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길 - 정릉
(2022년 1월 22일)
瓦也 정유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아내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릉(陵)이다.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 1356∼1396)는 1392년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자 현비(顯妃)에 봉해졌다. 남편 이성계보다 무려 21살 연하로 첫 부인의 소생인 장남인 이방우보다 3살 어렸고, 또 이성계의 둘째 며느리인 정안왕후보다 1살이 어렸다. 슬하에 왕자 두 명(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과 공주 한 명(경순공주)을 두었다.
<정릉 매표소>
언제 혼인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 이방번의 생년이 1381년이고 방번의 누나 경순공주(생년 미상)가 있기에 아무리 늦어도 20대 초에 혼인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태조의 정치적 조언자로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을 재치고 자신의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芳碩)을 세자로 만들었으나 태조 5년(1396)에 신부전증으로 승하한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며, 1899년(광무 3년) 대한제국 고종에 의해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추존되었다.
<정릉 너럭바위>
신덕왕후 강씨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 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었다.
<정릉 홍살문>
태조와 신덕왕후가 만나게 된 사연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몹시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기분이 상한 이성계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정릉 홍살문과 향어로(香御路)>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의 만남에 대한 설화와 동일하다. 장화왕후와 신덕왕후는 각각 나라를 세운 시조의 두 번째 부인이며 지방의 세력 있는 호족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와전된 것이거나, 많은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구조의 버들잎 설화가 이성계와 결부된 것 같다.
<정릉 정자각>
1392년 음력 3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廬墓)살이를 하던 이방원(李芳遠)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낸 것이 경처 강씨였다. 또한 이방원이 그해 음력 4월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이를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이는 강씨의 수완과 결단력을 상징해주는 대목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성을 보여준 것이다.
<정릉 전경>
<정릉>
그러나 신덕왕후는 왕비의 지위에 오래 있지도 못했다. 즉위 초부터 병이 있었고, 결국 1396년(태조 5)에 세상을 떠났다. 태조는 왕비의 장례를 치르면서 권근(權近)에게 부인에 대한 감정을 “고려 말 관직에 있을 때부터 조선 건국의 과업을 이루기까지 왕후의 내조가 많았고, 이후 국정운영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충고하고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정릉 수라간>
<정릉 수복방>
그리고 그는 신덕왕후의 죽음을 어진 재상을 잃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이후 태조는 왕후가 묻힌 정릉을 자주 찾아가서 그리워하였다. 그러던 중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이 변란은 신덕왕후의 두 아들과 사위를 모두 죽음으로 내몰았고 경순공주는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대한신덕고황후정릉 비>
유네스코세계유산과 사적(제208호)으로 지정된 정릉(貞陵)은 원래 1396년(태조 5)에 신덕왕후 강씨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聚賢坊, 현 서울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영(造營)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沙乙閑山, 현 정릉)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신덕고황후비각>
이후 민묘(民墓)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는데, 단릉의 형식으로 문석인(文石人), 석마(石馬), 장명등(長明燈), 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석양(石羊), 석호(石虎)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顯宗) 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정릉 봉분, 혼유석, 장명등>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특히 홍살문은 일반 조선 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 측면으로 서있어 정자각까지 연결되는 향어로(香御路)는 문에서 직선으로 뻗다가 정자각 앞에서 직각으로 꺾이는 절선 축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 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하게 하였다.
<정릉 후면>
묘역을 중심으로 소나무를 비롯한 숲이 울창하고 그 사이로 숲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정자각 앞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길을 따라 오르막에 올라서면 먼저 북한산의 보현봉이 우뚝 보이고 무심코 길을 따라 가다보면 멀리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이 아물거린다. 북악스카이웨이로 연결된 도로에는 자동차가 한가롭게 달린다.
<북한산 보현봉>
물론 능역을 지키는 나무는 소나무지만 낙엽 진 참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나목(裸木)으로 하늘로 솟아 있으며, 오르막 정상 부근에는 팥배나무 군락지가 있다. 팥배나무 꽃은 봄에는 배꽃처럼 화사하고 가을에 익은 열매는 붉은 팥알만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양질의 꿀도 듬뿍 하여 벌 나비도 많이 몰려들 뿐만 아니라, 열매는 겨울철에 산새들의 훌륭한 먹이가 되고 사람들도 달여 먹으면 위장병에 좋다고 한다.
<팥배나무 열매>
숲길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정릉 입구의 재실 옆으로 내려온다. 재실(齋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 하는 곳으로 제례(祭禮)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와 그의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리 부재로 소실되었던 정릉 재실은 2012년에 발굴 조사하여 2014년에 복원하였다. 재실 옆으로는 수령 38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정릉 재실>
<정릉 재실 안채>
정릉에서 약1.5㎞쯤 떨어진 성북구 돈암동에는 흥천사라는 절이 있다. 흥천사(興天寺)는 1395년(태조 4)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가 죽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원찰(願刹)로 170여 칸 규모다. 이 사찰은 1396년에 정릉이 완성된 후 정릉 동쪽에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나 공사기간 중 왕자의 난이 일어나 1398년(정종 1)에 완공되었다. 극락보전과 명부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제66호, 제67호)로 지정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다.
<흥천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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