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남 고성과 통영-送舊迎新

와야 정유순 2018. 1. 4. 17:59

경남 고성과 통영-送舊迎新

(20171231201811)

瓦也 정유순

   곡성의 남도 맛에 취해 곤한 잠을 자고 경남 고성(固城)으로 가기 위해 새벽조반으로 한 해 마지막 날을 시작한다. 버스에 올라 깊은 잠에 빠졌다가 눈을 뜨니 벌써 경남 사천시 서포면을 지난다. 조선 숙종 때 이웃의 섬인 남해로 유배 왔을 때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과 깊은 인연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김만중(16371692)은 국문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의 저자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고성공룡박물관>


   서포에서 사천대교를 건너면 삼천포가 나온다. 삼천포는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로 더 유명한 곳으로, 고려 성종 때 조세미를 운송하기 위한 통양창(通陽倉)을 설치하였는데, 수로로 개성까지 삼천리나 되는 먼 곳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원래 행정중심으로 발전한 곳이 아니고 포구로서 성장한 곳으로 1956년부터 시()로 이어오다가 19955월 도농통합 때 사천군과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

<삼천포항-네이버캡쳐>


   삼천포를 지나 도착한 곳은 공룡발자국이 있는 고성 상족암 해변이다. 상족암 해변 언덕에는 고성공룡박물관이 상징적으로 보인다. 상족암(床足岩)은 켜켜로 쌓아놓은 시루떡을 연상시키는 수성암 덩어리이다. 생김새가 밥상다리 모양 같다고 하여 상족(床足) 또는 쌍족(雙足)이라고도 불린다. 바위 곳곳에는 파도에 씻겨 생겨난 깊숙하고도 기묘한 굴이 이리저리 미로를 만들고 있어 신비롭다. 이 굴이 선녀들이 하강하여 석직기(石織機)를 차려 옥황상제의 비단옷을 짰던 곳이라는 전설도 전해온다.

<상족암>


   공룡(恐龍, Dinosaur)이란 겉모습이 도마뱀이나 악어를 닮은 동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225백만 년 전인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지구상에 처음 나타나 약65백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말까지 무려 16천만 년 동안 지구를 지배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공룡은 육지에 살았던 동물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크며, 가장 무거운 동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룡 중 많은 종류는 초식공룡도 많아 성질은 순한 것도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공룡-네이버캡쳐>


   데크로 되어 있는 해변 길을 따라 공룡발자국을 추적해 본다. 상족암으로 가는 데크 끝 지점에는 낙석방지를 위한 출입금지 구역이지만 백악기에 형성된 기암괴석들은 넘어 오라고 유혹한다. 파도가 출렁이며 부딪힐 때마다 켜켜이 쌓였던 전설들이 노래되어 흘러나온다. 미로 같은 길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며 숨바꼭질하던 어린 시절이 공룡의 미소가 되어 피어오른다.

<상족암의 미로>

<상족암의 미로>

<공룡발자국>

<공룡발자국>

<공룡발자국>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는 천연기념물 제411호로 지정된 곳이다. 화석의 양은 물론 다양성에서도 세계적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목이 긴 초식공룡 용각류, 두 발 또는 네 발로 걷는 초식공룡 조각류와 육식공룡 수각류의 발자국이 있다. 공룡발자국이 포함된 지층 전체두께는 약150이며, 200여 퇴적층에서 약2,000여개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된다고 한다. 해안을 따라 약8까지 공룡발자국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제전마을까지만 보고 고성군 하이면 와룡리에 있는 운흥사로 이동한다.

<공룡구조>

<공룡구조>


   운흥사(雲興寺)는 쌍계사의 말사로 676(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1350(고려 충정왕 2)에 창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 15441610)이 승병 6천 명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군과 싸웠다. 또 이 때 충무공 이순신이 작전을 세우기 위해 이곳을 세 번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대웅전 등 전각이 불 탄 것을 1651(효종 2)에 다시 세웠으며, 1731(영조 7)에 재건되었다. 숙종 때부터 매년 음력 28일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재를 여는데, 이날은 임진왜란 때 승병이 가장 많이 죽은 날이라고 한다.

<운흥사 대웅전>

<운흥사 보제루>


   영산회괘불탱 및 궤· 운흥사소장경판 등 보물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보지 못하고 부속암자인 낙서암(樂西庵)으로 올라간다. 낙서암은 와룡산(579) 향로봉의 약8부 능선쯤에 있는 암자로 가파른 경사가 보통이 아니다. 운흥사 입구에서 직선거리로 1쯤 떨어진 낙서암은 낙서도인(樂西道人)이 수도를 했다는 곳이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서 그런지 낙서암의 약수 한 모금은 오장육부의 묵은 때가 씻어 지는 것 같다.

