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아홉 번째-2)
<무릉계곡, 등명낙가사→경포호, 2017. 10. 29>
瓦也 정유순
새벽 여섯 시,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무릉계곡을 보기 위해 어둠을 뚫고 달려왔다. 무릉계곡(武陵溪谷)은 호암소에서 용추폭포까지의 계곡을 가리킨다. 길바닥의 돌멩이도 잘 안 보이는 꼭두새벽에 용추폭포를 향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은 서서히 걷힌다. ‘어둠은 광명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깨우친다.
<여명>
올라갈수록 계곡을 적시는 물소리는 더 청아하다. 두타산(頭陀山, 1353m)과 청옥산(靑玉山, 1404m)을 배경으로 하는 이 계곡은 용추폭포와 쌍폭포가 아래위로 이웃하며 기다린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를 수행’한다는 뜻이라 했으며, 청옥(靑玉)이라는 약초가 많이 생산되어 청옥산(靑玉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무릉계곡이 아래로 펼쳐진다.
<무릉계곡 명승지 안내도>
용추폭포(龍湫瀑布)는 청옥산(1,403.7m)에서 흘러 내려온 물줄기가 상·중·하 3개의 항아리 모양의 깊은 바위용소로 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제일 아래 계단을 밟으면 전체 암석이 동요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동석(動石)이라 불리며, 이 일대를 폭포골 또는 용추동이라 부른다. 폭포들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형상과 주위 무릉계곡의 뛰어난 경관과의 조화는 매우 아름답다.
<용추폭포>
용추폭포 아래(70m) 위치한 쌍폭포는 물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듯 착각할 정도로 높고 아름다우며, 용추폭포에서 내려오는 물과 박달계곡의 물이 이곳에서 만남은 마치 자연의 음양의 섭리와 순리를 나타내는 듯하다. 떨어지는 폭포수는 세상의 온갖 시련과 풍파를 한 순간에 날려 보낸다. 쌍폭포는 용추폭포와 함께 무릉계곡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쌍폭포>
용추폭포의 철다리 위에서 위로 쳐다보면 발가락 모양의 바위형상이 드러나는데, 용추폭포 맞은편의 앞산을 ‘발바닥 바위’라고 한다. 발바닥은 사업성공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여러 가지 모형의 만물상 중에서도 발가락이 선명한 바위가 압권이다. 그리고 용추폭포 아래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이름이 암각 되어 있다.
<발바닥바위>
<용추폭포 탐방객 이름 암각>
날이 더 밝아지고 계곡 아래로 내려올수록 단풍은 화려해 지고 가을 계곡 또한 선명해 진다. 바위틈에 자라는 소나무는 빛이 더 푸르고, 돌을 입으로 문 참나무는 인내를 가르쳐 준다. 학소대(鶴巢臺)는 상류의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소대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두 연인이 학처럼 정을 나눈다.
<학소대>
<바위 틈에 자라는 소나무>
<돌을 먹는 참나무>
두타산삼화사(頭陀山三和寺)는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864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 개칭하였다. 임진왜란과 의병의 근거지가 되어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가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鐵佛), 3층 석탑 등이 있다.
<삼화사 적광전>
<삼화사 철불>
<3층 석탑>
고려시대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머물며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하였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인 ‘삼화사 수륙제’를 보유한 삼화사 밖 담벼락 옆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도열한다.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용(해)오름길이며 무릉계곡의 중심이다. 고적(古蹟)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 당시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용을 타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십이지신상>
<두타산삼화사 일주문>
이때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를,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약사삼불을 싣고 용이 두타산을 오르던 길이 용오름 길이다. 이 길은 대부분 화강암 침식 및 퇴적 지형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은 명승지라고 한다.
<용(해)오름길>
삼화사 일주문을 나오면 무릉계곡의 백미인 무릉반석이 기다린다. 무릉반석(武陵盤石)은 5천㎡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천하절경을 이룬다. 반석 위에는 이곳을 찾은 명필가와 묵객(墨客)들이 음각해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있는데, 특이한 것은 도둑을 잡으러 이곳에 온 토포사(討捕使)들의 이름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아마 깊은 계곡에 도둑들도 많이 숨어들어 왔으리라 짐작이 간다.
<무릉반석>
<무릉반석 이름 암각>
<무릉반석의 토포사 암각>
무릉반석 옆에는 금란정이란 정자가 있다. 금란정(金蘭亭)은 대한제국 광무7년(1903) 당시 삼척지방 유생(儒生)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현학을 강마(講磨)하고 동양 예의를 존숭(尊崇)하며 봄과 가을의 음상(吟觴)을 즐겨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가 폐강되었고 이를 분개한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金蘭契)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정각을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가 1947년 북평동 등에 금란정을 건립하였으며, 1958년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금란정>
<금란계 백주년기념비>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무릉반석에 가로로 쓴 살아 움직이는 듯 힘이 있고, 웅장한 글씨인 “武陵仙源(무릉선원) 中臺泉石(중대천석) 頭陀洞天(두타동천)”이라는 암각서가, 그 아래에는 “玉壺居士書辛未(옥호거사서신미)”라는 각서가 있는데, 이는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릉선원은 도교(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암각>
무릉계곡을 다녀온 후에 하는 늦은 조반은 ‘시장이 반찬’이라 밥 두 그릇이 ‘맛 바람에 게 눈 감추기’다. 어제 마감했던 괘방산등명낙가사 아래에 있는 강릉통일공원 입구에서 걷기를 시작한다. 해파랑 길로 지정된 길이 아니어서 율곡로인 제7호 국도는 걷기가 무척 불편하다. 안인삼거리에서 철길을 가로지르는 육교를 지나 해파랑 길과 만나 정상괘도에 진입하여 안인진항에 당도한다.
