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서울남산
(2017년 11월 8일)
瓦也 정유순
가을바람 소소(蕭蕭)하고, 낙엽은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길 위에 떨어져 가을이 지나간 자국만 남기는 계절에 서울남산의 둘레 길을 걷기 위해 지하철3호선 동대역 입구인 장충공원으로 나간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2절 첫 소절에 나오는 가사다. 여기에서 남산(南山)은 ‘서울의 남산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마을의 앞산을 대개 남산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남산은 우리들 모두의 고향 앞산이다.
<서울 남산>
오늘 서울남산의 출발지인 장충단(獎忠壇)은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초혼단(招魂壇)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명성황후 민비가 시해된 을미사변과 구식군인들의 처우불만으로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순직한 충신과 열사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최초의 현충원(顯忠院, 국립묘지)으로 장충단공원과 국립극장은 물론 그 주변의 호텔과 대학교 등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장충단구역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장충단터 표지석>
봄가을로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았는데,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장충단이 폐지되고 1920년대부터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어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특히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육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3용사의 동상과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는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 일제는 박문사 건축에 광화문의 석재,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가져와 썼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 정문으로 삼는 일을 저질렀다.
해방 후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 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장충단 본 건물과 부속건물은 파손되었으나 순종황제가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 장충단비(서울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만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현 호텔신라) 내에 있었던 것을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편으로 옮겨 왔다.
<장충단비>
수표교(水標橋)는 원래 청계천에 있던 물의 수위를 측정하는 다리였으나, 복계공사 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가 다시 복원 되었어도 폭이 맞지 않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교각에는 영조 때 새긴 “경진지평(庚辰地平)”이란 글씨가 선명한데, 이는 토사가 많이 내려와 준설을 할 때, 이 글씨가 나올 때 까지 흙을 퍼냈다는 것이다. 그 준설토가 쌓였던 곳이 지금의 방산시장이 있는 곳이다.
<수표교>
<경진지평(庚辰地平)비>
장충단공원에서 시작하여 한남동 쪽 큰 길을 따라 가면 동국대학교 입구에 서있는 유관순열사 동상 앞으로 하여 3∙1독립운동기념탑을 지나 국립극장으로 진입한다. 유관순(柳寬順, 1902.12∼1920.9)열사는 십대의 어린나이에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어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순국(殉國)하고 만다. 이태원 공동묘지에 시신을 수습했으나 현재는 실전(失傳)되고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유관순열사 동상>
3∙1독립운동기념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된 3∙1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ㆍ발전시켜 널리 국민들의 호국애족정신을 고양하고자 건립되었다. 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제50주년 기념일에 착공하여 3∙1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 준공하였으며, 탑의 높이가 19m 19cm로 이는 3∙1독립운동의 거사일인 1919년을 의미한다.
<3∙1독립운동기념탑>
국립극장(國立劇場)은 1950년에 창립되어 명동의 시공관에 있다가 1973년 10월에 현재의 서울 중구 장충동으로 이전하였다. 대극장(객석 1,494석 규모)과 소극장(객석 344석 규모) 및 기타 부속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국립극장 전속단체에는 국립극단·국립창극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 등이 있어 각 분야별로 활동하고 있다.
<국립극장>
국립극장 마당을 가로질러 순환도로로 올라가다가 남산둘레길 코스를 따라 한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팔도소나무 숲이 나온다. 소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이므로 예로부터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장수(長壽)를 나타냈으며, 비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역경 속에서도 늘 푸르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꿋꿋한 절개를 나타내는 나무로 우리민족의 절개(節槪)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래서 소나무는 우리 문화·역사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다.
<남산 팔도 소나무 숲길>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가을은 무르 익어간다. 서울 장안의 웬만한 곳이면 어디서든 보이는 남산의 N서울타워를 향해 발걸음이 빨라진다. N서울타워의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며 남산타워 또는 서울타워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타워의 총 높이는 탑신 135.7m와 철탑 101m를 합하여 236.7m이고, 남산의 해발고도 243m를 합하면 타워 정상의 해발고도는 479.7m에 달한다. 전망대·송신탑 부분인 N서울타워와 문화·상업 시설 부분인 지하 1층부터 P4층(플라자 4층)까지는 서울타워플라자로 구분된다.
<N서울타워>
N서울타워는 1969년 12월 당시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 3개 민영 방송국의 공동 투자로 착공하여 1971년 콘크리트 탑신과 공중선 철탑을 준공하였고, 1975년 8월에 전망대를 완공하였다. 완공 후 체신부를 거쳐 체신공제조합이 소유하였다. 처음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전망대를 공개하지 않다가 1980년 10월부터 서울타워라는 명칭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1982년에는 세계거탑연맹(WFGT)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2000년 4월 YTN이 인수한 후, 2004년 12월에 N서울타워라는 명칭으로 재개장하여 현재에 이른다.
<N서울타워 전경>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은 옛말의 ‘마뫼’로 남산이란 뜻이란다. 그래서 조선 초에 세운 신당에는 목멱대왕이란 산신이 모셔져 있고, 나라에서 세운 신당이라 하여 국사당(國師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국사당이 강제로 헐리고 조선신궁이란 일본신사를 세워 우리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철거된 국사당 건물은 인왕산 서쪽 선바위 아래에 옮겨져 있고, 그 자리에는 남산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다.
