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 길(열두 번째)
(안남면→안내면 인포리, 2016년 7월 20일)
瓦也 정유순
새벽부터 매미는 세차게 울어댄다. 매미는 7여 년 동안 땅 속에서 살다가 바깥으로 나와 10여 일을 살다가 알을 낳고 생을 마감한다. 큰소리로 우는 수컷일수록 암컷에게 인기가 많다고 하는데, 나무 밑으로 떨어져 죽어 있는 매미는 짧은 바깥세상에서 제대로 짝을 만나 한이라도 풀었는지 모르겠다. 매미는 “이슬만 먹고 살아 깨끗하고 농부가 지은 곡식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평상시 임금이 쓰는 모자에는 ‘청렴함의 상징’으로 매미날개 모양을 달아 익선관(翼善冠)이라고 부른다.
<매미>
옥천군 안남면사무소 앞 배바우광장에서 가볍게 준비를 하고 안남천을 따라 ‘대청호 오백리 길’ 열두 번째 걷기를 시작한다. 길옆의 담배 밭에는 담배 잎 수확이 한창이고, 옆 밭의 도라지도 꽃을 만발하며 땅속의 뿌리를 실하게 한다. 그러나 강물은 더위에 지쳤는지 흐름을 멈추고 고요하다.
<안남면사무소>
<안남천(금강)>
마을 앞 포장도로를 따라 간 끝 지점에는 ‘독락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독락정(獨樂亭)은 1607년(선조 40년)에 절충장군중추부사(折衝將軍中樞副使)를 지낸 주몽득이라는 사람이 세운 정자로 지었지만, 서당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후에 유생(儒生)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전당으로 발전하여 서원(書院)역할을 했다고 한다.
<독락정>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과 마루가 각1칸씩 있으며, 금강의 풍광을 내려다보며 층암절벽 바위산 등주봉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이곳은 현재 초계주씨독락공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충청북도문화재 자료 제23호로 지정된 문화재가 다른 각종 문헌에 건립된 연대가 1607년으로 나오는데, 독락정 안내판에는 1630년으로 나와 헷갈리게 한다. 충분한 고증을 거쳐 정확하게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독락정 안내판>
마을 끝에 자리한 곳에 독락정이 있어서 마을 이름도 독락정인 마을을 지나 강을 따라 난 임도를 따라 초목이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간다. 등주봉을 올라가기 위해 금정골 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길가에는 밤에만 활짝 핀다는 달맞이꽃이 환하게 맞이한다. (개)망초는 조선이 망할 무렵에 외국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면, 달맞이꽃은 해방될 무렵에 들어왔다고 하여 해방초라고도 하며 꽃말도 ‘그리움’으로 되었다고 한다.
<달맞이꽃>
낚시가 허용된 지역인지는 모르지만 물가에는 낚시 끝이 물속을 향해 드리워져 있고, 달맞이꽃 너머로 펼쳐진 수면위에는 하늘의 구름을 가득히 안아 주면서 물기를 가득 품은 초목들과 함께 따가운 햇볕을 차단해 주지만 장마비가 아닌 몸에서 솟아나는 땀방울이 온몸을 적신다.
<대청호 낚시>
<대청호(금강)>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있는 등주봉(登舟峯, 384m) 가는 길목에는 축축한 대지의 습도 때문인지 이름 모르는 버섯들이 꽃처럼 피어 있다. 간혹 식용이 가능할 것 같은 버섯들도 많이 보이지만 워낙 독버섯이 많아서 함부로 만지기가 조심스러워 진다. 올라가는 길이 좀 가파러 턱밑까지 숨이 차온다.
<등주봉 가는길>
<(솔)버섯>
등주봉 아래에는 ‘둔주봉산성’이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아마 등주봉 또는 둔주봉이라는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것 또한 헷갈린다. 때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를 수도 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명칭이 변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어 보는 사람만 답답할 따름이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마안형(馬鞍形)토성’으로 둘레 약150m 정도라고 하나, 사방이 확 트인 것으로 보아 망루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상에 묘(墓) 모양을 한 봉분이 자리하고 있다.
<둔주봉산성 표지석>
<등주봉 정상>
정상아래 비탈진 곳에 불편하게 주저앉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고 올라온 반대방향에 있는 한반도지형전망대를 향해 하산을 한다. 올라갈 때 가파른 것처럼 내려올 때도 경사가 급하다. 숲길 사이를 헤집고 한참을 내려오니 산불감시초소가 보이고, 바로 옆에는 둔주봉 정자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한반도지형은 우리나라 지도를 좌∙우 거꾸로 바꾸어 놓은 형상이다.
<한반도지형>
<둔주봉정 현판>
전망대에서 내려온 곳은 안남면사무소와 피실나루터로 가는 ‘점촌삼거리’이다. 피실삼거리 쪽으로 내려와 주차금지 바리게이트를 열고 비교적 넓은 길을 따라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가는 길이 아니라고 소란스럽다. 길벗 한분은 선두를 잡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 간다. 이미 선두그룹은 물가에 당도하여 물을 건너려고 시도를 했으나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온다고 한다. 결론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점촌고개 삼거리>
<주차금지 바리게이트>
다시 점촌삼거리 쪽으로 올라와 지도를 검색해 보며 바리게이트가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다. 대나무 사이 길은 잡초가 무성하여 길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러나 수풀을 해치며 새로 길을 개척하듯이 한발 한발 내딛는다.
<대밭 사이 길>
물기가 찬 흙길에서는 미끄러지기도 하며 가시덩굴을 피하고 올가미처럼 발을 휘감는 풀들을 제치며 개척등반 하듯 많은 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길을 더듬는다. 숨을 고르려고 잠시 쉬는데 바로 앞 작은 웅덩이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세상에 제일 좋은 감로수(甘露水)로다. 비어 있는 물병에 이 물을 채우면서 다시 한 번 자연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길벗 한분께서 가수 ‘안다성’이 50여 년 전에 부른 “사랑이 메아리 칠 때∼”를 열창하여 바닥난 기를 복 돋아 준다.
<등주봉에서 본 대청호>
감로수 한 모금에 원기를 얻어 다시 산으로 기어오른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앞으로만 가야하는 절박한 심사가 지금이 아닌 가도 생각해 본다. 기다시피 산마루에 가까워 오니 금령김씨(金寧金氏) 묘역이 조성된 곳이 나오고, 다음에 길이 나오며 손바닥만 한 ‘대청호오백리길’ 푯말이 아주 크게 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빽(배경)은 없어도 빠꾸(후진)는 없다”는 시세말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대청호오백리길 푯말>
산마루에 올라서니 멀리 옥천군 안내면 쪽으로 대청호가 가물거리고, 구불구불한 인포 지선임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온다. 참깨 밭의 참깨는 오늘의 힘들었던 고행을 모르는지 하얀 꽃을 피우고, 인삼 밭의 인삼도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오지빌리지 캠핑장을 지나 안내중학교가 있는 인포리 화인마을에 도착하여 계획상 더 가야할 길을 다음으로 미루고 지나온 길을 회상한다.
<인포리 화인경로당>
이번 도보여행에서 다시 깨달은 것은 매 순간순간 부딪히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피할 수 없으면 맘껏 즐기라”고 했나보다. 비록 도보 도중 길을 잘못 들어 잠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을 찾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모두가 행복했고 즐거웠다.
) --><전망대에서 본 등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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