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길에서 번암 채제공을 만나다

와야 정유순 2022. 2. 20. 01:01

길에서 번암 채제공을 만나다

(2022 2 8)

瓦也 정유순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이는 1780(정조 4) 홍국영의 세도가 무너진 후 탄핵을 받아 노량(鷺梁)의 삼호(三湖) 8년간 은거하다 1788년 정조(正祖)의 특채로 우의정에 발탁되었을 때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위의 6가지 조건을 진달했다고 한다. 세종에 이어 조선 후반기의 문예중흥시대를 연 정조를 바르게 보필했던 번암 채제공을 경기도 용인시의 김량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채제공 영정-네이버캡쳐>
 

  고려시대 때 김량(金良)이라는 사람이 맨 처음 장을 열어서 김량장(金良場)으로 불리는 용인시장을 가기 위해 에버라인 김량장역에서 내려 금학천변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눈에 번쩍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라는 조그만 푯말이 아주 크게 들어온다. ‘정조 어제는 정조가 만들었다는 뜻일 것이고, ‘뇌문비의 뇌문(誄文)은 왕이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손수 고인의 공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지은 조문 형식의 글이고, 뇌문비는 그것을 비석에 새긴 것이다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표지>
 

  매 5일과 10일에 열리는 용인장날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채제공을 만나기 위해 길을 물어본다. 그러나 딱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날씨가 추워 거리에 나온 사람이 적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그냥 길을 나서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어봐서 그랬을 것이다. 길을 더듬더듬 찾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5에 있는 뇌문비각 부근에 도착하였고, 가는 길은 아파트 건물 좁은 사이로 무덤과 함께 보인다. 1978 11월 경기도 유형문화재(76)로 지정된 뇌문비각은 정면 1, 측면 각 1칸의 팔작지붕이다

<김량장역>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 먼저 뇌문비각을 둘러본다. 문은 굳게 잠겨 있어 비문(碑文)을 다 볼 수는 없지만 문 살 틈으로 비석을 탐색한다. 비신(碑身)은 사각형 받침돌에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을 취하고 있다.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신 상단에 가로로 쓰여 진 어제(御製) 뇌문(誄文)”이란 글씨는 전서(篆書)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해서(楷書)체로 씌어져 있고, 비석의 재료는 오석(烏石)이다. 건립연대는 기미(己未) 삼월(三月) 이십육일(二十六日)”이라고 쓰여 있어 1799년임을 알 수 있다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각>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의 뜻을 표한 것으로 서두에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 하면서 칭송하였다. 이어 그의 성품에 대해 그 기개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라고 하였고, 문장은 강개하고 청명하여 장주의 정을 취한 듯 열자(列子)의 진액인 듯하고, 사마천의 골수 같고 반고의 힘줄 같다.’고 격찬하였다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
 

  정조 스스로 경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득실히 믿었노라 하였다. 끝부분에서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 한다 소문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 하면서 5백여 마디의 말로써 뇌문을 지었다고 씌어 있다. 비신 위에 화강암으로 된 네모난 비좌(碑座)와 팔작지붕형의 옥개를 올려놓았다. 비석의 전체높이는 228이며, 비신(碑身)의 규모는 높이 144cm, 너비 54cm, 두께 29cm이다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네이버캡쳐>
 

  뇌문비각에서 직선거리로 약50 떨어진 석축(石築) 위에 채제공의 묘소가 있다. 묘제는 단분독장묘(單墳獨葬墓)로 묘표(墓標),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고석(鼓石) 1,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1, 양석(羊石) 1쌍을 갖추고 있다. 묘표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이다. 상석은 2개의 고석으로 받쳤으며, 고석은 기대석 위에 놓여져 3면에 문고리 장식을 하였다. 향로석은 전형적인 4각 탁자 양식이며, 망주석은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다. 양석은 풍만한 몸집에 얼굴과 뿔, 꼬리, 다리 등이 조각되어 있다

<채제공 선생 묘 표지>
 

  정조 임금이 직접 뇌문을 지어 내릴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던 채제공은 본관이 평강(平康)이며,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채응일(蔡膺一)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 이만성(李萬成)의 딸이고, 부인은 동복오씨(同福吳氏) 오필운(吳弼運)의 딸이다. 1735(영조 11) 향시(鄕試)에 급제한 뒤 1743(영조 19) 문과정시(文科庭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채제공 묘 올라가는 길>
 

