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천년 고도 경주에 가다

와야 정유순 2016. 7. 28. 23:48

천년 고도 경주에 가다

(2015. 2. 72. 8)

瓦也 정유순

경주(慶州)! 이곳은 갈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많은 역사적 유물과 보물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외세에 의한 간섭이 줄어들고, 당시 당나라와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때는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서라벌(경주)저자거리에 기와집이 약 17만호로, 취사도 숯으로 하기 때문에 밥 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안 나와 거리가 깨끗하다라고 배운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경주지도>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바꿔야 할 때 바꾸지 못한 결과로 호족들의 사치와 반란이 이어지더니 후삼국으로 분열했다가 결국은 제56대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헌납하여 신라는 명을 다하고 지금은 그 흔적의 일부만 남았는데도 전부가 보물 같다.

  

<경주탐방로> 

   전날 밤새 달려와 숙소에서 대충 눈을 붙이고 조반이 끝나자마자 남산의 서쪽 입구로 이동한다. 포석정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기다가 후백제왕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제55경애왕릉부터 시작하여 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때에는 후삼국의 치열한 각축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인데 포석정에서 한가로이 잔치를 즐겼다는 기록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도 안 되고 믿기도 힘들다.


<경애왕릉>

   이웃에 배리삼릉이 있어 이곳부터 냉골까지를 삼릉계곡이라 한다. 삼릉은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이 잠든 곳으로 세분 모두 박씨성을 가진 왕들이다. 입구부터 솔 향이 짙게 풍기는 삼릉계곡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뤄 향긋하다.


<배리삼릉>

  정상 쪽으로 조금 들어가자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이 기다린다. 돌기둥 같은 암벽에 얼굴을 풍만하게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입가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뚜렷하다. 조금 위쪽에는 1964년에 발견된 목이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앉아 있다. 이 불상은 몸체가 풍만하고 옷 주름이 유려하여 신라시대의 풍요로움을 말해주는 것 같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석조여래좌상>

  조금 위쪽으로 더 올라가니 돌출된 큰 바위에 선으로 부드럽게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이 버티고 서 있고, 마애선각여래좌상(磨崖線刻如來坐像)의 아래바위는 연화대좌로 그려져 있으며 위 바위는 결가부좌한 불신이 부조되어 하나의 선으로 새겨져 있다.


<선각육존불>


<마애션각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계곡으로 1km쯤 올라가면 남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상선암이 나온다. 이 암자는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을 모시는 곳이다. 높이 7m로 삼릉계곡에서는 제일 큰 불상으로 금오산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는데 지금은 보수 중으로 거푸집이 쳐 있다.

<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

   능선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상사병이 난 사람이 빌면 병이 치유 된다는 상사바위가 나오고 조금 더 가니 금오산(金鰲山 468m)’이 나온다. 다시 가파른 능선을 따라 내려오니 암반을 기초 돌로 하여 세운 용장사 3층 석탑이 있고, 더 가파른 계곡 아래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탄생한 용장사(茸長寺)’ 터가 있는데 내려가진 않았다. 이곳 바위에서 준비한 간식으로 요기를 하고 다시 올라와 남산진입도로로 잠간 거닐다가 칠불암으로 가기 위해 다시 고위봉쪽으로 올라간다.

<상사바위>

<경주남산(금오산)>

<용장사 삼층석탑>

이영재입구 분기점에서 가파르게 내려오니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磨崖菩薩半跏像)’이 바위를 처마삼아 절벽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수직에 가까운 계단 밑에는 칠불암 마애석불이 기다린다. 칠불암은 큰 암석에 삼존불(三尊)과 사방불(四方佛)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우리가 힘들어 보이는지 이곳에서 봉사중인 보살님이 떡 공양을 해주어서 고맙게 다시 요기를 한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칠불암 삼존불과 사방불>

  신우대 숲을 따라 가파르게 밑으로 조금 내려오니 산행은 끝난 것 같다. 편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마을이 나타나고 남산사(南山寺)’라고 쓰인 팻말이 옛날 절터를 가리키고, 조금 떨어진 곳에 염불사지 삼층석탑이 신라인들의 두터운 불심을 이야기 한다.

<남산사 표지석>

<염불사지 삼층석탑>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의 목숨을 구한 글이 나왔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연못 서출지(書出池)’에서 오전 일정을 마무리 한다. 이곳에는 조선조 현종 5(1664)에 임적(任勣)이 지은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다.

<이요당>

  종주하면서 느낀 것은 경주 남산은 신라인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야외노천박물관이다. 서 있는 바위 하나하나에 신라인의 신심이 배어 있는 유물들을 볼 때마다 지친 몸에 힘이 솟는다. 천년이상의 세월이 흘러 인고의 풍상을 겪었지만 그 흔적들은 여유로움으로 맞이하는 것 같다. 노천에 있는 우리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영원하길 진심으로 빈다.

<경주남산 삼화령 연화대좌> 

   천년고찰 불국사에 와서 그래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중학교 때 수학여행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가람 배치도에 보면 백운교 청운교부터 시작하여 자하문을 지나 좌측의 석가탑과 우측의 다보탑을 거느리고 대웅전 앞에 선다. 그리고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 중심 건물이 되는 것 같다.