<강릉통일공원 입구>
<인도가 없는 7번 국도>
<철길을 가로지르는 육교>
안인진(安仁津)은 조선 성종 때까지 수군만호영이 있던 곳으로 1916년 일제강점기 때인 1916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인소동, 모전리 일부를 합쳐 안인진리가 되었다. 군선강이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에 있는 마을로 괘방산이 북쪽으로 줄기가 이어지다가 바다에 이르는 곳에 봉화산(일명 해령산)이 솟아 있다. 정상에는 봉수 터가 남아있으며, 그 중턱에 있는 해랑당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과 음력 9월 9일에 유교식 해랑제가 열린다고 한다.
<안인진항>
안인진항에서 봉화산자락을 좌측으로 돌아 군선천을 건너면 한국남동발전(영동화력)이 나온다. 이곳 화력발전소도 군선천 하구에 송수관(送水管)을 여러 곳으로 연결해 놓았다.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가 해안에 위치하는 이유는 발전할 때 생성되는 높은 열을 냉각하기 위한 냉각수의 조달이 필수이기 때문에 물이 풍부한 해안을 선택하는 이유이다.
<영동화력>
영동화력을 지나면 염전해변이 나오는데 들르지 못하고 메이플 비치 골프장 앞으로 지나친다. 염전해변은 1960년대까지 화력발전소 아래에 염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군선천 하구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으로 낚시꾼들이 성황을 이루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해안사구가 발달된 지역이다. 해안사구(海岸砂丘)는 오랜 시간동안 파도와 바람에 의해 운반된 모래가 퇴적되어 낮은 구릉모양으로 형성된 모래언덕을 말한다.
<군선천 하구>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는지 모 불고기 집에는 손님들이 모여든다. 불고기 집에서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야 하는데 모르고 직진을 했더니 길이 끊긴다. 뒤로 돌아올 수도 없어 동해안 바다 쪽을 향해 남의 채소밭을 가로질러 길을 개척한다. 속이 꽉 찬 배추는 김장할 날만 기다리고 밭둑에 심어진 감나무도 탱글탱글 홍시(紅柿) 되어 익어간다.
<강릉불고기>
<배추밭>
<감>
한참을 헤매다가 도착한 곳은 F-5E/F(Tiger Ⅱ) 전투기가 설치된 모 전투비행단 정문 앞이다. F-5E/F 전투기는 1960년대 생산된 F-5A/B형의 개량형으로 1974년 도입된 기체와 1981년 대한항공에서 생산된 기체를 포함한 약 200여대가 대한민국 공군에 인도되어 영공방위 임무를 수행한 기종이다. 곧게 뻗은 월호평길을 따라 남항진으로 이동한다.
<F-5E/F(Tiger Ⅱ) 전투기>
<월호평길>
남항진 해변은 강릉 동쪽에 위치한 간이해수욕장이다. 강릉시 동쪽 남대천 하구의 섬석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포구로, 옛날에 송정에서 한송사(寒松寺)로 가는 남쪽 길목에 있는 나루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었다. 해수욕장 주변에는 횟집들이 많고, 주차장이 넓어서 주차하기도 용이하다. 주변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깨끗이 정비된 민박집이 있어서 조용하게 며칠쯤 쉬어가면 좋을 것 같다.
<ZIP라인 타워>
<섬석천>
국내최초 짚라인이 설치된 남항진해변에서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솔바람교를 지나면 죽도봉공원이 나오고, 그 아래는 강릉항이다. 죽도봉(竹島峰)은 일명 ‘젠주봉’이라고도 부른다. '젠주봉'은 원래 전라북도 전주에 있던 봉우리가 떠내려와 정착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죽도봉 일대는 ‘젠주염전’으로 불리는 강릉의 유명한 염전지역이며, 봉우리 아래쪽에 5칸의 단청기와로 된 여성황당이 있다. 성황당에는 토지지신, 성황지신, 여역지신 등 세 신위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세 번 성황제가 열리고 있다.
<솔바람교>
<솔바람교와 죽도봉>
죽도봉을 넘어 내려오면 바로 강릉항이다. 강릉항(江陵港)은 강릉시 송정동 안목해수욕장 인근에 있는 항구이다. 조선 후기까지는 견조도(堅造島)라는 섬이었으나, 현재는 육계도(陸繫島)가 되었다. 2008년 5월 강릉항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안목항(安木港)으로 불렸다. 안목이란 이름은 원래 마을 앞에 있는 길목이라는 뜻의 ‘앞목’이었으나 발음이 점차 ‘안목’으로 순화되었다. 강릉의 주요 하천인 남대천 하류에 있는 항구로 계류장에는 강릉∼울릉도를 운항하는 여객선이 보인다.
