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주의 역사를 찾아서(2)

와야 세상걷기 2018. 1. 17. 01:56

공주의 역사를 찾아서(2)

(2018113)

瓦也 정유순

2. 황새바위와 고마나루 등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조선시대 돌아가신 조상을 부정하고 제사를 배척하는 신앙행위에 대한 박해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충청도 각지에서 체포된 신도들이 감영이 있었던 공주로 끌려와 수백 명이 순교를 당했던 대표적인 곳이 황새바위다. 이름이 밝혀진 분 만 307위에 이르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무연고 순교자들의 거룩함이 서려 있는 곳이다. 황새바위는 황새가 서식하던 곳또는 죄수들의 목에 씌운 칼이 황새모양이라 황새바위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황새바위 표지석>

<황새바위 성역 지도>


   황새바위 입구에서 계단으로 올라와 좁은 문을 통과하면 우측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채 놓여 있는 열두 개의 돌기둥은 열두 사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비석이라고 한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시편 11822)” 시편 구절이 열두 개의 빛 돌(Twelve Stone of Light)’을 설명해 준다.

<좁은 문>

<12기의 석상>


   좌측으로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하여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기 몸을 파기하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 진리만을 따르신 높은 뜻을 기리고 이를 본받기 위하여 한국교회 200주년이 되는 해에 높이 13.8, 너비 3×3의 순교탑(殉敎塔)을 새웠다.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의 카페 몽마르트 앞을 지나 십자가의 언덕과 십자가의 길 등을 돌아보고 제민천을 따라 정지산유적지로 발걸음을 돌린다.

<순교탑>


   오전보다 기온이 올라가자 눈은 물기를 머금고 신발바닥에 달라붙어 발걸음이 무뎌진다. 터덕터덕 올라간 정지산유적(艇止山遺蹟)은 해발 5758내외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았다.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의 발굴결과 국가의 주요시설에만 사용되는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수막새가 발견되었고, 이외에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받침 등 국가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국가차원의 제의(祭儀)시설로 추정된다.

<정지산 이정표>


   또 이 유적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매지권(買地券)에 기록된 신지(申地), 유지(酉地)의 방향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이 무령왕릉에 안치되기까지 23년간 시신이 수습되어 보관된 곳일 가능성이 제게되고 있다. 특히 건물의 기둥을 받쳐주는 초석이 없는 건물로 제작되어 영구적인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과 유적지 내의 대벽건물지(大壁建物址)에서는 얼음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되어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 해준다.

<눈 덮힌 정지산 유적지>


   정지산유적지에서 뒤로 돌아 나와 솔숲이 우거진 길로 접어들면 송산리고분군이 나온다. 공주시 금성동(옛 지명이 공주읍 송산리)에 있는 고분군으로 송산의 남쪽 경사면으로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의 백제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현재는 무려왕릉을 포함하여 제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6호분과 무열왕릉은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으로 구분한다.

<송산리고분군 지도>


   송산리 제14호분은 백제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으로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가운데 처음 발굴된 유적이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4기만 복원되어 있다. 무덤은 대부분 도굴되었으나 널방의 바닥에서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 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

<껴묻거리>


   송산리 제5호분은 1932년에 우연히 발굴되어 조사가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 동서 너비 3.26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1매의 판석을 얹어 천장을 돔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 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굴로 인하여 겨우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 못만이 남아 있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송산리고분군>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송산리 제6호분은 5호분과는 달리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 동서 너비 2.24이다. 널방은 동전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다.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놓았던 관 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령왕릉의 발견이다. 무령왕릉은 1971년 여름 송산리 제5호분과 제6호분 사이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주종을 이루는데, 이 고분군에는 축조한 벽돌무덤[전축분(塼築墳)]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무령왕릉은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진묘수(鎭墓獸)>


   그리고 무령왕릉 발견 이후 초기에는 고분의 내부를 공개하여 관람 할 수 있었으나, 송산리 고분군은 보존상의 문제로 1997715일부터 문화재청의 영구 비공개 결정에 따라 내부관람이 중지되었다. 대신 옆에 실물과 똑같은 송산리고분모형전시관을 만들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武寧王)462년 일본에서 태어나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일본의 섬에서 태어났다 하여 이름이 사마(斯麻 또는 斯摩)이고, 8척 장신에 인자한 성품이다. 늦은 나이지만 즉위 직후 반란세력을 진압하여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통제를 강화한다.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경제를 든든히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지속해 한강일부를 수복하였다. 백제는 무령왕의 강력한 통치를 바탕으로 왕권국가를 재건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

<무령왕 상>


   고분군에서 국립공주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는 공주 숭덕전(崇德殿)이 있다. 이곳 숭덕전은 백제국 시조 온조왕(溫祚王)을 비롯하여 웅진백제시대의 문주왕(文周王), 삼근왕(三斤王), 동성왕(東城王), 무령왕(武寧王)의 위패를 모신 전각으로 백제왕조의 옛 영광을 기리는 곳이다. 20179월에 준공된 숭덕전은 매년 백제문화제가 열리는 첫날에 웅진백제대왕 추모제를 올리며 백제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뜻으로 선조들의 덕을 기리고 있다.