  1748(영조 24)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인 한림소시(翰林召試)에 나가 수석을 차지한 뒤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대교(待敎)가 되었다. 이듬해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 이조좌랑(吏曹佐郞), 정언(正言), 부교리(副郊理) 등을 역임하였다. 1751(영조 27)에 중인의 분산(墳山)을 탈취한 죄로 삼척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채제공 묘>
 

  그러나 채제공은 영조·정조 대에 국정을 주도하였던 문신으로 당시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남인에 속해 있었지만 한성판윤(漢城判尹), 병조판서(兵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도승지,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좌··영의정을 모두 지냈으니 능력, 성품 어느 하나 빠진 것이 없는 명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도세자의 스승으로서 영조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애썼고, 조정에 얼마 남지 않은 소론과 남인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다

<채제공 묘>
 

  특히 정조의 역점 사업이었던 수원화성 건설에 채제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책임 하에 건설하게 된다. 채제공은 당시 영의정이자 수원유수를 겸직하였다. 수원화성 건설하기로 계획을 세우기 10년 전인 1778(정조 2) 청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북경거리를 돌아보면서 조선의 시장제도를 바꾸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북경 거리는 길도 넓고 시장은 누구나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파는데, 조선의 한양 거리는 길도 비좁고 허가 받은 사람만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원영동시장과 팔달문>
 

  13년 후 좌의정이 된 채제공은 신해통공이라는 정책을 추진한다. 누구나 시장에서 물건을 팔거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가격도 조정에서 정해주었는데, 사고파는 과정에서 정하도록 했더니 물가가 쑥 내려가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물건을 제값에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상인들과, 이들과 결탁한 양반들의 반발이 심했다. 결국 한양에서는 신해통공 정책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채제공은 수원화성을 건설하고 팔달문 근처에 지금과 같은 자유시장을 만들었다

<팔달문시장>
 

  신해통공(辛亥通共)이란 1791(정조 15)에 채제공의 주창으로 도가상업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육의전(六矣廛) 이외의 모든 시전에게 금난전전매권(禁亂廛專賣權), 즉 도가권(都價權)을 허용하지 말며, 설립 30년 미만의 시전은 이를 폐지할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된 정책이다. 이로 인해 일반상인들은 금난전권에 저촉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책은 당시의 새로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반영해주었으며, 당시 상업발전의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해준 개혁정책이었다

<수원지동시장>
 

  수원화성 건설과 관련하여 주목할 인물이 박제가(朴齊家). 1778년에 채제공이 청나라 사신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다녀와서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가 <북학의(北學議)>라는 책이다. 정조는 과학 기술 교육을 위해서는 서양의 학문도 배워야 할 것을 주장 <북학의>를 읽은 후 박제가를 세 번이나 더 청나라에 다녀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채제공과 정약용은 현륭원 천장과 수원화성 축성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심축이었다. 수원화성은 정약용의 설계와 채제공의 감독 능력이 상생효과를 발휘한 결과였다

<정조대왕 좌상-유상박물관 앞>
 

  채제공은 정조 재위 24년 가운데 23년을 보필하였다. 1799년 채제공이 별세하고 그 다음 해인 1800년에는 정조가 승하한다.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던 정조가 죽고, 뒤를 이어 11살의 순조(純祖)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른바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인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고, 조선은 세도정치와 함께 암흑기로 빠져 국운이 기울게 된다

<수원화성의 화서문과 서북공돈>
 

  이때 채제공은 사후인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黃嗣永)백서 사건으로 관작이 박탈되었다가 1823(순조 23) ‘서얼(庶孼)도 차별 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신유박해는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정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권력 다툼의 일환이었고, 이때 입은 상처인지는 몰라도 봉분(封墳)은 잔디가 보이지 않고 맨 흙만 겨울을 나고 있었다. 돌아오는 한식(寒食)에는 사초(莎草)를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수원화성의 용연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묘표(墓標)의 전면에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823년 복관과 함께 시호를 받으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묘표에는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검교 규장각제학 증시 문숙공번암채선생제공지묘(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官觀象監事檢校 奎章閣提學 贈諡 文肅公樊巖蔡先生濟恭之墓)”라고 쓰여 있다

<채제공 묘표-네이버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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