<불국사>

석가탑은 보수 중으로 전부 해체되어 유리벽 속에 갇혀 복원을 기다린다.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는 경덕왕 10(751)에 김대성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2천여 칸에 이르는 6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 배치도>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석축만 남게 되었다. 그 뒤 자하문, 범종각, 대웅전, 극락전 등만 간신히 남아 있다가 1969년 발굴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불국사 대웅전>

<불국사 다보탑>

  불국사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부도가 있는데 그 모양이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워 단단한 돌을 마치 떡 주무르듯 모양을 내었는데, 팔각대석 위에 탐스러운 꽃잎을 밑으로 늘어뜨린 연꽃 받침 위에 서로 얽혀 하늘로 오르는 구름기둥을 세우고 다시 피어오르는 연꽃을 얹어 대좌를 만들었다. 그 위에는 배가 부른 둥근 탑신을 놓았는데, 사방에 감실을 만들고 석가모니불 등 사방불로 새겼으며, 십이각의 기와지붕을 본떠 만든 지붕돌을 얹었다.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06m이다.(네이버 지식백과 불국사 참조)

<불국사 부도>

  석굴암 가는 길목 우측에는 유치환의 석굴암 대불시비가 서 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마저 처다 보는 이 없어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아 있노라니땅거미가 질 무렵 불국사 내외를 한가롭게 거니는 것도 나에게는 호사고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로움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단숨에 석굴암이라도 다녀왔으면 좋으련만 해는 서산너머로 얼굴을 숨긴다.

<청마 유치환시비>

    <유치환의 시-석굴암 대불>


   경주 해파랑 길경주시양남면에서 시작되는 10코스, 우뚝 솟은 바위 위의 천년 묵은 소나무가 질긴 생명력을 웅변하고 있고 그 밑으로 펼쳐진 옆으로 누운 주상절리가 자연의 신비로움을 더 한다. 막 떠 오른 태양은 출렁다리에 햇빛을 부딪치며 그네를 탄다.

<해파랑길 바위와 천년송>

<해파랑길 부채살 주상절리>

   감포 앞 바다의 대왕암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대왕의 기상이 뻗는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가 용이 되어 승천 하는 것을 봤다는 이견대(利見臺)’에서 바라 본 대왕암은 그 자체가 용이다. 그 혼을 지키던 감은사는 동ᆞ서 3층 석탑만 남겨 놓고 애잔한 역사 속 전설을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

<대왕암>

<이견대>

<이견대-대왕암>

<감은사지 삼층석탑>

날씨는 어제와 딴판으로 매섭게 몰아쳐 손을 밖으로 내놓기가 두려운데 물질하는 해녀들의 모닥불이 더 반갑다.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골굴사(骨窟寺)’는 함월산 불교유적지 중 제일 오래되었다고 한다. 함월산 응회암 절벽에는 석굴로 보이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는데 맨 꼭대기에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함월산 골굴사>

<골굴사 마애불>

<골굴사 마애불 원경>

  그리고 골굴사는 선무도수행도량으로 유명하며 원효대사가 열반한 곳으로 추정되는 혈사(穴寺)로 가파른 계곡을 따라 가람이 배치되었는데 맨 꼭대기에 있는 마애불은 불가사의하다. 수직 절벽으로 디딤돌 하나에 공중부양 하는 요술을 부렸나 보다. 어떻게 저토록 선이 아름다운 마애불을 그렸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내 다리가 후들거리고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1130분에 선무도를 공연한다.

<골굴사 선무도>

   토함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자락에 터만 남아 있는 절터가 있다. 절 이름도 전해지지 않아 동네 이름을 따서 장항리 사지라고 한다. 절터에는 5층 석탑 2기가 남아 있는데 서탑은 원형에 가까운 것 같은데 동탑은 몸돌이 없어 지붕돌만 쌓아 놓은 것 같다. 그리고 불상을 모셨던 좌대가 있는데 둘레에 새겨진 조각은 신심이 가득한 예술이다.

<장항리 사지 5층석탑>

<좌대>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백률사는 법흥왕 14(527)에 순교를 자청한 이차돈(異次頓)의 목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진 장소에 절을 세웠는데 이절이 바로 백률사(栢栗寺).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은 불국사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금동비로지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과 더불어 신라 3대 금동불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굴불사 대웅전>

백률사(栢栗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네 면에 불상과 보살상을 조각한 신라의 대표적인 사면(四面) 석불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로 행차하던 중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파보았더니 네 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진 큰 돌이 나와 여기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굴불사(掘佛寺)라 했다고 한다.

  <불굴사 사방불상>

  역사는 바로 현재이고 미래다. 중국은 소위 동북공정으로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기들의 변방국가로 편입하여 역사왜곡을 주저 없이 자행하고 있다. 나당 연합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고 하나 대동강 이북의 땅은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고구려사람 대조영이 옛 땅은 물론 지금의 연해주지역까지 차지하는 발해국을 건국하여 명맥을 이어 왔으나, 발해 멸망 후 지금까지 그 땅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역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경주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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