<국사당터 표지석>
<남산 봉수대>
남산 팔각정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우남정을 지었다가 1960년 4∙19의거 때 철폐되었으며 1968년 11월 11일 다시 건립되었다. 이 팔각정은 남산정상에 세워져 있어 서울시가가 눈 아래 펼쳐진다. 그리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낙산[駱山, 좌청용(左靑龍)],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우백호(右白虎)], 북쪽의 북악산[北岳山, 후현무(後玄武)], 남쪽의 남산[南山, 전주작(前朱雀)]을 도성의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하며, 조선조 때 이 산들을 중심으로 연결하여 구축한 성곽이 지금의 한양도성 성곽길이다.
<남산팔각정>
<서울 한양도성전도>
팔각정 아래에 있는 남산도서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마당에는 안중근의사의 동상과 유묵을 새긴 비석이 서있고, 그 아래 광장에는 백범김구광장이 마련되어 있으나 들르지 못했다. 김구선생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 같이 천하고 범부 같이 평범한 사람”이란 뜻으로 민초(民草)들이 “애국심과 지식을 갖게 해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호(雅號)를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특별시교육연구정보원 입구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귀(仰釜日晷)와 천문측정기구인 혼천의(渾天儀)가 비치되어 있다.
<백범 김구 동상>
<혼천의>
<앙부일귀-해시계>
우리가 일반적으로 의사(義士)로 알고 있는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나는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으로써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장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니 포로로 대접해 달라’고 주장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런 면에서 의사 보다는 장군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대한국인 안중근 동상>
<대한국인 안중근 어록비>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
소월길을 따라 남산 북쪽 자락을 따라 다시 북쪽둘레길로 접어든다. 남산 북쪽은 절벽을 이루고, 북쪽 기슭 깊은 계곡에는 와룡묘가 있다. 와룡묘(臥龍廟)는 중국 삼국시대 지략가인 제갈공명(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곳에는 와룡묘 외에 단군묘(檀君廟), 제석전(帝釋殿), 약사전(藥師殿), 삼성각(三星閣), 요사(寮舍), 문신각(文臣閣) 등이 함께 있어, 중국 도교계의 신령으로 모셔지는 와룡 선생과 우리 민속신앙이 결합된 무속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인데 입구만 확인하고 지나친다.
<와룡묘 입구>
남산북쪽둘레길에서 서울시청 남산제1청사가 있는 쪽으로 내려온다. 서울시청 남산제1청사는 옛날 공포의 대상이었던 중앙정보부남산분실이다. 필자도 공무상으로 몇 번 들려본 기억이 있는데, 세평쯤 되는 접견실은 흰 종이로 유리창을 전부 막아 버렸고, 게시물이 하나도 없는 하얀 벽으로 되어 있는 공간에서 10여분을 기다리는 것은 당시의 선입견도 있었겠지만 마냥 공포의 순간이었다.
<서울시청 남산제1청사>
자동차가 바쁘게 들락거리는 남산 1호 터널 입구를 건너 서울천년 타임캡슐광장으로 들어간다.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타임캡슐광장은 돌로 만든 나선형 통로를 따라 가면 운석에 의해 파인 분화구 형태를 띤 4,960㎡ 넓이의 광장이다. 중앙에는 지름 7.5m·두께 0.7m의 화강암 원형판석이 있으며, 그 아래에 서울의 문물 600점을 넣고 봉인한 타임캡슐이 묻혀 있다. 1394년 11월 29일 한양정도(漢陽定都) 기점으로 600년이 되는 1994년 11월 29일에 직경 1.4m·높이 2.1m·무게 2.5t의 보신각 종 모형의 타임캡슐을 묻혔다. 후손들에게 개봉되는 시점은 한양정도 천년이 되는 2394년 11월 29일이다.
<타임캡슐 광장 입구>
<타임캡슐광장 표지석>
<타임캡슐 중앙>
타임캡슐광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남산골 한옥마을이다. 한옥마을은 1989년 남산골의 제 모습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자리를 인수하여 서울시 지정 민속자료 한옥 5개동을 이전하고 전통정원을 꾸며 1998년 4월에 개관하였다. 한옥은 변형이 없는 순수한 전통가옥을 선정하였다. 다만 조선 제27대 왕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 씨 친가는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데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복원하였다. 바로 위에는 공연장에 오디오 시설이 없는 서울남산국악당이 있다.
<서울남산국악당>
순정효황후 윤 씨는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국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는 일화가 있다. 국권피탈 후 이왕비전하(李王妃殿下)로 강칭(降稱)되고 순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시자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낙선재(樂善齋)에서 병사하였으며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유릉-네이버캡쳐>
남산을 거의 한 바퀴 돌고 남산골 한옥마을로 내려 왔으나 전에 여러 번 왔다는 핑계로 한옥마을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서울에 온지 근 50년 가까이 되어 남산에 가끔 와보았지만 속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가 생각한다. 역시 가까이 있는 것은 막연하게 언젠가는 가보겠지 하며 게으름을 피우다 더 소홀이 하고, 속속들이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더 모르는 것이 다반사다. 인간관계에서 친할수록 더 예의범절이 요구되듯이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할 것 같다.
<천우각-한옥마을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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