<숭덕전 입구-웅진백제대왕묘>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이 옮겨진 이후 이렇다 할 이슈 없이 충청감영도 없어졌으며, 1932년에는 충청남도 도청도 대전(大田)으로 옮겨져(지금은 내포에 도청이 있음) 조용하기만 하던 곳이, 1971년 우연한 계기로 발견된 무령왕릉은 잊혀 져 가던 웅진백제를 다시 일깨웠고, 공주를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로 탈바꿈 시켜 놓았다.

<무령왕과 왕비 목관>


   국립공주박물관은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된 무령왕릉과 대전·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8, 보물 4점을 포함한 30,000여 점의 문화재를 수집·보관하고 있다. 학술적 가치가 높은 중요유물은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매년 다양한 주제의 특별전을 개최하여 우리의 문화를 국내외에 널리 소개하고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서혈사지에서 발굴된 석불 좌상>


  따라서 우연히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무령왕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공주도 역사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국립공주박물관 화단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금송이 심어져 있다. 무령왕의 목관을 금송으로 만들어져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기적으로 가까운 일제강점기를 생각하면 다른 곳도 아닌 국립박물관에 심어져 있다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아닌 가 생각해 본다.

<박물관 일본금송>


   대충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바로 이웃에 선화당(宣化堂)이 나온다. 선화당은 각 도의 관찰사가 사무를 보는 정당(正堂)’이다. 충청감영은 조선 초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1602(선조35) 충청도관찰사 유근(柳根)건의로 공주 공산성으로 이전하였다. 1653년에는 관찰사 강백년(姜栢年)이 봉황산 아래 지금의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일대에 자리 잡게 된다. 1932년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된 후 일제에 의해 대부분이 헐리고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문루, 동헌 등의 건물만 이전하여 복원했다.

<선화당>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는 시간에 충청도포정사 주변으로 펼쳐진 한옥마을로 접어든다. 한옥마을에는 한옥체험을 하려고 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한다. 전국 곳곳에 한옥마을을 조성하여 운용하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전부가 기와집만 눈에 띤다. 분명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옛날의 마을에는 기와집 보다 초가집이 더 많았을 텐데물론 운영상의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충청도포정사 건물>

 <한옥마을>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고마나루로 간다. 이곳은 무령왕릉 서쪽으로 낮은 구릉상의 금강 변과 나루터 일대, 연미산 지역을 아우른다. 고마나루는 곰나루라고도 부르며 공주의 태동지(胎動地)이자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는 유서 깊은 명승지이며 한자로 웅진(熊津)으로 표기한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熊川州), 경덕왕 때는 웅주(熊州)라 하였고, 940년 고려 태조 때 공주(公州)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

<고마나루 지도>


   이곳은 백제 문주왕이 웅진 천도 시 이용하였던 교통로였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 공격을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주둔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던 곳으로서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이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1010년에는 고려의 현종이 1624년에는 조선의 인조가 이 나루를 통해 공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마나루 솔밭>


   또한 곰과 관련된 전설로 연미산(燕尾山)의 암곰이 공주의 나무꾼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살다가 나무꾼이 도망을 가자 새끼들을 차례로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자신도 빠져 죽었는데, 그 후 곰의 원혼이 금강에 풍랑을 일으켜 나룻배를 뒤집히게 하자 이를 위로하기 위해 곰 사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니 무사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곰사당-웅신단>


   곰사당[웅신단(熊神壇)]을 둘러보고 고마나루 솔밭을 한 바퀴 돌면서 곰의 흔적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서설(瑞雪)이 내려 솔밭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고마나루에서 하류 쪽으로 공주보가 물길을 가로 막고 서있다. 금강변의 넓은 백사장과 솔밭이 아름다움을 더 했으나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공주 보는 백사장을 다 삼키고 초대 받지 않은 손님처럼 이유도 모른 체 곰나루를 바라보고, 다시 깨어나는 웅진백제의 숨소리가 고동을 친다.

<웅신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