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주의 역사를 찾아서(1)

와야 정유순 2018. 1. 16. 01:51

공주의 역사를 찾아서(1)

(2018113)

瓦也 정유순

1. 공산성(公山城)

   며칠 계속되던 추위의 칼끝은 조금 무뎌진 것 같으나 새벽부터 하얀 눈이 바람타고 너울너울 춤을 춘다. 바람에 날리는 품새로 보아서는 제법 많이 내릴 것 같았으나 옛날 고마강으로 불리던 금강 둔치 금강신관공원에는 서설(瑞雪)만 가득할 뿐 눈발은 날리지 않는다. 강 건너에는 한 때 백제의 왕도로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한 곳인 공산성에도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 역사의 속살을 엿볼까하여 금강교를 건너 살며시 공산성으로 다가간다.

<공주 공산성 지도> 

<공주 공산성을 배경으로>


   백제의 22대 문주왕(文周王) 원년(475) 고구려군의 남진에 밀려 부왕인 개로왕(蓋鹵王)이 전사하자 급히 웅진(熊津)으로 옮겨 5대왕 64년간(문주왕 2, 삼근왕 2, 동성왕 22, 무령왕 22, 성왕 16) 백제의 왕도로 내려오다가 백제의 중흥을 꿈꾼 성왕이 538년 사비성(泗泌城, 현 부여)으로 천도하여 잊혀 진 도읍이 되었다. 공주(公州)라는 이름은 지금 공산성이 있는 산이 ()’자를 닮았다 하여 공산(公山)이 되었고, 산의 이름을 따서 고려태조 23(서기 940)공주(公州)’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공주 공산성의 설경>


   공산성(公山城)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후부터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다. 백제의 왕도였던 시절에는 왕성을 수호하기 위한 토성(土城)으로 당시에는 중심 산성이었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금강 건너 공주 신시가지>


   금강교를 건너와서 비탈길을 갈지자로 걸어 올라가면 처음 당도하는 곳이 금서루이다. 금서루(錦西樓)는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 등의 문헌과 지형적인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지금의 문루는 본래 서문에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어졌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되었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강교>

<공주 공산성  입구>

<금서루-안쪽>


   금서루 위로하여 성벽을 밟고 올라가면 성곽에서 정상 쪽으로 쌍수정이란 정자가 나온다. 쌍수정(雙樹亭)1734(영조 10)에 관찰사 이수항이 조선조 제16대 임금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쌍수(雙樹)가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지었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인조(仁祖)1624년 이괄의 반란으로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이곳에 있던 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어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리다가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한 나머지 쌍수에 정삼품의 벼슬을 내리고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쌍수정>


   또한 인조가 공주에서 피난 중에 콩고물을 무친 떡을 진상하였는데 왕은 시장한 참에 떡 맛을 보면서 맛이 있는 떡 이름을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어느 댁에서 만들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옆에 있던 신하들이 공주시 우성면에 사는 임씨 댁에서 만들었다고 하자 그것 참 맛이 절미(絶味)로다라고 하여 임씨가 진상 했다하여 임절미(任絶味)’로 부르다가 발음이 편한 인절미로 바뀌었고, 공주사람들은 공주떡으로도 부른다.

<인절미-네이버캡쳐>

   쌍수정을 지나면 진남루가 나온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두 석축기단에 걸쳐서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은 조선 초기의 일로 이 진남루 역시 그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수축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진남루>


 진남루를 지나 다시 성벽을 오르면 영동루가 기다린다. 영동루(迎東樓)는 공산성의 동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조사를 하여 건물의 하부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이고, 옆 양쪽에서 문지석을 원래대로 찾았다고 한다. 발굴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철종10)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2층 문루를 복원하였다. 없어 진 문루의 명칭은 2009년 시민공모를 통해 영동루라고 지었다. 아마 동녘의 밝은 해를 영접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영동루>


  영동루를 지나면 나라를 다시 찾은 기념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광복루는 먼발치로 눈인사만 한다. 광복루(光復樓)는 공산성 최고봉에 있는 누각이다. 원래는 성안에 군사가 주둔했던 중군영(中軍營)으로 공북루(拱北樓)의 서쪽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불렀다. 해방 후 1946년 백범 김구(白凡 金九)와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이 이곳에 와서 이 누각을 보고 나라를 되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광복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광복루>


  광복루 바로 옆에 있으며 백제 동성왕(東城王) 재위 22년에 지어진 건물인 임류각(臨流閣) 역시 그냥 지나친다. 임류각 옆에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세 장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인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가 있다. 비신(碑身)은 박리현상으로 인하여 비문이 선명하지 않다. 일재강점기 때 비에 새겨진 왜구(倭寇) 등의 글자를 뭉개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두었던 것을 광복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197618일 충남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임류각>

<명국삼장비-네이버캡쳐>


   윤달에 성을 밟으며 소원을 비는답성(踏城)놀이를 하듯 성벽을 돌다보니 성곽의 북쪽을 걷고 있다. 성곽의 북쪽은 금강을 접하고 있는 단애(斷崖)이다. 동쪽의 가장 높은 성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급경사 계단 밑 안쪽으로는 임진왜란 때 승병이 훈련하였고 인조가 이괄의 란 때 잠시 머물렀던 영은사(靈隱寺)가 있으며, 강변 쪽으로는 만하루(挽河樓)와 연지(蓮池)가 있다.

<영은사>


   만하루는 조선 영조 때에 건립된 누각이다.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자리 잡은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 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조사로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1984년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8각으로 다듬어진 기둥 받침돌과 기단석 디딤돌 등을 원형 그대로 이용하였다.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다. 강변에 가까이 위치하여 쉽게 물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만하루와 연지>


   다시 성벽 언덕을 숨 가쁘게 오르면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가 나온다. 조선시대 한겨울 맑은 금강물이 꽁꽁 언 얼음을 때어내 왕겨에 싸서 얼음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더운 여름에 꺼내 썼다. 그후 일제강점기 떼엔 한약재와 함께 얼음을 보관하기도 했다고 하며, 누에의 알을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해 주는 잠종 저온창고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석빙고>


   얼음 창고를 지나 다시 아래로 내려가면 공북루가 기다린다. 공북루(拱北樓)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 통로로 이용되었다. 1603(선조36) 이 자리에 있던 망북루 터에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아래는 성으로 통하는 통로이며 위는 마루로 만들어 강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건물 안에는 많은 글과 시 등이 걸려 있어 풍취를 더해 주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로 평가 받고 있다.

<공북루>


   공북루 앞에는 성안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공북루와 진남루를 가로질러 서울로 오가는 관리들의 주된 통행로였는데, 조선 말엽에 공산성과 군영의 기능을 상실한 후 군영 터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안마을의 토지는 일제강점기 초기 공주갑부 김갑순이라는 사람에게 팔려 큰 쌀 창고가 생겼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시장이 열리자 쌀 창고에서 시내로 쌀을 운반하기 위해 만든 길이 서문으로 통하는 서문고개라고 한다.

<성안마을과 서문고개>


   공북루에서 성곽을 따라 숨 가쁘게 올라가면 공산정이 있다. 공산정(公山亭)은 공산성 서북쪽에 있는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명소로 특히 금강 낙조와 야경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랑거리라고 한다. 누각의 명칭은 유신대(維新臺), 전망대 등으로 불러오다가 2009년 시민공모를 통해 공산정으로 이름 지어졌다.

<공산정 전경(후면)>

<공산정>


   660년 백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사비(부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와서 항전하였으나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는 공산성을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데 거의 오전이 지나간다. 조금 이르게 점심을 하고 천주교의 성지인 황새바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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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