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둘레길을 걸으며(8-3코스)
(정릉∼북한산우이분소, 2017년11월23일)
瓦也 정유순
서울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마을버스 1114번을 타고 종점인 성북생태체험관 앞에서 내린다. 당초 출발지점은 북한산정릉탐방지원센터 앞이었으나 조밀한 아파트단지 주변으로 북한산둘레길 제4구간인 솔샘길 구간이 나있고, 교통량이 많은 도로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출발지를 약1㎞ 앞당겨 성북생태체험관 앞에서 출발한다. 아파트단지와 가까이에 있는 성북생태체험관에는 많은 야생화와 관목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생동하는 꽃과 나무의 이름을 불러보면 시나브로 자연생태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될 것 같다.
<성북생태체험관 마당>
<사색의 숲>
성북생태체험관 마당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쌀쌀해진 날씨에 대비하여 옷과 장비를 점검하고 길을 나선다. 사색의 숲을 지나 몇 걸음 나가면 솔샘발원지가 나온다. 솔샘은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의 한 줄기를 따라 오르면 예부터 소나무가 무성하고 물이 맑은 샘이 있어 이름하여 솔샘[松泉]이라 불렀으니 이곳이 바로 솔샘의 발원지이다’라고 안내문은 말한다. 솔샘마당이 있고 그 위로 솔샘발원지가 있다.
<솔샘발원지>
솔샘마당의 작은 습지는 살얼음판이다.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구간(3구간)으로 들어서니 여름 내내 무성했던 나뭇잎은 이미 낙엽이 되어 땅에 수북하고 밟히는 촉감은 푹신하다. 숲속에 3층 양옥으로 된 어느 사찰은 주변 자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가을의 흔적을 더듬으며 걷다보니 빨래골공원지킴터에 도착한다.
<살얼음>
<경천사>
빨래골은 예부터 많은 양의 물이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와 ‘무너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너미는 “흐르는 물을 저장하기 위해 둑을 쌓아 놓고 한쪽의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쳐흐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당시 대궐의 무수리들이 이곳을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란 명칭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특히 속옷 등 은밀한 빨랫감은 궁궐과 많이 떨어진 이곳에서 빨래를 하며 독립적인 공간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빨래골공원지킴터>
빨래골공원지킴터 우측 옆으로 돌아 산길을 오르면 12m 높이의 구름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는 원형계단으로 올라가는데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층에 올라가면 주변의 삼각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이 아파트 숲을 이룬 도심에 병풍을 두른 듯 가까이 보이고, 수유리계곡에서 대동문으로 넘어가는 칼바위능선이 도끼날을 세워 놓은 양 길게 누워 있다. 동남쪽으로는 한강 건너 잠실의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롯데월드타워가 희미하게 보인다.
<구름전망대>
<북한산(삼각산)>
<도봉산>
<수락산과 불암산>
<북한산(삼각산) 칼의 능선>
사방이 확 트인 전망대에 머물면서 더 멀리 보고 싶지만 시간은 자꾸 화계사 쪽으로 내려가라 한다. 화계사(華溪寺)는 원래 보덕암이란 암자였는데, 중종17년(1522년)에 신월대사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태민안을 빌던 조선조 왕가 사람들이 출입을 많이 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화계사 골자기 오탁천약수로 피부병을 고쳤다고 한다.
<화계사 입구>
특히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이절 스님인 만인선사의 가르침으로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충남 덕산의 가야사에 불을 지르고 가야산 금탑자리에 옮긴 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분이 훗날 고종황제시다. 그래서 그 후 흥선대원군은 화계사를 왕가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화계사 전경>
화계사를 지나 고개를 넘어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 1894∼1960)박사 묘소 입구를 지나 한참을 걸으면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소속의 지장보살을 모시는 본원정사(本願精舍)라는 절이 나온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불 사이인 부처님 없는 시대에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보살이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에 들어가 교화해 제도하는 보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원래 도성암이었던 본원정사에는 한국전쟁 때 태고사에 불이 나서 옮겨온 목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본원정사>
왕성했던 세월의 무게를 훌훌 털어버리고 나목(裸木)으로 서 있는 숲길을 따라 세 고비의 고개를 넘으면 통일교육원이 나온다. 통일교육원은 남북 간 화해·협력과 통일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각급학교·사회교육기관의 통일교육을 지원하는 업무를 목적으로 한다. 주로 통일문제 및 국민정신교육에 관한 전문가와 교육자를 훈련·양성하고, 통일에 대비한 정부기관·공공기관·사회단체의 간부·요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통일부소속기관이다.
<통일교육원>
이곳 주변에는 일제강점기에 항거하고 자주독립을 외치며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의 묘역이 모여 있다. 묘역에는 구한말에 고종황제의 밀사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파견 되었다가 순국한 이준열사(李儁烈士, 1859∼1907)를 비롯하여 독립운동가이며 서울대학교 대신 성균관(成均館)을 국립대학으로 하자고 주장한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국淑, 1879∼1962)선생, 사법부의 독립의 초석을 다진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1887∼1964)선생, 임정요인으로 국회의장과 제3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세도중 호남선 열차 안에서 급서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선생, 독립운동을 했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맞서 제4대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로 선거유세 중 신병치료차 미국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서한 유석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다.
