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서오릉(2)
(2022년 1월 31일)
瓦也 정유순
순창원 옆에는 서오릉의 효시가 된 경릉이 자리한다. 경릉(敬陵)은 추존왕 덕종(德宗)과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잠든 곳이다. 홍살문에서 참도로 들어서며 올려다보면 세조(世祖) 때부터 시행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쌍릉이 보인다. 정면에 정자각이 있고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경릉에 올라서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앞에서 바라보아 왕은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눕는 게 보통인데 경릉은 반대로 덕종이 오른쪽에 잠들어 있다.
<경릉 참도와 정자각>
덕종은 세조가 즉위 한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세조는 즉위와 함께 능제와 장례의 간소화를 주장했고, 이에 세조의 능제 간소화정책에 처음으로 적용된 게 덕종릉이다. 더구나 덕종은 당시 추존(1478년, 성종 9)되기 전이어서 대군묘제도를 적용했으니 초라할 수밖에 없다. 덕종으로 추존된 뒤 왕릉제로 바꾸려했으나 대왕대비 소혜왕후가 손대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소혜왕후릉은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뒤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세상을 떠나 왕릉의 예를 따랐다.
<경릉(덕종)>
인수대비(仁粹大妃)로 더 잘 알려진 소혜왕후 한씨는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세조 원년(1455)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월산대군과 성종 형제를 두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뒤 왕비로 추존되면서 소혜왕후가 되었는데 1504년(연산군10)에 68세로 승하하였다. 특히 불경에 조예가 깊었으며,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친 내훈(內訓)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현재 마모가 심해 윤곽만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경릉(소혜왕후)>
경릉을 나와 홍릉과 창릉으로 가는 길목 옆에는 대빈 묘가 있다. 대빈 묘(大嬪墓)는 숙종의 넷째 부인이며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禧嬪張氏, 1659∼1701)의 묘다. 43세를 일기로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죽임을 당한 희빈장씨의 삶은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쟁 속에서 안정기에 접어든 청나라와의 관계 개선과 국가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숙종 시대의 엄중한 상황과 굳게 맞물려 있다. 1970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옮겨온 묘는 터도 봉분도 곡장도 석물도 초라하게 보인다.
<대빈묘>
대빈 묘를 지나 숨 가쁘게 고개를 넘으면 홍릉이 나온다. 홍릉(弘陵)의 주인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1692∼1757)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태어나 1704년 13세에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뒤에 영조)과 혼례를 치렀다.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에 봉해졌다. 18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 없이 66세를 일기로 승하해 이곳에 묻혔다. 생전에 영조가 들어갈 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으나 후에 들어가지 않았다.
<홍릉 홍살문과 정자각>
일설에 의하면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할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영조를 홍릉에 모시지 않고 동구릉 내 효종의 영릉 터에 안장했다는 설과, 다른 일화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영조와 함께 묻히기 원해 서오릉에 있는 영조의 유택을 선택하지 않고 비워놓았다는 설이다. 어찌되었든 홍릉은 조선 왕릉 42기 중 유일하게 왕의 유택이 지금까지 비어 있다.
<홍릉>
<홍릉과 정자각>
홍릉 아래로 가까운 곳에는 창릉이 있다. 창릉(昌陵)은 조선 제8대 예종(1468∼1469 재위)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가 잠든 능이다.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은 창릉이며,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이다. 예종은 겨우 14개월 동안 왕으로 있던 짧은 동안 직전수조법을 제정하고 삼포(三浦)에서 왜(倭)와의 사무역을 금했으며, 반포는 못했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도 편찬했다.
<창릉 홍살문>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봉분 주위로는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혼유석(魂遊石), 고석(鼓石), 석양(石羊), 석호(石虎),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등의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의 무늬가 독특한데 문고리를 새겨 넣어 북과 아주 흡사한 모습이라고 한다. 왕비릉의 문인석은 왕릉과는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짧은 상모가 있다. 왕릉 앞의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양쪽 능 아래 중간지점에 정자각과 홍살문이 있다.
<창릉(예종)>
<창릉(안순왕후)>
창릉에서 돌아 나와 서어나무 길로 접어든다. 길은 적당히 오르고 내리는 걷기에 아주 편한 길이다. 서어나무는 자작나무과에 속하는 갈잎큰키나무이다. 서어나무를 한자말에 ‘서목’이라 하여 서쪽에 있는 나무란 뜻으로 우리말로 서나무, 서어나무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서어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것보다 대개는 무리 진 군락으로 사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나무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로 별명이 머슬트리 즉 근육나무라고 일컫는다. 한자로는 견풍건(見風乾)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서어나무 숲>
서어나무 길을 한참 걸어 올라와 반환점을 돌면 소나무 숲길을 만난다. 소나무 숲길은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약2,0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간간이 오래된 소나무도 허리를 굽은 채 자리를 지킨다. 그런데 소나무 길도 숲길을 짧게 걷는 대신 마지막 고개는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경사가 좀 급해 숨결이 팍팍해지고 메마른 길바닥에서는 흙먼지가 풀풀 날리어 바지자락에 달라붙는다.
<소나무 숲>
소나무 숲길을 지나 내리막으로 접어들면 인성대군 초장지(初葬地)로 가는 샛길이 나온다. 인성대군(仁城大君, 1461∼1463)은 예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세조 9년에 세상을 떠나자 의경세자(懿敬世子) 무덤 근처에 묘를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고양시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 왕자·왕녀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인성대군은 예종과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원손으로 태어났으나 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성대군으로 추봉되었다.
<인성대군 초장지>
서오릉에선 특히 한 많은 궁중 여인네들의 처연한 삶을 많이 만난다. 여기에 묻힌 열두 분 중 임금은 세 분이며 나머지는 왕비를 비롯한 비빈(妃嬪) 들이다. 세 분 임금 중 덕종은 추존(追尊)되었고, 예종은 14개월 재위 하였으며, 숙종만 47년간 제대로 임금 노릇하였다. 나머지 비빈들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구중궁궐(九重宮闕)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간혹 수렴청정(垂簾聽政) 등으로 정치권력의 일선에 머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인들은 외롭고 고단한 삶을 보내야만 했다. 한(恨)의 눈물을 삼키며…
<서오릉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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