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천리 길을 걷노라면(세 번째)
(영동양산→옥천이원, 2016. 7. 9∼7. 10)
瓦也 정유순
산 위로 대보름날 뜨는 달을 보고 그해 농사를 점치며 풍년을 기원했다는 월영산(月影山, 529m) 자락에는 안개가 어두운 장막을 두른 듯, 오늘의 폭염(暴炎)을 예고한다.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 출발점은 ‘금강하구둑으로부터 270㎞ 지점이다.
<안개 자욱한 산>
<금강 이정표>
지방도로 68호선 포장도로를 따라 금강의 물살을 타고 하류로 내려온다. 엊그제 집중호우로 둔치까지 덮쳐버려 낮은 지대에 있는 수목들은 미쳐 씻어내지 못한 쓰레기들이 허리를 휘 감는데,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금강의 물은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처럼 유유히 흐른다.
<금강의 아침>
<금강 流水>
전북 무주와 옥천으로 갈라지는 모리삼거리를 지나 수두리마을 어느 집에서 시원한 샘물로 푹푹 찌는 목을 축이고, 강둑으로 내려와 수초가 우거진 하천부지 길로 접어들어 미처 빠지지 못해 물이 고인 길을 뜀뛰기하듯 폴짝이며 걸어가다가 솔숲이 우거진 소나무 밭으로 올라가니 ‘송호리관광지’이다. 솔밭 귀퉁이에 ‘양산 8경’의 6경인 ‘여의정’이란 정자가 기풍 있게 서 있다.
<송호리관광지 솔밭>
<여의정>
조금 더 하류에는 흐르는 물들이 소용돌이치며 휘감기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양산 8경’ 중 8경에 해당하는 ‘용암’이다. 바위의 생김새는 보통바위 같으나 그 주변을 맴도는 물살은 온 세상을 빨아들일 듯 돌기가 세다. 하류 쪽 둑 밑 물도 빨아 올려 왈츠를 추듯 몇 바퀴 뺑뺑이 돌려 봉곡교 아래로 흘러 보낸다. 마치 물속에서 용이 승천을 준비하는 것 같다.
<용암>
강 건너에는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와 앉은 바위 위에 날렵한 지붕이 얹혀 진 정자가 보인다. 봉곡교를 건너 가까이 갈수록 정자의 모습은 금강의 비단결에 감기고 소나무가 에워 싼 모습이 치맛자락 펄럭이며 속살을 보일 듯 말 듯 뭇 나그네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늘의 선녀 모녀가 강물에 비친 낙락장송(落落長松)과 석대(石臺)가 어우러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하강하여 목욕을 하였던 ‘강선대(降仙臺)’라는 정자로 ‘양산 8경’ 중 2경이다.
<강선대>
강선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왜 서 있는지 모르는 채하정(彩霞亭)이라는 정자 앞으로 하여 그늘도 없는 강변길을 걷는다. 길옆 밭에는 감나무 모목 밭이 넓게 자리하고 ‘금강하구둑으로부터 259㎞’지점 봉곡배수장 옆으로 휘어진 절벽 밑으로 강물은 흐르는데,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은 찾기가 힘들다.
봉곡배수장 뒤로하여 ‘미령이마을’길로 접어들어 고개를 넘는다. 마을 뒤 바위 언덕에는 최근 충북지사를 지내신 분이 현판을 쓴 명양정(鳴陽亭)이란 정자가 고개를 들어 금강을 굽어본다.
<명양정>
<명양정에서 본 금강>
마을로 내려오니 영동군 양강면 구강리에 사시는 장 아무개라는 마을주민 한 분이 손수 농사를 지은 수박 두덩어리를 흔쾌히 내놓으시며 목이라도 축이시란다. 시골에 가면 이농현상이 심하여 사람구경 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폭염에 허덕이며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더위 먹지 말고 힘내라”는 주인의 말씀 한마디가 시원한 수박보다 더 시원하고 힘이 된다.
<마을주민이 내놓은 수박>
오후에는 한 낯의 무더위도 피할 겸하여 ‘양산 8경’의 1경인 천태산영국사로 간다. 천태산(天台山, 715m)을 올라가는 길목부터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옥같은 시들을 천에 새기어 계곡을 수놓고, 미끄럼틀 같은 삼단폭포는 명주실 타래처럼 길게 물줄기를 뽑는다. 천태산은 고려시대 천태종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산 이름도 ‘천태’가 된 영동의 명산으로 ‘충북의 설악’이라 불릴 정도로 산세가 뛰어나며,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주변에 이름난 명소가 많이 있다고 한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
<삼단폭포>
삼단폭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天台山寧國寺(천태산영국사)’라는 일주문이 보이고, 일주문을 지나자 우측으로 천년 묵은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한다. 이 나무는 높이가 31m, 가슴 높이의 둘레는 11m, 나이는 천살 정도로 추정한단다. 이 은행나무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운다고 하며, 가을에는 노란 은행잎이 주변 경관과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룰 것 같다.
