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國民)이라는 이름
瓦也 정유순
1937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지로[南次郞]는 소위 내선일체라는 것을 주창하며 조선인들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이를 조선인들에게 세뇌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황국신민으로서 지켜야할 서약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이각종이 문안을 작성하고 김대우가 실무를 담당해 문안을 완성한 후, 1937년 10월 2일부터 공식적으로 집행되었다. 이처럼 친일파들이 만들었기에 ‘일제가 만들어 암송을 강요했다’라는 말은 쓰지 않고‘일제가 암송을 강요했다’고만 한다.
<황국신민서사와 조선교육의 3대강령-네이버캡쳐>
이각종(李覺鍾, 일본식 이름-靑山覺鍾, 1888∼1968)과 김대우(金大羽, 1900∼1976)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국민정신총동원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적극 주장한 친일관료 출신이다. 두 사람 모두 해방 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풀려났다. 이각종은 일본의 패전으로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고 하며, 김대우는 국회의원에 3번 출마하여 낙선했다고 한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는 아동용과 성인용 두 가지로 되어 있는데, 아동용에서는 “1.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 성인용에서는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서 군국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공고히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라는 서사를 제창하도록 하였다.
<황국신민서사 - 네이버캡쳐>
1937년은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때였는데, 조선인의 개인적 신체는 이처럼 천황과 일제에 대한 충군애국을 바치는 사회적 신체로 동원되고 소비되었다. 맹세문은 한마디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개조하려는 음흉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황국신민서사>는 조선의 민중들에겐 고통이었다. 학교와 관공서, 은행을 비롯한 회사와 공장에서 조회를 하면서 맹세문을 낭송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집회 등 행사 때 마다 외워서 낭송을 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황국신민서사>는 단순히 암송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각 교실 정면에 서약 액자를 걸어 교실을 출입할 때마다 경례를 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황국신민의 서약 실천 일지를 통해 그 맹세의 진심을 보여주기를 확인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학교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는 <황국신민서사>를 족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 놓고 외우게 했고, 마을마다 애국반을 만들어 반상회를 자주 열고 이 서사를 항상 제창하도록 하였다. 각 관공서와 회사 등에서도 조회 및 5인 이상의 회합 시에 서사를 제창하도록 하였다.
1938년 1월부터는 「황국신민서사」를 게재하지 않는 신문과 잡지는 불온문서 취급을 하였고, 1939년 11월에는 조선교육회 주도로 조선 전체 아동·학생과 교육관계자로부터 모금을 실시하여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경내에 <황국신민서사의 탑[皇國臣民誓詞之柱]>을 세웠고, 전국의 각 지에도 <황국신민서사비>를 세우게 했다. 라디오 체조의 형식으로 황국신민체조가 전략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황국신민서사 장면 - 네이버캡쳐>
서사(誓詞)란 맹세문이라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보통 신이나 높은 사람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때 쓰는 단어다. 한국에서는 서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황국신민의 맹세라고도 한다. 이와 유사한 행위들이 해방된 후에도 1949년에 이승만 정권이 <우리의 맹서>를 만들었으나, 4·19 혁명 이후로 없어졌다.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한 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후 폐지론이 불거지다가 2003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기에 대한 맹세>도 느낌이 비슷하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국민(國民)’이란 이름도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 말로 ‘일본 천황(天皇)의 충성스런 신민(臣民)’이라는 뜻이다. <황국신민서사>가 나오기 전에는 국민이라는 용어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연유로 교육부는 1995년 8월 11일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국민학교(國民學校)의 명칭을 변경한다.”고 발표하고 1995년 12월 29일 교육법을 개정하여 1996년 3월 1일부터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初等學校)>로 변경하였다.
전에는 대중적으로 <동포(同胞)나 겨레>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었는데, <황국신민서사> 이후 갑자기 튀어 나온 <국민>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영토(領土) 주권(主權)과 함께 국가구성 3요소의 하나다. 그러면 ‘국민(國民)’이라는 용어는 어디서 나왔을까? 한자 國民의 자원(字源)을 따져보면 <國>자는 ‘나라’를 뜻하고, <民>자는 ‘백성’이나 ‘사람’을 뜻하는 글자다.
그러나 ‘民(민)자’의 원형을 보면 사람의 눈에 열십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송곳으로 사람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노예의 왼쪽 눈을 멀게 하여 저항하거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民자는 그러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民자의 본래 의미는 ‘노예’였다. 물론 지금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고 있지만, 글자의 유래를 보면 끔찍하기 그지없다.
<주(周)나라 대 금문의 民자들 - 네이버캡쳐>
그리고 우리나라는 국민 대신 ‘국인(國人)’이라는 용어가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온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선덕여왕 즉위에 대해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국인(國人)이 덕만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덕만(德曼) 즉 선덕여왕은 부왕(父王)인 진평왕(眞平王)이 아들 없이 죽자 ‘국인’에 의해 임금이 됐다는 것이다. 당시 국인은 김춘추(金春秋)나 김유신(金庾信) 같은 왕족이나 기반 있는 정치 세력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6월 2일(기유)조에 “일본(日本) 지좌전(志佐殿)이 사송(使送)한 객인(客人)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었다. 정부에서 아뢰었다. 지좌전(志佐殿)이 사송한 객인이 이르기를, ‘국인(國人)으로 피로(被虜)되어 우리나라에 있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보내면 쇄환(刷還)해 올 수 있습니다.’고 하니, 신 등의 생각으로는 통신관(通信官)을 들여보내어 추쇄(推刷)해 옴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고 적혀 있다. <○日本 志佐殿, 使送客人, 來獻土物。 政府啓: "志佐殿使送客人云: ‘國人被擄在我土者頗多, 遣人則可得刷來。’ 臣等以爲, 通信官入送, 推刷似便。" 從之。>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국민(國民)>이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찰싹 붙어 있는 것처럼 사용하고 있어 <시민(市民)> 등 다른 용어로 바꾸기가 매우 힘들 것 같다. 그래서 <국민>이라는 자원(字源)이나 우리들 앞에 나온 배경을 확실히 알고 사용했으면 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국민이라는 말의 역사적 배경, 현실적 사용 양태를 꼼꼼하게 따져서 검토해볼 때, 언젠가는 국민이라는 말보다는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국인(國人)>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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