의 벽보다 훨씬 긴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동쪽 성벽 두 곳을 199910폭으로 절개하여 발굴하였다. 그리고 이듬해까지 풍납1동 일대 경당지구를 발굴하여 엄청난 양의 유물이 수습되어 이곳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축적되었다.

<한성백제시기 풍납토성의 공간 구분>


  한강변의 평지에 세운 성벽은 나무와 판자로 틀을 만든 다음 거기에 흙을 붓고 다져서 켜켜이 쌓아올리는 이른바 판축 기법으로 쌓았는데, 전체 길이 3,470m, 지하 9m쯤에 위치하는 하부 폭 40m 남짓, 높이는 대략 915m 안팎의 사다리꼴 단면을 띠고 있다. 성벽을 포함한 성 내부의 면적은 226천 평에 달해 이웃한 몽촌토성의 두 배에 가깝다. 성벽 밖으로는 자연형 하천이 방어용 해자(垓字)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규모로 보면 삼국 이전의 평지성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고 한다.

<풍납토성 실물크기의 축성모형도>

<풍납토성 실물크기의 축성모형도>


   그리고 이만한 규모라면 수백 만 톤의 흙이 필요하고 연인원 230만 명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로 추측이 된다.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된다는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가진 국가만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중국의 경우 제후의 성이나 한()나라 때의 왕성이 모두 판축토성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풍납토성이 왕성일 가능성이 높다

  <풍납토성의 축조 및 단면도>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왕이 제사드릴 때 제물로 바치는 말머리 뼈가 나왔고, 고위 관직명으로 추측되는 대부(大夫)’라고 새겨진 토기 조각이 출토된 것은 한성백제의 통치체제를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당지구 안에는 우물터도 있는데, 단순히 식수를 확보하기 위한 우물이 아니라 물이 들어오고 빠지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형 대형 건물터도 발견되는데 이는 일반 주거지가 아니고 성스러운 신전을 모시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거나 왕궁의 부속건물이 아닌 가 추측이 간다.

<우물 터-지금은 음수대가 있음>

 <발굴 당시의 우물모습>

<呂자형 건물 발굴지>


   그리고 풍납토성 주변의 어디라도 발굴을 하면 기와나 전돌(예전에 왕궁, 사찰, 왕릉 따위의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데 쓰던 벽돌)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바닥에 전돌을 깔고 지붕은 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추정된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궁궐이나 관청 따위 주요 공공건물 이외에는 기와를 사용할 수 없었음은 상식에 속한다. 다시 말해 전돌과 기와의 존재 역시 풍납토성이 도성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전면8칸 측면5칸의 라-1호 건물지>


   그동안 풍납토성의 발굴에서 드러난 유적과 유물은 한 결 같이 왕성의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 예로 1,000여 평의 경당지구에서는 건물터 따위의 유적지 190여 곳, 각종 토기와 기와, 전돌, 초석을 비롯한 500상자 분량의 유물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몽촌토성 전체 발굴 유물과 맞먹는 정도다. 이처럼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진 경우는 국내에서 경주 말고는 달리 없다고 한다. 이만큼 유물의 집중도가 높다는 것은 그곳이 과거 인구밀집 지역, 곧 큰 도시였음을 의미한다.<네이버 지식백과 답사여행의 길잡이 15-서울인용>

<풍납토성 남북도로의 도로면>


   풍납토성 성벽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결과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전후로 축조가 완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백제의 건국시기도 BC 18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고대강국으로서 백제가 존재하지 아니하였을까 하는 마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다. 그러나 그동안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5만 여명이 밀집하여 사는 성 안팎의 주거지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더 어려운 과제가 목전에 봉착해 있다.

<풍납토성 안의 여가시설>

<아파트에 둘러싸인 풍납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