<영국사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지나 문을 통과하자 영국사 대웅전이 나온다. 영국사는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8년에 원각국사(圓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려 고종 때 안종필(安鍾弼)이 왕명으로 중건하여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로 부르게 되었으며, 홍건적이 처 들어오자 공민왕이 이곳으로 몽진하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다가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으로 수복하게 되자 왕이 기뻐하며 사찰 이름을 영국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영국사 대웅전>
대웅전을 나와 좌측으로 올라가면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가 나온다. 이 비석은 1153년(고려 의종7년)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1171년(고려 의종1년)에 왕사(王師)가 된 원각국사의 비이다. 비 몸통은 점판암 1장으로 되어 있으며, 총알을 맞아 손상된 곳이 많아 그 내용 전부를 알 수는 없다고 한다. 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과 비 머리에 있는 네 마리의 용은 매우 특이하다. 원각국사비 뒤에는 누구의 비인지 알 수 없는 승탑 2기가 있다.
<원각국사 비>
영국사에서 남쪽으로 약200여m쯤 되는 언덕에는 보물 제532호로 지정된 원각국사의 사리를 모신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僧塔)이 있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의 일종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많이 조성되었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승탑이고,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영국사 승탑>
일주문 안으로 하여 동쪽으로 500여m쯤 되는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에는 망탑봉 삼층석탑(望塔峯 三層石塔)이 있다. 이 탑은 자연화강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암석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기단을 만들었다. 탑 돌은 받침을 두고 그 위에 세워졌고, 지붕돌은 다른 돌로 만들어 졌다.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는 2.43m이다. 그리고 20여m 떨어진 지점에는 사람이 흔들면 흔들린다는 무게 10여 톤의 상어바위가 바위 위에 버티고 있다.
<망탑봉 삼층석탑>
<상어 흔들바위>
다시 양강면 구강리로 나와 강변을 따라 금강을 걷는다. 하천부지의 식물들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지만, 외래종인 ‘가시박’이 넝쿨을 이뤄 그물처럼 바닥을 온통 덮는다. 그리고 엊그제 장맛비로 떠내려 온 쓰레기들이 쓰레기 적환장처럼 무더기로 쌓여 있는 곳도 있다. 평소에 개념 없이 아무렇게나 버린 물건들이 쓰레기가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만 같다.
<가시박>
<금강변에 쌓인 쓰레기>
물살이 빠른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니 제법 멋을 부린 다리가 멀리서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다리 상판 위로 솟은 가로등이 해금을 닮은 모습으로 다리이름이 ‘죽청교’이다. 죽청교는 국악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하여 해금의 곡선라인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해금의 조율(調律)기를 조명부분으로 표현하여 역동의 청정이미지를 상징화 할 수 있도록 구성된 디자인이라고 한다.
<죽청교>
죽청교를 지나 ‘양산심천로’를 따라 강변길로 계속 걷는다. 태소마을을 지나 기호보건진료소가 있는 마을 과수원에는 한 참 무르익어 가야할 사과가 무리지어 떨어져 있고, 옆의 포도밭에는 마을의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려 익어간다. 강변에 있던 ‘가시박’은 산으로 기어 올라갈 준비를 이미 끝냈고, 그 옆의 머루도 덩달아 송이를 키워나간다.
<떨어진 사과>
<포도>
<숲 속의 머루>
빠르게 흘러 내려오던 물살이 갑자기 고요해진다. 영동 심천(深川)은 말 그대로 “깊은 내”라 그런지 빠른 물살을 강바닥으로 흡수하여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다. 상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서 매입한 땅에는 “1. 농작물을 재배하는 행위, 2.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3. 함부로 점유하는 행위” 등 금지행위를 알리는 알림판이 수변구역을 지키고 있고, 그 앞을 지나 언덕길로 힘겹게 올라가니 오늘의 종점인 난계국악박물관이 나온다.
<수변구역 표지판>
<국악박물관 입구>
깊은 잠을 자고 난 후 개운한 마음으로 오늘은 옥계폭포로 방향을 돌린다. 옥계폭포는 달이산(또는 월이산, 551m)의 주봉과 서봉 사이에서 내달리는 산등성이 아래에 있는 폭포로, 멀리서 폭포를 바라보면 여자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여성을 상징하기도 하여 구슬 옥(玉)자를 써서 옥계폭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약30여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오색 물보라를 일으키며 속세가 아닌 신선의 경지를 방불케 하는 듯하다.
<옥계폭포>
그리고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분이신 영동군 심천면 출신 박연(朴堧, 1378. 8∼1458. 3)은 오색영롱한 폭포수 아래에서 피리를 연주하다가 바위틈에 난 난초에 반해 호를 난초 난(蘭)자와 시내 계(溪)자를 써서 ‘난계(蘭溪)’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옥계폭포를 일명 ‘박연폭포’라고도 하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옥계폭포 원경>
옥계폭포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간다. 폭포 위에서 달이산으로 가는 등산로를 피해 직진하여 나오니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단군할아버지 닮은 동상이 나오고, 돌로 쌓아 만든 삼족오(三足烏) 형상을 한 조형물도 나온다. 이곳은 모 재단에서 운영하는 명상센터로 우리 고대 선조들의 이상을 수련하는 곳 같다.
