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가깝고도 먼 길 - 서오릉(1)

와야 정유순 2022. 2. 3. 22:23

가깝고도 먼 길 - 서오릉(1)

(2022 1 31)

瓦也 정유순

 

  서오릉!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동쪽 구리시에 동구릉이 있다면 서쪽 고양시에는 서오릉이 있다. 동구릉은 1408년 조선 태조가 건원릉의 터를 잡으면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후비포함)가 잠들어 있는 곳이고,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능역(陵域)으로 덕종(德宗 추존), 예종(睿宗), 숙종(肅宗) 등 세 분의 왕과 왕비(후비포함)  5개의 능이 있는 곳이다. 이 서오릉을 가기 위해 지하철 6호선 구산역에서 내려 출발한다

<구산역>
 

  구산역(龜山驛)은 서울지하철 6호선 연신내역과 응암역 사이에 있다. 2000 12월 개업했으며, 응암 순환 구간에 위치한 1 1선의 곡선 단선 승강장이다. 구산동(龜山洞)은 이 마을 건너편 산의 형상이 거북이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역명(驛名)은 동명에서 유래했다. 이곳에는 거북 받침의 인조별서비(仁祖別墅碑)’가 있다고 하며, ‘별서(別墅)’는 농장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농막으로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 집이라는 점이 다르다. 구산역에서 서오릉까지의 거리는 약3 미만이다

<서오릉>
 

  조선 세조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懿敬世子) 1445(세종 27)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5(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459(세조 5) 즉위하기 전에 2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1471(성종 2)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세조는 맏아들 의경세자가 갑자기 요절하자 지금의 서오릉 지역인 효경산(孝敬山)에 묻고, 봉산(熢山) 동쪽 기슭에 수국사(守國寺)라는 절을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

<조선왕릉 역사문화관>
 

  서오릉 가는 길목에 있는 수국사는 조계사의 말사로 1459(세조 5)에 창건되었으며, 당시에는 정인사(正因寺)라 하였다. 1471(성종 2) 소혜왕후(昭惠王后)가 명하여 판내시부인 이효지(李孝智)가 중창하였으며, 당시 화엄종의 설준(雪峻)이 중창을 설계했는데, 단청이 뛰어나 봉선사(奉先寺)에 버금갔다고 한다. 1900년에는 병환에 시달리자 태자를 위해 고종의 명으로 백일기도를 올려 회복되자 고종이 재물을 하사하여 중창하였다. 1995년에는 한자용(韓慈容)이 대웅보전 내·외부에 금칠을 한 황금보전을 세웠다

<수국사 대웅보전>
 

  서오릉(西五陵)은 덕종(德宗)의 경릉(敬陵)을 시작으로 서울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덕종의 동생 예종(睿宗)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분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을 합쳐 부르는 명릉(明陵) 그리고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 불렀다 

<경릉 모형>
 

  이 외에도 명종(明宗)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공빈 윤씨(恭嬪尹氏)가 묻힌 순창원(順昌園),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를 신촌에서 옮겨온 수경원(綏慶園),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서오릉은 1970년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었다

<순창원 모형>
 

  매표소에서 입구를 통해 입장하면 우측으로 명릉이 나온다. 명릉에는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가 쌍릉에 나란히 누워 있고, 2계비 인원왕후가 이들을 내려다보면서 왼편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숙종(16741720 재위)은 경희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열네 살에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했다. 그 후 47년간 집권하다 60세에 경희궁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했다

<명릉 전경>
 

  숙종 때 당쟁이 가장 심했다. 심지어 북벌론을 둘러싼 명분논쟁까지 당파의 분쟁은 끊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하던 사회를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에 확대 실시했음은 물론 북벌정책의 일환으로 압록강 변에 2진을 설치하고 5군영제를 확립, 군제를 개편했으며, 사육신과 단종(端宗)을 복위하는 등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새로운 평가·정리 작업 등도 시도했다.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시행하였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명릉과 정자각>
 

  이곳에 함께 묻힌 인현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이다. 여흥 민씨 민유중의 딸로 예의바르고 덕성이 높아 자상한 국모로 추앙받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아들을 낳아 득의에 찬 희빈 장씨의 간계로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되었으나 1701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여기에 묻혔다.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장희빈의 일을 기록해놓은 전기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한다

<명릉(숙종과 인헌왕후)>
 

  숙종 능 위편에 홀로 잠든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이다.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왕비로 간택됐으나 소생 없이 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는 평소 숙종(肅宗)과 함께 묻히기를 소원해 미리 명릉에서 400여 보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아두었으나 인원왕후의 소원대로 하자니 정자각을 각각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영조는 지금의 위치대로 능을 쓰고 한 정자각의 제사를 받게 했다고 한다

<명릉(민원왕후)>
 

  명릉 옆에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묘인 수경원(綏慶園)이다. 원래는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구내에 있었으나 1970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1899(고종 36)에 정자각과 비각을 새로 신축하고 비석도 새로 세웠는데 정자각과 비각은 연세대학교 구내에 그대로 남아 있어 비각과 비석이 서로 떨어져 있다. 영빈 이씨(16961764)는 영조의 후궁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은 후궁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후궁 가운데 으뜸의 격식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수경원>
 

  수경원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익릉이다. 익릉(翼陵)은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19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열 살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다. 1680(숙종 6) 천연두를 앓아 발병 8일 만에 세상을 뜬다. 이때 왕비의 나이 겨우 스무 살, 어느새 세 딸을 두었으나 두 공주는 벌써 어미의 죽음을 앞질렀으니 인경왕후의 운명도 참으로 기구했다

<익릉 홍살문과 정자각>

 

<익릉>
 

  익릉에서 우측으로 내려오면 사적(198)으로 지정된 순창원이다. 순창원(順昌園)은 명종(明宗)의 장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와 세자빈인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합장묘다. 원래는 순회묘라고 하였으나 그 뒤 순창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회빈 윤씨(?~1592)는 윤옥의 딸로 1559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순회세자 사후 30년을 홀로 지내다가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 세상을 떠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宣祖)가 신주(神主)를 만들어 순회세자와 합장하였다

<순창원>

 

 이어서 2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