<낙서암 가는 길>

<낙서암 측면>

<운흥사 낙서암>


   다시 운흥사로 내려오는 길옆에는 1692(숙종 18) 응화선사가 창건한 천진암(天眞庵)이 조금이라도 쉬었다 가라고 반갑게 맞이한다. 몇 년 전에 운흥사에 왔을 때 보았던 장독대가 다른 공사로 철거하여 볼 수 없어서 서운했는데, 천진암의 장독대가 대신해 준다. 암자의 처마와 와룡산 능선 위로 펼쳐지는 쪽빛 하늘이 정답게 다가온다. 서로의 뿌리를 맞잡은 연리근 나무가 하늘로 우뚝 솟아 통영으로 떠나는 나그네에게 또 오라고 손짓한다.

<천진암>

<천진암의 장독대>

<천진암의 하늘>

<연리근>


   오후에는 고성과 통영의 경계를 이루는 벽방산으로 향한다. 벽방산(碧芳山, 650)은 석가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벽발(碧鉢-바리때)을 받쳐 들고 있는 모습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통영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벽방산에는 대한불교 법화종인 안정사와 부속암자인 가섭암과 의상암 등이 있어서 우선 가섭암으로 올라간다.

<벽방산 지도>


   가섭암(迦葉庵)669(문무왕 9) 원효대사의 제자인 봉진비구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중에 불타 없어진 것을 1644년에 벽봉(碧蜂)화상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가섭(迦葉)은 석가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석가가 죽은 뒤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 역할을 해냄으로써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리던 사람이었는데 가섭암도 혹시 이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안정사 가섭암>


   가섭암에서 의상암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산속에서 헤매다가 겨우 길을 찾아 안정사로 내려온다. 안정사(安靜寺)654(신라 무열왕1)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14()의 전각을 갖춘 전국 굴지의 큰 사찰이었다. 현존하는 당우 중 대웅전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된 정면 3, 측면 3칸의 건물인데 1358(공민왕 7)에 조성한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송설호(宋雪虎)1950년대에 이곳으로 와서 계속 중건하여 이 절을 법화종에서 가장 큰 사찰로 만들었다.

<안정사 만세루>


   대한불교 법화종(法華宗)은 고려시대의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종조(宗祖)로 하여 1946510일 정각(正覺)이 서울 성북동에 무량사(無量寺)를 지은 뒤 창종(創宗)18개 종단 중의 하나이다.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을 본체로 하여 일심삼관(一心三觀)과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익혀 중생을 교화하고 널리 불법을 펴서 호국함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으며, 신라의 원효(元曉)와 고려 제관(諦觀)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안정사 대웅전>


   세밑 태양은 벌써 서쪽으로 기운다. 일몰(日沒)을 보기 위해 산양읍 삼덕리 장군봉으로 바삐 움직인다. 미륵도로 건너가는 교량은 차들로 북적거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림자가 옆으로 길게 뻗을수록 마음은 비례하여 급해진다. 일몰을 30여분 남겨놓고 삼덕리마을제당 벅수 앞에서 몸도 마음도 바쁘게 냅다 장군봉으로 올라간다.

<삼덕리마을 제당 벅수>


    장군봉(將軍峯)은 산의 지형이 갑옷과 투구를 입은 장군의 모양과 흡사하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 고관(高官)이 말을 타고 세포곡(細浦谷, 산양읍 미수동 경계)에 이르면 갑자기 말이 주저앉아 버리든가, 아니면 다리가 부러져서 도저히 산양 쪽으로 없었으나 장군봉에서 목마(木馬)와 동마(銅馬)를 만들어 제사를 올린 뒤부터는 아무 사고 없이 통과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군봉은 임진왜란 당시 탁연장군 3형제가 이 산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아우 두 분은 전사하고 형은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장군봉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장군봉과 삼덕항>


   마지막 암봉(岩峯)을 밧줄로 의지하여 올라가 자리를 잡자마자 서쪽바다에 떠 있는 한려수도 너머로 기울기 시작한다. 자 오늘이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 지난 한 해 동안 행여 나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불편을 겪었던 분이 계신다면 조용히 용서를 빌어본다. 더욱이 나를 용서하고 주변의 모든 허물을 지는 해에 실어 보낸다. 미움과 욕심도 함께 날려 보낸다.