<단군할아버지 닮은 동상>
<돌무더기로 만든 삼족오 형상>
우리민족은 고대부터 천지인(天地人) 사상을 가진 민족으로서 태양의 아들, 하늘의 아들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만물의 상징물로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나 유물에 많이 그려져 있으며, 우리민족이 천손(天孫)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서 세상을 다스린다)” 정신을 펼쳐 나가라는 뜻 같다. 마곡마을로 나오는 길목에도 대종교(大倧敎)의 기본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을 새긴 비석이 보인다.
<삼족오 설명문>
<천부경>
마곡마을에서 난계국악박물관 쪽으로 나와 난계사(蘭溪祠)를 방문한다. 난계사는 영동군 심천면 출신 박연(朴堧)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7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박연은 조선조 세종 때 음악을 전념하는 ‘관습도감 제조’가되어 당시에 불완전한 악기의 율조(律調)를 정리하여 악서를 편찬하였고, 궁정에서 향악을 폐하고 아악을 연주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개혁하였다. 특히 피리에 능했으며, 조선 초기에 국악의 기반을 닦아놓은 업적으로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더불어 3대 악성으로 추앙 받고 있다.
<난계 박연 동상>
<난계사>
다시 강변으로 나와 난계국악박물관 앞에서 금강을 따라 하류로 걷기 시작한다. 폭염경보가 내린 날씨는 폭폭 찐다. 흐르는 물살도 더위에 지치는 가 보다. 영동출신 시인 박명용(1940∼2008)의 ‘금강’이란 시가 “강은 푸른/물소리를 낸다/강은 몸으로/하늘을 안고/일렁인다/(중략)/사람들을 넉넉하게/일구어 주는/싱싱한 생명이다/깨끗한 정신이다/햇살 쏟아지는/영원한 금강이여”로 노래하며 금강을 역동적인 생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안겨준다.
<박명용의 금강 시비>
옥계폭포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으로 오전을 마감하고 옥천군 옥천읍에 있는 용암사로 간다. 용암사로 갈지자로 올라가는 길은 포장된 도로로 작열하는 복사열이 호흡을 뜨겁게 한다. 헉헉대며 도착한 용암사의 외모는 성채를 쌓아 놓은 듯 벽이 견고하다.
<용암사로 올라가는 길>
<용암사 외벽>
용암사(龍巖寺)는 신라 진흥왕 13년(552년)에 천축(天竺, 현 인도)국에 다녀온 의신(義信)이 세운 사찰이란다. 절 이름은 경내의 용처럼 닮은 바위에서 유래한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의 마지막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용바위에서 서라벌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설도 있다. 창건 이후 중수나 중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고, 임진왜란 때 병화로 폐허되었다는 설만 무성하다.
<용암사 대웅전>
대웅전 뒤로하여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장령산(長嶺山)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인 마애불(磨崖佛)이 나온다. 이 불상은 천연바위에 새겨진 높이 3m의 입상으로 붉은 바위색이 매우 인상적이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는 모양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에 유행하던 기법이 잘 표현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 들렀던 마의태자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태자의 모습을 새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용암사 마애불>
마애불에서 우측으로 내려오면 동∙서 삼층석탑이 나온다. 이 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는 달리 대웅전의 앞이 아니라 사방이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있다. 석탑이 사방의 조망권이 확보된 곳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천비보사상이란 탑이나 건물을 건립해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복 돋아 준다는 것으로, 이 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용암사 동.서 삼층석탑>
마의태자가 서라벌을 생각하며 바라봤을 남쪽의 넓은 들을 건너 첩첩히 쌓인 산 능선을 바라보며 이원대교로 이동한다. 이원대교는 514호 지방도로가 금강을 건너가는 다리다. 교량 옆 귀퉁이에는 금강 수질오염자동측정소가 말없이 자리한다. 제방 길 따라 이원면 용방리 쪽 하류로 발길을 옮긴다. ‘금강 하구둑으로부터 235㎞’ 지점 푯말이 스친다.
<이원대교>
<금강 이정표>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은 조선조 주자학의 대가이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태어난 곳으로 ‘옥천 송시열 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유허비(遺墟碑)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를 말한다. 옥천에서 금강을 따라 대전 회덕과 논산에 이르기 까지 우암의 이야기는 이어질 것을 예상하며, 구룡촌 고개를 넘어 마을을 지나 경부선 고속열차가 지나가는 칠방리 입구에서 오늘을 정리한다.
<옥천 우암 송시열 유허비각>
<칠방리 마을 표지석>
돌아오는 귀경길에 노을 진 서쪽하늘은 왜 이리 붉게 물드는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하늘도 다음의 금강트레킹이 무척이나 그리워지는 가 보다.
<7월 10일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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