<강릉항>
강릉항 바로 옆에는 안목해변이다. 안목해변은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어촌으로 가족단위 피서를 즐기기가 적합한 곳이었다. 피서 철이 끝나는 8월말 경에는 고등어가 멸치를 잡아먹기 위해 쫓아오는데, 바닷가로 밀려나오는 멸치 떼를 바가지와 반두 등으로 떠내는 일이 종종 있는 곳으로 필자도 1984년경에 이곳에 왔다가 밀려오는 멸치 떼를 라면봉지로 두 봉지 정도 주워 식당에서 회와 요리로 맛 본 기억이 있다.
<안목해변>
안목해변은 오래 전부터 바위가 많고 바다 속 풍경이 아름다워 스킨스쿠버 동호회 등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해수욕장 바로 옆에는 강릉항(안목항)이 있어 낚시꾼들이 고등어, 황어, 숭어, 노래미 등을 낚고, 횟집도 많아 싱싱한 회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오래된 옛날을 떠 올릴 수는 있지만 어촌으로 조용하던 곳에, 최근에는 건물들이 들어서서 시가지를 형성하고 다양한 커피를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커피 거리로도 유명하다.
<안목해변의 건물>
솔밭으로 이어지는 송정해변으로 고운모래 이불처럼 푹신하게 밟으며 해안을 따라 솔밭을 한가로이 걷는다. 솔밭에서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시 낭송회’가 열린다.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백사장이 이어지는 강문해변에서 초당순두부마을로 이동한다. 손님이 너무 많아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초당순두부’로 점심을 한다.
<해안 솔밭>
<시 낭송회>
초당순두부는 두부를 만들 때 소금간수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릉에서는 천일염이 귀하기 때문에 동해의 깨끗한 바닷물 간수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 강릉초당두부이다. 초당(草堂)은 조선 중엽 이곳에서 살았던 강릉부사 허엽(許曄, 1517∼1580)의 아호(雅號)이며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과 홍길동의 저자 허균의 아버지이다. 허엽이 두부를 만들며 살았던 곳이 지금의 강릉시 초당동이며 초당마을이다.
<초당 순두부>
어렵게 식사를 마치고 강문해변으로 다시 이동하여 경포해변으로 방향을 잡는다. 솔밭 무대에서는 가수들이 나와 흥겨운 노래 가락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강문해변은 경포호에서 흘러 내려오는 경포천을 경계로 북쪽은 경포해변, 남쪽은 강문해변이다. 인근에 작은 어항인 강문항이 있어 새벽에 잡은 싱싱한 생선회를 맛 볼 수 있다고 한다.
<솔밭공연>
강문해변에서 ‘강문솟대다리’를 건너면 바로 경포해변이다. “외로운 배 닺줄을 풀어 정자 위에 올라가니/강문교 넘은 곁에 동해가 거기로다/조용도 한 경포의 기상 넓고도 아득한 동해의 경계/이보다 갖가지 다 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홍장고사를 떠들썩할 만하다 하리로다”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관동별곡> 중에서 강릉을 노래한 대목이다.
<강문솟대다리>
‘강문솟대다리’를 건너에는 ‘강문 진또배기 성황당’이 자리한다. ‘강문 진또배기’는 강릉시 강문 마을 남쪽 입구에 서 있는 솟대를 가리킨다. 4월 보름에 깎아 모시는 진또배기의 높이는 약4.5m이고 둘레는 35㎝로서 소나무로 만들었다. 장대 끝의 나무오리는 세 마리를 세우는데 상당히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오리 세 마리는 모두 서북쪽의 경포대를 향하고 있다. 또한 진또배기는 서낭신을 보필하고 삼재(수재, 화재, 풍재)를 막아 마을의 안녕과 풍어, 풍년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강문 진또배기 성황당>
경포해변은 동해안 최대의 해변으로 강원도 강릉을 대표하는 곳으로 경포호(鏡浦湖)와 바다 사이에 생성되는 사빈(沙濱)으로 시오리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주위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원래 바다였던 경포호는 해안 쪽으로 모래가 쌓여 바다와 격리되어 있으나 모래 둑 밑으로는 바닷물이 소통하여 민물과 섞여 있는 석호(潟湖)수역이다. 바다에는 갈매기가 파도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호수 건너 경포대는 옆으로 길게 드리우는 햇살에 가린다.
<파도가 심한 경포해변>
<경포해변의 갈매기>
<경포호 석양>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갑산-이공(裡工)인의 함성 (0) | 2017.11.12 |
---|---|
서울둘레길을 걸으며(8-2코스) (0) | 2017.11.10 |
해파랑 길은 해피한 길(아홉 번째-1) (0) | 2017.11.02 |
태안해변 길을 걸으며(바람길, 完) (0) | 2017.10.27 |
솔잎사랑 (0) | 2017.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