<낙조>

<낙조>


   드디어 새 날이 밝아온다. 숙소인 통영청소년수련원 위로는 미륵산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선 사람들을 케이블카로 부지런히 실어 나른다. 어김없이 새벽조반을 마치고 한산도로 가기 위해 통영항으로 바삐 이동한다. 통영의 아침바다는 명경(明鏡) 같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지난해의 미련을 다시 한 번 깨끗하게 씻어낸다. 동녘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태양이 순식간에 솟아오른다. 엄숙하게 금년 한 해의 소망과 희망을 빌어본다. 우선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빌었고, 젊은이들이 제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일출직전>



<일출>


   임진왜란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열린 한산도 선착장에 내려 먼저 제승당으로 향한다. 한산도(閑山島)의 지형은 북쪽으로 만()을 이뤄 천연의 포구이다. 그래서 바다라기보다는 요트가 유유자적 할 수 있는 잔잔한 호수 같다. 바닷바람 때문에 조금 쌀쌀하지만 하늘은 좀처럼 보기 드문 쪽빛 하늘이다.

<통영 앞바다>

<한산만의 요트>


   선착장에서부터 약1떨어진 곳에 있는 제승당(制勝堂)은 충무공 이순신의 수군작전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원래 이곳은 운주당(運籌堂) 터이다. 이충무공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는 곳을 편의상 운주당이라고 불렀는데, 1740(영조 16)에 통제사 조경(趙儆)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한데서 비롯되었다. 이충무공은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당포승첩(唐浦勝捷) 후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하여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준 곳이다.

<충무문>

<제승당>

<한산대첩도>


   충무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승리를 만드는 건물제승당이 나오고 우측으로 수루(戍樓)가 나온다. 수루는 이충무공의 시 <한산도가(閑山島歌)>에 나오는 그 수루이다. 이곳은 일종의 망루로서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나라를 구해달라고 기도하며 우국충정의 시를 읊은 곳이다. 왼쪽 바다 건너 미륵산이 지척이다.

<한산도가(閑山島歌)>

閑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한산도월명야 상수루무대도)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심수시하처 일성강적갱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수루>

<한산도가-시비>

 <수루에서 본 통영 앞바다>

<미륵산>

 

   수루의 맞은편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영정은 종이품(從二品) 통제사(統制使)의 관복차림으로 그려져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덕수 이 씨(德水 李氏)15453월 한양의 건천동(현재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632세의 나이에 과거시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수행하여 오다가 158945세의 나이에 정읍현감을 지냈고, 1591년에 전라좌수사에 제수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을 시작하여 연전연승 하였고, 15981119()노량해전에서 54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충무사 입구-홍살문>

<충무사>

<이충무공 영정>


   사당에서 장군의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을 기리며 향불과 묵념의 예를 올리고 제승당 뒤편 아래에 있는 한산정으로 간다. 한산정(閑山亭)은 이충무공이 장졸(將卒)들과 함께 활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여기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약145의 거리로 활터와 과녁사이에 바다가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이충무공이 이곳에 활터를 만든 것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하여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의 적응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다.

<한산정>

<과녁>

<한산정과 과녁>


   제승당을 나와 한산도 산길을 걸어도 보고 노란 유자가 매달려 있는 섬길을 거닐다가 다시 통영항으로 나와 산양읍에 있는 달아공원으로 이동한다. 달아공원은 통영시 남쪽의 미륵도 해안 산양일주도로 중간에 있다. ‘달아라는 이름은 이곳 지형이 코끼리 어금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는데 지금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통영 시민들은 보통 달애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산도 산길>

<한산도의 유자>

<달아전망대>

<달아전망대에서 본 한려수도>


   오후에는 박경리기념관에 가는 길목에 산양읍 삼덕리에 있는 당포성지(唐浦城址)를 둘러본다. 이 성은 고려 공민왕 23(1374)에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최영장군이 성을 쌓고 왜구를 물리친 전승지이다. 임진왜란 때도 이순신장군이 이 성을 이용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성은 2중 기단으로 된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석축진성(石築鎭城)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의 길이는 752, 높이 27, 너비는 45이다.

<당포성지>

<당포성지 정자>


  산양읍 신전리에 위치한 박경리기념관은 여류소설가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여 4대에 걸친 인물들을 통해 민중의 삶과 한을 새롭게 부각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을 기념하고 작가의 문학에 끊임없이 영향을 준 정서적 양식인 고향을 소개하여 박경리선생의 문학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건립한 곳이다.

<박경리기념관>

<박경리  묘>

<박경리 묘에서 본 한려수도>


   그러나 아쉽게도 휴일이라 안에는 입장을 못하고 주변의 공원과 박경리선생의 묘소만 들러본다. 묘소는 둘레석이나 비석이 없고 상석만 놓여 있는 소박한 묘이다. 묘역 앞으로 훤하게 트인 한려수도의 조망은 유택에 누워 있어도 또 다른 대하소설을 구상하기에 딱 좋은 장소 같다. 돌아 나오는데 선생의 동상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표정이다. 선생의 말씀처럼 송구영신(送舊迎新) 여행을 하면서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볍다.

<박경리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