<애국지사묘역 위치도>
특히 제3대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해공이 급서하자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로 시작하는 손인호의 ‘비 내리는 호남선’이란 가요가 민중들의 심금을 파고들었으며, 제4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에는 신병치료차 미국에 입원 중인 유석이 서거하자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심고 수수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로 시작하는 박재홍의 ‘유정천리’가 민중의 마음을 움직여 4∙19민주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데, 인근에 4∙19국립묘지와 통일교육원이 독립유공자 묘역과 서로 이웃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해공 신익희 어록>
<유석 조병옥 어록>
북한산국립공원 수유분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뒤안길로 접어들면 북한산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대동천을 건너는 섶다리가 놓여 있다. 섶다리는 통나무와 소나무가지와 진흙으로 만든 다리로 강을 사이에 둔 마을주민들의 왕래를 위해 매년 물이 줄어든 겨울 초입에 놓았다가 여름철 물이 불어나면 물에 의해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한다고 하며, 옛날에는 강원도 영월과 정선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산국립공원 수유분소>
<섶다리>
섶다리를 지나면 근현대사기념관이 나온다. 2016년 6월에 개관하여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위탁관리 중인 근현대사기념관은 헌법정신의 요체인 자유∙평등∙민주의 이념이 단순히 외래의 소산이 아니라 선열들이 피땀 흘려 체득하고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를 감동 있게 전달함으로써, ‘독립운동 가들이 꿈꾼 나라’, ‘사월혁명의 투사들이 소원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임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강북구에서 건립했다. 아마 강북구는 4∙19국립묘지와 독립운동 선열 묘역이 관내에 있는 점을 착안한 것 같다.
<근현대사기념관>
바로 아래에는 4∙19국립묘지 전망대가 있어서 묘역이 거의 한 눈에 보인다. 4∙19민주혁명은 이승만 자유당정권이 영구집권을 모사(謀事)하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한 제4대 대통령부정선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960년 4월에 학생들이 일으킨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4∙19민주혁명은 5∙16군사반란으로 4∙19의거(義擧)로 격하되었으며, 묘지도 관리가 안 되어 방치되어 오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정비되고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4∙19국립묘지>
4∙19국립묘지 아래에는 우이동솔밭근린공원이 있다. 우이동의 소나무 숲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의 동쪽에 자리한 3만 4,955㎡의 숲으로 사유지였다. 따라서 서울의 개발 붐이 이곳까지 이어져 1990년에는 아파트 개발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숲을 주민과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 보존운동을 벌였고, 1997년 서울시와 강북구가 땅을 매입하여 2004년에 솔밭근린공원으로 개장했다.
<솔밭근린공원>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골짜기의 ‘물이 넘치는 마을’이라 해서 ‘물 수(水)자와 넘칠 유(踰)자’를 써서 수유동이고, 우이동(牛耳洞)은 삼각산(북한산) 봉우리가 쇠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수유동이나 우이동이 한양도성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옛날 신혼 초에 4∙19국립묘지와 솔밭근린공원 인근에서 살았던 추억에 잠겨 산자락을 돌아 나오니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선생의 묘역이 나오고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가 나온다.
<의암 손병희 묘역-네이버캡쳐>
손병희는 조선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천도교 제3세 교주를 지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며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역 옆에는 손병희가 건립한 봉황각(鳳凰閣)이 있으며, 현재 천도교수도원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
<의암 손병희 어록>
2017년 1월부터 1코스 시작점인 도봉탐방센터에서 걷기 시작한 서울둘레길은 한양의 외사산(外四山, 북한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을 이은 총연장 157㎞의 길이다. 마지막 구간인 북한산국립공원우이분소에서 도봉탐방센터까지는 지난 7월 무더운 여름날에 이미 걸었기 때문에 오늘이 서울둘레길 대장정의 막을 내리는 날이다. 그동안 걸음이 느린 나에게 도움을 주신 도반님들에게 고마운 말씀을 전한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 시계탑>
<북한산(삼각산)>
네가 떠난 자리에
낙엽 켜켜이 쌓여
남은 체온을 덮고
달빛 얼 비치는 밤
나는 지난 시간의 기억들을
눈물처럼 흘린다
포근한 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행복을 꿈꾸었지
으스러지도록 가슴 부여안고
사랑노래 부르다가
첫 닭 우는 새벽길로
안개비 되어 떠나 버린 후
서로 만나면 사랑을 외면하며
허공만 뒤척이다가
돌부처 같은 냉기만 흘렸었지
풀잎이 이슬 머금듯
옛사랑도 바람 되어 흩어지고
떠나간 자리에는 고독이
붉게 물들어 스며든다.
<정유순의 가을이 떠난 자리>
<낙엽진 은행잎>
<낙엽이 쌓인 자리>
<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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